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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30화 (30/162)
  • 30화

    “흡!”

    크루엘로의 난데없는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숨을 참았다.

    물의 높이가 사람 키의 절반도 안 되었으나 물이 이상하리만치 깊다.

    머리끝까지 푹 잠겨 들었다.

    그러나 오래 버틸 필요는 없었다.

    “푸하?”

    몸에 닿던 물이 갑자기 사라졌다.

    손가락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나는 조심스럽게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속눈썹에서 물방울이 툭툭 떨어져 뺨에 닿았다.

    “여기는…….”

    분수대 아래쪽에 게이트를 열어 놓았던가.

    좀 전의 공원과는 아예 다른 공간이었다.

    사방이 캄캄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으나 미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크루엘로가 말했다.

    “와 본 적 있죠?”

    “여기에요? 제가……. 잠깐만, 여기!”

    그 말을 듣고 나니 생각난다.

    휙 고개를 돌리자 긴 통로와 천장에 점점이 떠 있는 마법 등이 보였다.

    “전에 온 정보 길드? 뭐예요, 이게 왜 여기로 연결돼요?”

    “당연히 내가 연결해 뒀죠. 이 길드 내 거거든요.”

    말문이 턱 막혔다.

    크루엘로는 내게서 떨어져 손을 튕겼다.

    사방이 환하게 밝아지고 공간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암호문 좀 읊었다고 내 정보를 팔아 치우는 간 큰 길드가 어디 있겠어요?”

    “아니, 진짜 사기꾼이잖아!”

    “반응이 그렇게 격렬하니 기쁘네요. 내 달링이 너무 순진해 안타깝기도 하고.”

    순진한 날 신나게 속여 먹고는 그게 할 소리냐?

    크루엘로는 하하, 웃으며 몇 번 더 손을 튕겼다.

    벽난로─전에는 너무 컴컴해서 있는지도 몰랐다─에 불이 켜지고, 꽉 막힌 줄 알았던 벽에 금이 가더니 문이 생겼다.

    그가 자연스럽게 그 안을 들어갔다, 나왔다.

    크루엘로의 손에는 수건이 들려 있었다.

    “그때도 딴에는 배려한 거였어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궁금해하길래.”

    그가 다가와 부드럽게 내 어깨를 눌렀다.

    바로 뒤에 있던 소파에 나를 앉히고,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수건으로 닦았다.

    기분을 풀어 보려는 모양인데 부족하다.

    더 해라.

    “좋아요, 다 좋은데 왜 영구 게이트를 공원 분수대에 연결해요? 거기 갈 일이 얼마나 있다고.”

    영구 게이트는 말 그대로 계속 쓸 수 있는 게이트다.

    실은 반영구지만.

    만들기가 어마어마하게 까다로운데 파괴하기는 쉬워서 보통 비밀 통로에나 숨겨 둔다.

    그런데 그걸 왜 거기다 만들었으며 이렇게 허비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음? 그건 눈속임인데.”

    “영구 게이트가 아니에요?”

    “맞아요. 여기로 오는 게이트. 그런데 입구가 분수대는 아니에요.”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시선을 내렸다.

    내 손에서 평소와 다른 색으로 반짝이는 게 있었다.

    “약혼반지?”

    “문지르기만 하면 여기로 올 거예요.”

    허, 어쩐지 뜬금없는 상황에 반지를 내밀더라니.

    크루엘로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였다.

    “달링의 목숨, 내가 책임지기로 했잖아요.”

    “예에, 덕분에 그놈들은 애먼 분수대나 뒤적거리고 있겠네요.”

    그건 좀 꼬시다.

    벽난로가 타고 있긴 하지만, 어느덧 겨울의 초입이라 젖은 몸이 춥다.

    나는 팔을 살살 쓸었다.

    크루엘로는 수건을 내려놓고 다시 방에 들어갔다, 나왔다.

    이번에 들고 나온 건 담요였다.

    “그런데 아까 너무 허술하지 않았어요? 화살을 많이 쏘긴 했지만, 그게 다였잖아요.”

    “그야 보여 주기식 암살이었을 테니까요.”

    크루엘로가 내 몸에 담요를 둘둘 감았다.

    옷이 젖은 상태라 불쾌할 줄 알았는데, 담요가 옷의 수분을 쫙 빨아들였다.

    그새 마법을 걸었나.

    “내가 원로회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마냥 가만히 있으면 의심할 게 뻔하니까요. 긴장을 느슨히 할 겸 간을 본 거겠죠.”

    “하기야 진심이었다면 혼자 있을 때 공격했겠네요.”

    크루엘로가 담요 몇 개를 더 가져와 나를 눈사람처럼 만들었다.

    몸이 포근해지니 슬슬 기분이 풀린다.

    그런데 이상하네.

    “진짜 혼자 있을 때 공격하는 게 편하지 않아요?”

    내 무력을 전혀 모를 텐데, 시도도 하지 않은 게 이상하다.

    정말 날 죽일 생각이 있긴 한 건가?

    크루엘로가 감흥 없이 답했다.

    “그러면 시시하잖아요.”

    “뭐요?”

    “오해하지 말아요. 달링의 죽음이 시시하다는 게 아니니까.”

    이번에 그는 벽장으로 향했다.

    머그컵과 초콜릿 주전자. 우유와 말랑말랑한 마시멜로.

    저렇게 완벽한 조합이라니, 내 취향을 어떻게 안 거지?

    의심하려다가 내가 앉아 있는 이곳이 정보 길드임을 떠올렸다.

    “마땅한 무대가 있어야 불행이 더 비극적인 법이거든요.”

    크루엘로가 건넨 컵을 받아 들었다.

    따뜻하게 피어나는 김이 내 마음을 사르르 녹였다.

    너무 뜨거워서 바로 마실 수는 없었지만.

    “무슨 말이에요?”

    “내 부모님과 친하게 지내던 사용인들은 내가 소공작으로 임명된 날 죽었어요.”

    음, 마셨다간 사레들렸을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래야 부정적인 에너지가 더 많이 모여들거든요.”

    “…….”

    “여길 다시 오니 생각나는데, 내 약혼자가 너무 많아 황당해했었죠?”

    크루엘로의 웃음소리가 났다.

    “변명하자면 내가 주도한 건 아니었어요. 다 불행의 제물이 됐을 뿐.”

    아는 척할 수는 없었으나 어느 정도는 알던 이야기였다.

    모리온을 더 잘 다룰 수 있도록 크루엘로의 기질을 바꾸기 위해, 원로회는 끊임없는 비극을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에이미 때, 크루엘로의 주변을 양적인 감정으로 채워 주고 싶었다.

    결국, 실패했지만.

    “그래도 후반부 상대들은 나았죠. 초반부는 내가 잘 모를 때라, 손쓰기도 전에 죽어 나갔거든.”

    “수도원에 들어간 이가 하나. 거래로 합의한 이가 다섯. 병에 걸린 이가 둘. 사망자가 둘입니다.”

    그 많은 약혼 상대들도 그 일환이었구나.

    옅게 한숨을 내쉬자 머그잔에서 피어오르던 김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러다 보니 내가 저주받았다는 소문도 돌고. 뜨거워요?”

    “조금요.”

    크루엘로의 손이 한 번 더 움직였다.

    허공에서 피어난 조그만 얼음 알갱이 몇 개가 초콜릿 사이로 떨어졌다.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이야기가 음침한 데로 흘렀네요. 그래서 화 풀렸어요?”

    이 상황에서 화를 내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설마 의도하고 그 얘길 꺼낸 건 아니겠지.

    나는 미묘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크루엘로가 소파의 맞은편에 앉았다.

    나와 달리 그는 조금도 마음이 가라앉아 보이지 않아서 그게 신기했다.

    “어느새 약혼식이 코앞이니 좀 더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 볼까요.”

    다리를 꼬며 크루엘로가 나긋이 웃었다.

    “모리온을 찾을 방법 말이에요.”

    ***

    시간은 쌓이고 쌓여, 어느새 나를 약혼식 날까지 데려왔다.

    ‘그날은 시오라 보네티의 약혼식 날이었다.’

    〈운명〉을 변형하자면 이런 느낌이겠지.

    약혼식은 화이트데저트 공작저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식을 주관하는 건 골든스토브 백작으로 크루엘로의 어릴 적 스승이었다.

    내가 에이미일 때도 종종 마주쳤는데 이렇게 보게 되니 기분이 이상하다.

    하기야 이상하기로는, 내가 여기서 약혼식을 치른다는 게 몇 배는 이상했지만.

    “숄 색이 튀어, 시오라.”

    공작저에서 보내 온 마차는 백작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당사자는 상대 가문에서 보내 준 마차를 타고 가는 게 제국의 전통이라, 출발하는 건 내가 먼저였다.

    미뉴엣이 마지막으로 내 상태를 점검해 줬다.

    “마차에 두고 내릴 거야.”

    “그렇다면야. 우리도 바로 출발할 거야, 조금 이따가 봐.”

    가보트는 못마땅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슥 다가와 귀에 속삭였다.

    “도망치고 싶으면 중간에라도 말해.”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군.

    집요하다.

    나는 마지막으로 백작을 쳐다봤다가 그의 음침한 얼굴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마차에 올라타자 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

    결혼도 아닌데 기분이 진짜 너무 이상하군.

    “으으음.”

    속이 답답해 창문의 커튼을 열려 했지만, 단단히 고정되어 움직이지도 않았다.

    화이트데저트의 마차가 원래 이랬던가?

    하기야 별 상관없지.

    나는 등받이에 멍하니 기대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바퀴는 잘 포장된 도로 위를 매끄럽게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지났다.

    “……잘못 짚었나?”

    의아해 고개를 기울이는 때, 기다리던 반응이 도착했다.

    포장된 도로를 벗어난 것처럼 잔 진동이 많아졌다.

    더하여.

    취이익, 마차의 문틈에서 기묘한 연기가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나는 의례상 마부석 쪽을 몇 번 두드렸다가 저항 없이 눈을 감았다.

    ***

    시오라를 제외한 보네티 일가가 화이트데저트 공작저에 도착했다.

    백작부인은 아직 요양 중인 터라, 결혼식 때나 수도에 올라오기로 했다.

    가보트는 끔찍하게 커다란 저택에 들어서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 공작과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인연이란 게 참 끔찍하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시오라를 찾아 대기실로 향했다.

    그러나 안은 비어 있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는데?

    혹시 잘못 들어왔나 확인하려던 때 누군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누나 찾아?”

    “시오─. 야!”

    고개를 돌린 순간, 삐죽 나와 있던 검지에 뺨을 찔렸다.

    가보트는 평소대로 소리치려다 가까스로 목청을 죽였다.

    안 내키는 약혼이라도 예의는 지켜야지.

    “하하, 가보트 표정 봐!”

    “넌 긴장되지도 않냐?”

    “엥? 내 동생 긴장했어? 또 다리 떨고 있어? 심장이 두근두근 터질 것 같아?”

    “때와 장소를 구분해라, 좀.”

    가보트가 체념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은 어디 갔냐.”

    “몰라, 아까 잠깐 보긴 했는데 곧 오겠지.”

    “아무튼, 그 자식은……. 됐다. 너 내가 아까 한 말 기억하지?”

    “가보트가 뭐랬더라? 사랑한다고 했던가?”

    시오라가 천연덕스럽게 가보트를 놀렸다.

    그는 화를 내려다가 눈가를 찡그렸다.

    ‘뭔가 좀 이상한데.’

    “왜 그래, 가보트?”

    “너 진짜 안 내키면 도망가라.”

    “우와, 약혼식 날까지 그 말 할 줄은 몰랐다.”

    “너…….”

    “알았어요, 동생님. 곧 식 시작하니까 나가 봐.”

    시오라가 빙그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가보트는 입을 달싹이다가 대기실을 나왔다.

    역시 뭔가 이상하지만…….

    ‘착각이겠지.’

    곧 약혼식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가보트는 밖으로 나오고 싶어 하는 제 정령을 달래며 걸음을 옮겼다.

    “착하지, 피아니시모. 여기선 못 불러 줘. 소란 피우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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