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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28화 (28/162)

28화

아무리 생각해도 돈만큼 깔끔한 게 없다.

알차게 챙긴 다음 원래 몸으로 돌아가기 전에 온갖 사치를 다 누려야지.

교단의 계좌만 있었으면 이런 구구절절한 조건 없이 신성한 성직자 행세를 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돈이 명예보다 무겁다.

크루엘로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달링은 욕심이 적은 건지 많은 건지 모르겠네요.”

“욕심 많아요. 아주, 엄청나게, 굉장히. 그러니까 돈 많이 준비해요.”

“분부대로.”

그가 가벼이 웃으며 꼰 다리를 풀었다.

그러면.

“우리 호칭 좀 바꿀까요?”

“거기서 더 늘린다고?”

“나 말고 달링이요.”

“개자……. 음.”

“개자식이라고 불러도 상관은 없어요. 독특하고 좋네요. 저번에 정한 대로 ‘로이’라고 불러도 좋고.”

정해 놓고 왜 한 번도 안 불러요?

떠보는 듯한 시선에 마른침이 넘어간다.

“어린아이 같아서? 그냥 이름으로 부를게요, 크루엘로. 음, 이름 좋다, 음.”

“뭐……. 좋아요. 그리고 약혼식까지 정기적으로 데이트를 하면 좋겠는데요.”

“그건 또 왜요.”

“소문이 더 제대로 났으면 해서?”

크루엘로가 나한테 반했다는 소문?

여태 난 걸로도 수도를 세 바퀴는 돌았을 텐데.

내가 질린 표정을 짓자 그는 웃으며 마차 창문에 몸을 기댔다.

“달링은 안 믿겠지만, 나는 꽤 착한 아이였어요.”

맞아. 어린 로이는 착했어.

“원로회한테도요. 날 세뇌했다고 생각하길래 그런 척해 줬죠. 그러면 내가 원하는 정보를 떠먹여 줄 줄 알았는데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더라고.”

“음.”

“이젠 움직여야죠.”

이걸 뭐라고 대답해야 한담.

세뇌를 풀어 준 게 나라서 무슨 말을 해도 수상할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호응할 말을 골랐다.

“위험해지진 않을까요?”

“자세한 얘기는 안 하겠지만, 내가 죽을 것 같은 상황엔 오히려 도와줄 거예요.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건 그렇지.

무려 수백 년간 공들여 만든 그릇인데 죽게 내버려 둘 리가.

“다시…… 세뇌하려고 하면 어떡해요?”

“아, 그것 때문에 데이트가 필요해요.”

이야기는 이상한 경로를 거쳐 원래의 주제로 되돌아왔다.

“세뇌하려면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아야 해요. 빈틈을 비집고 뇌를 장악하는 거라서.”

“그래서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난 충격받을 일이 없거든요. 가까이 지내는 사람도 없고.”

“그렇죠?”

“그러니 내가 달링에게 푹 빠진 척하면 달링이 내 약점이 되겠죠?”

“그러면 원로회가 절 죽이러 올 텐데요.”

“바로 그거예요.”

“나한테 원한 있어요?”

“달링은 안 죽을 거예요. 세니까.”

“듣자 듣자 하니 이 사람이!”

벌떡 일어나 화내려는데 타이밍 나쁘게도 마차가 멈췄다.

천장에 머리를 박을 뻔했다.

크루엘로가 손으로 이마를 막아 주지 않았다면 그랬겠지.

“죽지 않도록 나도 최선을 다할 거고.”

그는 웃으며 그대로 내 머리를 쓸어 넘겼다.

머리칼이 여러 갈래로 파헤쳐지며 그의 손가락이 두피에 닿았다.

목덜미의 솜털이 곤두서서 나는 그 손을 뿌리쳤다.

“그래서 뭘 얻을 수 있는데요?”

“하이에나들이 와 줄 거예요.”

처음에는 그저 그런 암살자.

후에는 숙련된 자객.

그걸로도 안 되면 결국 흑마법을 극한까지 익힌 원로들이.

“달링, 내 덫이 되어 줘요.”

크루엘로가 느리게 속삭였다.

나는 한껏 인상을 찡그렸다가 몸에 찬 숨을 다 뱉어 냈다.

그래, 괜찮은 생각이란 건 인정하니까.

“좋아요.”

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며 물었다.

“그런데 달링, 스킨십 어디까지 괜찮아요?”

“살인까지요.”

“……네?”

“제가 좀 과감한 편이긴 해요.”

“공작전하, 레이디 시오라. 보네티 백작저에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외침에 나는 주저 없이 마차 문을 열었다.

바깥으로 이제는 익숙해진 보네티 백작저가 보인다.

좀 쉬자.

성의 없이 고개만 까딱여 인사하고 내리려는데 크루엘로가 웬 서류를 내밀었다.

“선물 가져가요, 달링.”

난데없이 선물?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봉랍을 떼어 내고 안쪽을 들여다봤다.

허어?

“이게 뭐예요?”

“내 사랑을 위한 무기? 필요할 거예요.”

그가 내뱉는 말이 의미심장했다.

***

백작저로 돌아오자 나를 맞은 건 놀랍지 않게도 베티였다.

그녀가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백작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아가씨께서 귀가하시는 대로 집무실로 오라고 말씀하셨어요.”

보네티 백작이 보네티 백작저에 돌아왔다!

하도 조사를 오래 받아서 황궁에서 사는 줄 알았네.

이제는 얻어 낼 것 없는 백작이 귀찮았지만, 권력 피라미드의 밑바닥인 나는 별수 없이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 노크 두 번에 곧바로 답이 들렸다.

“들어오거라.”

오…….

기나긴 조사가 힘겨웠는지 백작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낯이 핼쑥하고 볼이 푹 꺼져 인상이 한층 강퍅해졌다.

잠깐 놀랐으나 안타깝지는 않았다.

그러게 누가 베아티투도 같은 걸 밀수입하랬나.

“고생하셨습니다, 잘 다녀오셨나요?”

까칠한 속마음과 다르게 나는 공손히 인사했다.

인생이란.

백작은 한동안 나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지루한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카펫에 그려진 고양이의 수를 세었다.

애초에 백작은 왜 나를 부른 걸까.

역시 그럴싸한 이유는 하나뿐이다.

가보트의 정령 소환을 도왔다고 나를 칭찬하려는…….

“공작과 사이가 꽤 괜찮아졌다지.”

아니었군.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 같으니.

조사 중에도 용케 그 소문은 주워들었나 보다.

“나쁘진 않아요.”

“다른 사람도 아닌 그 공작이니만큼 다 믿을 순 없겠지. 그 꿍꿍이속을 들여다봐야 알겠지만…….”

크라바트가 답답한지 백작이 제 옷깃을 당겨 느슨하게 했다.

“싫증을 잘 내진 않았으니 당분간은 장단 맞춰 주겠지.”

“음, 네.”

“봐라.”

백작이 툭, 제 책상에 서류 하나를 내던졌다.

정말 예의범절이 넘쳐흐르는 아버지야.

나는 고분고분히 그 내용을 살폈다.

올라르 지역의 마정석 광산 채굴 어쩌고저쩌고.

이게 뭔데. 어쩌라고?

“채굴권을 따낼 확률이 가장 높은 건 화이트데저트 공작이지.”

“그렇군요.”

“빠지라고 해. 보네티에 넘어오도록 손을 써 달라고.”

이게 뭔 소리야.

그러니까 백작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크루엘로가 다 들어주겠거니 생각하는 건가?

아직 약혼도 안 한 지금?

황당해하는 내 기색을 눈치챘는지 백작이 말했다.

“공작의 약혼은 열 번째지만, 그만큼 붙어 다닌 건 너뿐이다. 사랑놀이라도 하고 싶어진 모양인가 본데 써먹어 줘야지.”

“…….”

“자각이 덜 되어 있는 건 이해한다만 너도 보네티다, 시오라.”

자각 잘했는데.

이제 어딜 가도 내 본명보다 ‘시오라 보네티’가 더 자연스럽게 튀어나온다.

“많은 걸 누리겠지만 그만큼 의무도 무겁지. 무작정 될 거라고 믿는 건 아니니 운이라도 떼어 봐라.”

“음…….”

“혹시 공작의 약점이나 특이한 정보를 알게 되면 바로바로 보고하고.”

“그러니까…… 저한테 세작 노릇이라도 하라는 거예요?”

“세작?”

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네게 그런 거창한 걸 기대하지는 않는다. 운이 좋아 얻어걸리는 몇 가지만 들고 오란 소리야.”

그게 그 말이지. 누굴 바보로 아나.

나는 마차에서 들었던 크루엘로의 말을 떠올랐다.

“내 사랑을 위한 무기? 필요할 거예요.”

누가 보면, 미래는 내가 아니라 크루엘로가 알고 있는 줄 알겠다.

나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들은 소문을 잘 안 믿어서 걱정이라는데 보네티 백작은 너무 믿어서 문제다.

“안 해요.”

“……뭐?”

“입김 불어넣는 것도, 정보 캐 오는 것도 다.”

에휴.

“제 역할은 혼담을 대신하는 거에서 끝났잖아요. 의무는 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오라.”

“하실 말씀이 그것뿐이라면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더는 들어 줄 가치도 없다.

나는 뒤돌아 문을 향해 걸어갔다.

막 문고리를 붙잡는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입적은 언제든 되돌릴 수 있다.”

보네티 백작을 돌아보았다.

그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같잖은 저항을 괄시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사사로운 불명예를 감수해야겠지만, 너한테 흠을 만들면 파양은 문제 되지도 않아.”

원로회랑 똑같은 논리네. 하여간 악당들이란.

“공작이 네게 사랑에 빠진 척해도 네가 보네티가 아니게 되면 다를 거다. 순식간에 버려지겠지.”

글쎄.

이쯤 되면 크루엘로에게 있어 내 가치가 보네티보다는 올라갔을 것이다.

하나 순조로워지는 흐름에서 굳이 성가신 일을 늘리고 싶진 않다.

나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삐딱하게 기댔다.

팔짱을 낀 채 머릿속을 뒤적여 아까 읽었던 글자 몇 개를 입 밖으로 꺼냈다.

“상단 그라디언트 강제 인수, 상단주 및 협박, 상단주의 일가족 납치, 반발하는 간부진 여섯 명 살해 후 방화.”

백작의 표정이 서서히 변해 갔다.

경악으로 커지는 눈이 꽤 볼만했다.

“상단 허밍던, 울프피쉬도 같은 방식으로 인수. 조사관 및 법관에게 뇌물로 골드 3천─.”

“입 닥쳐!”

마침 읽어 둔 것도 여기까지였다.

“문제 생길까 봐 작지만 유망한 상단 위주로 공략하셨나 봐요.”

“너, 네가 어떻게 그걸…….”

“필요할 거라면서 누가 알려 주더라고요.”

아까 크루엘로가 준 서류는 보네티 백작이 저지른 비리 목록이었다.

제일 위쪽 부분만 읽었지만, 볼륨이 꽤나 두툼했지.

“하! 무기도 힘이 있는 사람들이나 쓰는 거다. 네까짓 게 날 협박하려는 거냐!”

“협박당한 마당에 못 할 거 있나요.”

“시오라!”

백작이 언성을 높였다.

내내 차분하더니 당황한 티를 숨기지 못하는군.

원래 먼저 소리치는 놈이 지는 거다.

고로 내가 이겼다.

“백작님, 아니 아버지.”

나는 주저 없이 문고리를 돌렸다.

“정의롭게 사세요, 그러다 벌 받아요.”

집무실을 나와서 쾅.

그러자마자 백작이 있는 힘껏 내 이름을 소리쳤다.

음, 패자의 비명이다.

하지만 나도 마냥 개운치는 않았다.

진짜 그 많은 게 다 백작의 죄야?

내가 저 사람을 내버려 둬야 해? 그게 맞아?

중요도를 따지면 개인의 일탈보다는 세계의 존망이 위겠지만, 방관이 썩 즐겁지는 않았다.

에휴, 한숨을 내쉬었다가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미뉴엣.”

초록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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