소설리스트

12시의 마리오네트-31화 (31/162)
  • 31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릿한 시야의 한가운데에 주황색이 물감처럼 번져 있다.

    사람의 머리카락이었다.

    “우와, 우와, 우와!”

    중년 여자가 내 앞에 쭈그려 앉아, 경망스럽게 떠들어 댄다.

    9원로 큐딜. 알아차린 순간 의식이 또렷해졌다.

    “눈 좀 봐, 보석 같다! 팔아도 되겠어!”

    “겨우 이 정도로 호들갑이야?”

    아차,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게 그만.

    그래도 진심이다.

    시오라의 외관이 괜찮기는 해도 내 본체는 훨씬 대단하니까!

    “세상에, 겸손하기까지 하네.”

    “으으음.”

    “아까워서 어쩐대. 이런 미인을 죽여야 한다니…….”

    큐딜은 혀를 차며 단검으로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반응하지 않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의식을 잃기 전과 다른 마차다.

    이쪽도 창문은 새까만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더 크고 투박했다.

    아무래도 상행에 쓰는 것 같은데.

    그러나 달라진 건 마차뿐인 것 같았다.

    내 손발이 묶여 있지도 눈이 가려지지도 않았다.

    아, 손가락은 좀 허전한데?

    크루엘로가 준 반지가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건.

    “반지 찾아? 여기 있어.”

    큐딜의 손가락에 있었다.

    잃어버린 게 아니라면 됐다.

    “마나가 느껴지는데 마도구야?”

    “그렇지, 뭐.”

    “비싸?”

    “그럴걸?”

    영구 게이트가 연결된 반지니 어마어마하겠지.

    설렁설렁 대답하며 나는 조금 더 과감해졌다.

    ─2주문, 감각 확장extension.

    마차는 인적이 드문 곳을 달리고 있었다.

    근처 산쯤 되려나.

    근방에 있는 사람은 마부와 큐딜뿐인데, 마부는 완연한 일반인이었다.

    부하를 데려오지 않은 건 흔적을 최소화하기 위해선가?

    “저기…….”

    큐딜이 어색하게 말을 걸어왔다.

    “너 혹시 감정 느끼는 데 뭐 문제 있어? 지금 안 무서워?”

    혹시 성력을 눈치챘나 싶었지만, 그건 아닌 듯했다.

    대단히 솜씨 좋은 흑마법사는 아니다.

    성직자가 흑마법에 민감한 만큼 반대도 마찬가지다.

    페불라의 성력이 은밀하고 자연스럽다고 해도, 흑마법사가 이걸 모르다니 긴장감 떨어져.

    “왜?”

    “왜냐니, 납치당하는 중이잖아.”

    “묶여 있지도 않고 위협당하고 있지도 않은데.”

    “그야 시체에 흔적이 남으면 골치 아파지니까……. 그런데 아까부터 왜 반말이야?”

    “그러는 너는?”

    “에효, 미치광이였구만. 어쩐지 도련님이랑 아득바득 결혼하려는 게 이상하더라니.”

    겁에 질린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아까워라.

    큐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를 쭉 펴니 키가 제법 컸다.

    김이 샌 얼굴로 그녀는 마부석 쪽을 툭툭 두드렸다.

    “그냥 절벽에 꼬라박아, 아스터!”

    마차가 속도를 높였다.

    그녀의 말대로 절벽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3분 내로 도착할 것 같은데 안 되지.

    나는 실망한 큐딜에게 말을 붙였다.

    “설명 더 안 해 줘? 이런 상황에선,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었다며 어쩌고저쩌고 다 말해 주잖아. 그게 클리셰 아냐?”

    “말한들 미친 머리로 이해는 하겠어?”

    “아, 실망이야.”

    “허?”

    “그러면 내가 말할 테니까 검토라도 해 줘.”

    얼씨구, 큐딜이 헛웃음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해 보란 듯한 턱짓에 나는 주절주절 떠들어 댔다.

    “시오라 보네티는 화이트데저트 마차에서 다른 마차로 옮겨졌다. 왜냐하면 시오라가 약혼식에서 도망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화이트데저트의 마부는 이렇게 둘러대겠지.

    ‘레이디 시오라께서 마차에서 잠깐 내려 달라고 말씀하시더니 어딘가로 뛰어가셨습니다.’

    막상 약혼식이 코앞이 되니 감당하지 못하고 달아났고, 상행용 마차를 빌려 탔으며.

    “이 마차는 절벽에 떨어져서 발견될 것이다.”

    그만 사고로 죽어 버렸다.

    “뭐야, 이 상황에서 세 살짜리라도 그 정돈 알겠다. 대단한 거라도 말하는 줄 알았더니.”

    “이 일을 사주한 건 원로회이다.”

    “좋아, 열세 살로 올려 주지.”

    “지금 주변에 있는 원로는 큐딜 화이트데저트뿐이다.”

    제 이름이 나오자, 그제야 큐딜의 얼굴이 변했다.

    뻔한 이야기 들어 줘서 고맙다.

    덕분에 성력을 충분히 끌어올리고도 시간이 남았으니.

    “잘 먹겠습니다!”

    말을 하는 동안 끌어모은 성력을 한 점에 압착, 그리고 발산.

    ─6주문. 광휘brilliance.

    화아악, 눈앞에서 피어난 반딧불이만 한 빛이 폭발적으로 뻗어 나갔다.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검은 마나─흑마법사, 몬스터 등─만을 타깃으로 한 주문이었기에, 마차는 손상 없이 큐딜만 공격…….

    “할 줄 알았는데 뭐야, 악!”

    마차가 거세게 흔들렸다.

    말이 울부짖는 소리도 요란했다.

    차체가 여기저기 부딪쳤고, 사람을 태우기 위한 마차가 아니었던 만큼 충격 흡수가 전혀 되지 않았다.

    새까만 커튼이 찢어지도록 붙잡고 버텼는데도, 마차가 멈췄을 때는 머리가 산발이 되었다.

    헉, 헉, 숨을 몰아쉬며 나는 이유를 탐색했다.

    뭐지, 마부는 분명히 흑마법사가 아니었는데?

    일반인은 눈만 부시고 말 텐데…….

    “아하.”

    그거군.

    그렇지, 눈이 부신데 어떻게 마차를 몰고 가겠어.

    스스로의 바보 같은 행동에 머쓱해져서 나는 괜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큼큼, 납치당하는 게 처음이니 할 수 없지.”

    두 번째부턴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결의했다.

    그 순간, 아슬아슬하던 마부석이 통째로 뜯겨 나갔다.

    “아아아악!”

    비명이 아스라이 멀어진다.

    나는 슬금슬금 움직여 뚫린 곳으로 다가갔다.

    큐딜의 말마따나 절벽에 ‘꼬라박기’ 직전이었는지 시야가 휑했고, 마차의 바퀴가 빼꼼 절벽 밖으로 튀어 나가 있었다.

    “조금 더 갔으면 어림없이 죽었겠는데?”

    다행히 말 두 마리는 다리를 다쳤을지언정 무사해 보였다.

    저건 내가 고쳐 주면 되니까.

    마부는…… 그대로 떨어진 모양이다.

    나는 바닥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절벽을 보며 손바닥을 모았다.

    페불라시여, 한 놈 갑니다.

    “쿨럭!”

    피를 토하는 신음에 원래 자리로 되돌아왔다.

    큐딜은 만신창이가 된 채 내동댕이쳐진 상태였다.

    죽은 건 아닌 것 같지만 몰골이 흉하다.

    나는 일단, 그녀의 앞에서 굴러다니는 내 반지를 회수하고 물었다.

    “너 진짜 원로 맞아? 왜 이렇게 약해?”

    방심한 틈을 타 공격하긴 했지만, 6주문이면 바깥 기준으로 수석 신관 정도다.

    한 교구를 담당하는 최종 책임자─제국 수도는 예외─ 정도?

    그런데 원로회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원로가 이 모양이라니.

    수확제에서 만났던 아레스와 참 비교된다.

    “끅, 끄윽, 흐…… 흐흐, 흐흐흑크.”

    이게 괴로워 내는 신음인지 웃는 소린지 구분이 안 된다.

    “이거 설마 단말마─.”

    그 순간, 눈앞으로 새까만 점액이 날아들었다.

    독.

    그것도 제법 눈에 익다. 레카논 사건 때 봤던 것이었으니.

    나는 눈을 찡그리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정화purification.”

    내 얼굴을 향해 달려들던 독액이 단번에 사라졌다.

    큐딜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맞아, 난 약해. 끈기도 형편없고 감각이 섬세하지도 않지. 틈만 나면 방심하고 집중력도 떨어져.”

    “…….”

    “그런데도 원로가 될 수 있던 건, 꼬마야.”

    그녀의 입꼬리가 찢어질 것처럼 길게 올라갔다.

    “내가 동물을 조종할 수 있어서란다.”

    쿵.

    마차에 충격이 전달됐다.

    열린 감각을 통해 바깥 상황이 느껴졌다.

    마차에 머리를 박고 있는 건 다리를 다친 말이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바퀴가 느리게 굴러 절벽 쪽으로 움직인다.

    큐딜의 눈이 기름을 칠해 놓은 듯이 번들거렸다.

    “너도 방심이라면 나 못지않게 하는 것 같지만 말이야.”

    허.

    나는 기가 차서 웃었다.

    “마차를 밀어서 절벽에 떨어뜨리려고? 해 봐.”

    “하하, 허세를 부려도─.”

    “해 보라고.”

    예상한 반응이 아닌지 그녀의 입매가 굳었다.

    말들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뭐, 못 하겠으면 내가 해 줄까?”

    나는 또다시 손에 성력을 끌어모았다.

    새하얀 빛이 둥글게 웅크렸다가 꾸물꾸물 움직여 망치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그 위로 푸르스름한 전류가 흘렀다.

    ─7주문. 심판judgement.

    좀 작게 만들었지만, 이번에는 검은 마나 외에도 통하는 물리 공격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마차를 받친 절벽도 짓뭉갤 거력이 담겨 있다.

    내가 망치를 들어 올린 순간.

    “자, 자, 잠깐!”

    “나 바빠. 빨리 말해.”

    “아니, 진짜로 미쳤어? 뭐야? 아니, 대체 뭘 믿고……!”

    당황해 횡설수설하던 큐딜의 눈이 문득 내 손가락으로 향했다.

    그곳엔 제자리를 찾은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설마 그 반지에 깃든 마법이 이동 마법이야? 게이트?”

    “알면서 뻗댄 거야? 배짱 좋네! 멍청하기도 하고.”

    허, 허허……. 그녀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용건은 끝난 것 같아서, 나는 다시 망치를 들어 올렸다.

    “잠깐, 잠깐, 제발 잠깐만!”

    “대답해 줬잖아, 왜 자꾸 불러 대.”

    “우리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자. 여기서 마차가 떨어지면 좋을 게 없어. 응? 내가 아는 게 얼마나 많겠어, 이대로 죽으면 너도 손해라니까?”

    “할 말은 그게 다야?”

    “살려 줘!”

    큐딜이 잽싸게 무릎을 꿇으며 비굴하게 웃었다.

    진짜 없어 보여서 나도 따라 웃었다.

    어쨌거나 기는 꺾었으니 된 건가.

    입을 열려던 순간.

    삐빅, 짧고 날카로운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소음은 큐딜의 안주머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눈치를 살피며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푸른색 구슬.

    통신구였다.

    “연결해 봐.”

    누군지 들어나 봐야지.

    나는 망치를 더욱 힘주어 잡으며 말했다.

    큐딜의 마나가 통하자, 통신구가 붉게 물들었다.

    그 너머에서 곧바로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된 겁니까.]

    딱딱하게 굳은 남자의 저음.

    수확제에서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상대는 10원로, 아레스였다.

    “뭐가.”

    [약혼식이 예정대로 진행 중입니다. 시오라 보네티가 여기에 있단 말입니다!]

    “뭔 헛소리야? 시오라 보네티가 어떻게 거기…….”

    큐딜은 말끝을 흐리며 눈가를 찡그렸다.

    곧이어 자조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함정이었나, 쪽팔리게.”

    말해 뭐 해, 당연히 함정이지.

    분수대 밑으로 기어들어 간 날부터, 이미 덫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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