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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29화 (29/162)

29화

미뉴엣 보네티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었나?

의문은 다른 의문을 낳았다.

이 애는 백작의 비리를 알고 있었을까?

게늄 자작 때 꼬리를 자르니 뭐니 한 것만 봐도 아예 무결할 순 없겠지.

어쩌면…… 동조했을까.

미뉴엣이 입을 열었다.

“용건 끝났으면 비켜.”

“……그래.”

나는 굳었던 발걸음을 옮겼다.

미뉴엣을 스쳐 지나갈 때, 그녀가 물었다.

“진짜야?”

미미하게 떨리는 목소리.

아무래도 다 알지는 못했나 보군.

“직접 알아보지 그래.”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그녀를 지나쳤다.

내가 그 자리를 벗어날 때까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미뉴엣이 집무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도, 그 안으로 들어서는 소리도, 아무것도.

***

“으아아아!”

보네티 백작은 괴성을 지르며 책상 위를 다 쓸어 버렸다.

그의 두 눈은 실핏줄이 터져 벌게졌고 목에는 단단히 핏대가 섰다.

왜!

시오라가 어떻게 제 비밀을 알고 있단 말인가.

공작은 어째서 경솔하게 입을 놀렸단 말인가!

“흐…….”

아니지, 이유 같은 건 중요치 않다.

그는 혈관이 도드라지도록 주먹을 움켜쥐고 책상을 내리쳤다.

화이트데저트 공작이야 어쩔 수 없다 쳐도 시오라는 아니다.

평생을 집에만 처박혀 산,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

간단한 구슬림에도 넘어갈 수 있고 언제 말실수를 할지 모른다.

그런 거한테 비밀을 털어놔?

“괘씸한!”

그녀가 감히 저를 협박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이 화가 났다.

길거리에 나앉을 걸 도와줬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쳐?

역시 더러운 핏줄은 어쩔 수 없다.

“내버려 뒀다가는 욕심만 늘겠지.”

무슨 요구를 더 해 올지 불 보듯 뻔했다.

돈, 권력, 명예.

원래 인간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죽여 없애면 간단할 텐데 그럴 수도 없다.

시오라가 죽으면 화이트데저트 공작과의 혼담 문제는 원상 복귀되니까.

보네티의 후계가 그자와 결혼하는 건 더 큰 문제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렇다고 시오라가 공작과 결혼하게 내버려 둘 수도 없다.

시오라의 이름 뒤에 화이트데저트가 박히면, 백작인 제가 감히 그 가문을 어떻게 건드리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답이 나왔다.

그래, 그러면.

“약혼식 날이 좋겠군.”

잘만 처리하면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끝날 것이다.

화이트데저트 공작이 눈치챌 수야 있겠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그도 즐기고 있을 뿐이니 금방 흥미가 식을 테지.

백작의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

“약혼식 날짜를 잡았습니다.”

크루엘로는 노인을 향해 담담히 말했다.

대원로, 헤오림이 눈가를 찡그렸다.

“저번에 분명, 이 늙은이의 뜻을 따라 주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소?”

“원하시는 대로 하셨잖습니까. 실패하셨지만요.”

“……도대체 이유가 뭐요. 설마 사랑에 빠졌다는 그런 소문을 믿으라는 건 아니겠지?”

“소문대로입니다.”

“허허, 허허.”

대원로는 기가 차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불현듯 케인으로 크루엘로의 옷깃을 걸어 당겼다.

노인은 맹수가 으르렁거리듯 목소리를 낮게 깔아 읊조렸다.

“정신 차리시오, 가주의 혼담은 어린애들 소꿉장난이 아니란 말이오.”

“이해해 주십시오.”

“기어이!”

대원로는 신경질적으로 케인과 크루엘로의 몸을 밀쳐 냈다.

그러나 젊은 공작은 묵묵히 서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제가 그를 노려봐도 조금도.

얼굴에서 뭔가를 읽어 내고 싶었으나 아무것도 읽히지 않는다.

“제대로 생각해 주십시오, 대원로님. 공작전하의 세뇌는 풀린 게 틀림없습니다.”

줄리안 미네르바였던가.

그 애송이가 그런 말을 했을 때 원로회의 모두가 코웃음 쳤다.

그건 흑마법을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망언이었으니.

크루엘로가 세뇌당한 역사는 길다.

시작은 그가 아주 어렸을 때, 친부모를 죽이고 가까이 지내던 사용인을 모두 죽였다.

아이가 커다란 충격을 받아 마음이 약해진 틈을 타 정신을 장악했으며 수년의 세월을 거쳐 세뇌를 강화했다.

단순히 아이를 괴롭히기 위함은 아니다.

모리온Morion.

그 위대한 힘을 다루기 위해서는, 타고난 그릇뿐 아니라 형질을 맞춰야 했다.

끊임없는 불행과 뒤따르는 부정적인 감정, 사람들의 분노, 멸시, 두려움 같은 것들이 크루엘로를 완벽하게 했다.

세뇌는 그 정성스러운 과정에서 얻은 부산물이었다.

하나 부산물이라 한들 그 견고함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제대로 세뇌를 풀기 위해선 족히 몇 년의 시간이 필요했고 그 때문에 크루엘로가 신전에도 갈 수 없도록 단단히 단속했다.

그러니 그 구속이 풀렸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는데.

‘이제는 인정해야 하는가.’

크루엘로의 최근 행보가 그토록 이상했으니.

도대체 뭐가 문제였는지, 마법사로서 호기심이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하나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했다.

‘세뇌가 풀렸다 한들 상관없다.’

그는 제 수염을 느리게 쓰다듬으며 어조를 차분하게 바꾸었다.

“정 그러길 바란다면 알겠소.”

“대원로님.”

“가주께서 여태 이 늙은이들의 말을 참 잘 따라 주었지. 그러니 이번엔 가주의 안목을 믿겠소.”

크루엘로는 빤히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대원로님.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가 보시오.”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대원로가 차갑게 바라보았다.

세뇌가 깨졌다면, 다시 하면 된다.

충격을 줘서 마음에 새 균열을 만드는 게 무어 어렵겠는가.

가슴에 품은 이가 있다면 더더욱 그렇겠지.

“9원로에게 일거리를 줘야겠구나.”

수확제의 일을 만회할 마지막 기회를.

하기야 실패하기도 힘들 터였다.

노인은 찬 숨을 내뱉으며 달력을 확인했다.

기일은 약혼식 날이 좋겠다.

***

한동안 나는 열의 넘치는 학자처럼 살았다.

저택, 황궁 도서관, 저택, 수도 대신전 도서관.

잠자는 시간을 빼곤 고대 신학 도서만 읽어 댄 것 같다.

전번의 일이 찜찜하기도 했고, 바깥에 알려진 페불라의 정보를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며 알게 된 건 다른 고대 신에 비해서도 우리 교단의 정보가 지나치게 적다는 거였다.

제물 사건 때문에 꺼림칙해서 언급을 피했을까, 나는 짧게 의심해 봤다.

“오늘은 소득이 좀 있어요?”

책 한 권을 들여다보는데 누가 귓가에 속삭였다.

이제는 놀라지도 않는다.

크루엘로다.

“그럴 리가요.”

나는 성의 없이 책을 덮었다.

이게 마지막이었다.

“신전 도서관에서도 마찬가지였다면서─.”

“쉿, 정숙하세요.”

나는 검지로 크루엘로의 입을 꾹 찍어 버렸다.

굳이 속 뒤집는 사실을 상기시킬 필요는 없다.

그가 눈을 가늘게 떴지만, 모르는 척 책을 옆에 넣어 두고 나는 도서관을 나왔다.

“스킨십은 살인까지만 허용한다면서 나한테 너무 허물없이 대하는 거 아니에요?”

“응? 살인은 최고 단계잖아요.”

“그래요? 그럼 똑같이 해 봐도─.”

“미안! 죄송합니다, 사과합니다.”

“……나랑 닿는 게 그렇게 싫어요?”

크루엘로가 눈꼬리를 시무룩하게 끌어내렸다.

갈수록 연기가 늘어.

싫다거나 징그러운 건 아니다.

인성이 그 모양인데도 빛나는 게 크루엘로의 외모 아닌가.

그보다는 뭐랄까, 간지러웠다.

이성과 그런 식으로 접촉해 본 적도 없었고 상대는 어릴 때부터 봐 온 크루엘로라 뭔가.

목적이 있는 접촉이지만 죄의식이 든단 말이야.

“그래서 오늘은 또 왜 왔어요.”

크루엘로는 굉장히 자주 나를 찾아왔다.

소문에 불 지르고 싶은 마음이 절반에 습격을 예방하려는 마음 절반일 것이다.

아니면 그조차 쇼일 수도 있고.

아직은 용케도 원로회가 조용했지만, 약혼식이 코앞이니 더 신경 쓰는 거겠지.

그러면서도 대답은 늘 ‘보고 싶어서요’였다.

오늘도.

“데이트 신청하러요.”

음?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크루엘로가 평범한 짓을 했다.

크루엘로가 나를 데려온 곳은 수도 외곽의 공원이었다.

잘 정돈되었지만, 돈이나 권력이랑은 안 어울리는 장소에서 우리 두 사람은 유독 눈에 띄었다.

그를 따라 평범하게 걸으면서 나는 크루엘로의 행동 원인을 파악하려 했다.

“혹시 여기서 누가 암살당한다고 하던가요?”

“아니요.”

“은밀한 집회가 벌어진다거나.”

“아니요.”

“여기 파묻어 놓은 사람이 살아 있나 보러 오셨어요?”

“달링.”

크루엘로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취향은 알겠는데 오늘은 제 취향을 따라 줘요.”

“네?”

“평화로운 시간을 즐기면 좋겠어요.”

욕을 먹으러 온 게 틀림없다.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커다란 분수대 앞이었다.

날개가 달린 하얀 말 조각상이 앞발을 들어 올렸고 그 뿔에서 솟아난 물줄기가 원형으로 퍼지며 수막을 만들었다.

“사랑의 신, 그란디에를 기리는 분수대래요.”

“아, 화신체가 백마였죠.”

“그란디에의 축복을 받은 연인은 영원토록 사랑하리라는 전설이 있대요. 정작 그 교단은 사라져 버렸는데 말이에요.”

이거 원, 고대 신을 관광명소 취급하네.

그란디에가 울겠다.

분수대에서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신의 눈물처럼 보인다.

나는 잠시 그 모습을 보다가 크루엘로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반대쪽 손에는 보랏빛이 반짝였다.

“크루엘로?”

“손을 줘야죠, 달링.”

“어…….”

나는 얼떨떨하게 손을 내밀었다.

크루엘로가 내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아몬드 모양의 다이아몬드가 보랏빛으로 반짝였다.

원래 이쯤에서 약혼반지를 받는다는 건 알았지만, 크루엘로가 담백하게 반지를 건넨 자체가 특이하게 느껴졌다.

“그러면 우리도 영원히 사랑하게 될까요?”

“……크루엘로, 혹시 바꿔치기 당했어요? 암호 말해 봐요.”

“우리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세작이다!

나는 크루엘로를 노려보며 두 걸음 물러섰다.

그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얼굴에 욕지거리를 뱉어 주려다가 문득 이질감을 느꼈다.

“……크루엘로.”

“알아요.”

그가 웃으며 내 팔을 끌어당겼다.

푸욱!

조금 전까지 내가 있던 자리에 화살이 꽂혀 들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슈우욱,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연달아 귀를 스쳤다.

화살이 비처럼 날아든다.

어디서 날아드는 건지 확인하려 해도, 감각을 확장하지 않은 채론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크루엘로는 나를 데리고도 가벼운 몸놀림으로 화살비를 다 피해 냈다.

살벌한 소리만 아니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여서 어이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왜 분수대 주위만 빙글빙글 도는 거예요. 여기 뭐 지켜야 할 거 있어요?”

“날 믿어요?”

갑자기?

“안 믿으면 할 수 없고.”

답도 듣지 않고 크루엘로가 손을 튕겼다.

하늘에 큰 우산을 씌워 놓은 것처럼 분수대의 물이 거대하게 부풀었다.

물로 시야를 가리려는 건가, 생각하는 순간.

“숨 참아요.”

내 허리를 끌어안은 크루엘로가 분수대 안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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