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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27화 (27/162)
  • 27화

    내 핑계를 댔으면 인간적으로 나한테 언질은 줘야 하는 거 아냐?

    크루엘로는 진짜 상도덕도 없어.

    표정 관리를 해야 했지만 절로 눈가가 일그러졌다.

    “연인이라도 공작이 골머리를 썩이긴 마찬가지인가 봐.”

    “……예, 그렇지요.”

    연인이란 말을 부정하고 싶다. 거부하고 싶다. 화내고 싶다.

    하지만 참아야 하느니.

    황태자가 설핏 웃었다.

    “공로금은 백작저로 보내겠네.”

    “감사합니다, 황태자전하!”

    “얼굴빛이 정말 좋아졌군. 혹 추가로 더 바라는 게 있나? 소소한 정도는 내 권한으로 해결해 줄 수 있겠는데.”

    안 그래도 되는데, 진짜 괜찮은데.

    떠먹여 주듯 흐르는 상황을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나는 반쯤 체념하여 말했다.

    “그렇다면 황궁 도서관에 입관 허가를 부탁드립니다.”

    황태자의 시종이 나를 도서관으로 안내했다.

    내가 바란 일임에도 썩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그래도 공로금을 떠올리면 표정을 관리할 수 있었다.

    돈이나 열심히 모으자!

    힘차게 주먹을 쥔 순간, 시종이 걸음을 멈추었다.

    “이리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출입패를 드릴 테니 경비병에게 보여 주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시종은 공손하게 인사하고 뒤돌아 사라졌다.

    나는 경비원에게 출입패를 보여 준 뒤 안으로 들어섰다.

    사서가 몇 보여 말을 붙였다.

    “죄송합니다, 신학관을 담당하시는 사서님은 잠깐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그러면 고대 신학 도서가 어느 쪽에 있는지만 알려 주세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책장은 크고 두껍고 넓었다.

    보네티의 서재에 비할 바 없이 관련 서적이 많았으며, 그 수준도 높아 보였다.

    단편적으로 제목만 봐도 이쪽은 거의 신어로 적혀 있었으니.

    내게 그리 즐거운 소식은 아니었다.

    “〈고대 신, 500년〉 13편이라고 했지?”

    나는 책장에서 레카논의 신관에게 들은 제목을 찾았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읏차.”

    책은 몹시 두꺼웠는데 목차는 세 개뿐이다.

    개중 아는 이름은 가운데에 있는 하나.

    정의의 이름, 레카논.

    나는 그 파트를 펼쳐 훑어봤다.

    「3─2 성자, 모르모로의 희생.」

    내용은 인형극으로 본 것과 같았다.

    페불라의 성자가 신의 격을 올리기 위해 제물을 바쳤고 레카논 교단과 싸웠다.

    그 과정에서 모르모로가 죽었다는 것까지.

    이러한 일련의 흐름이 정제된 언어로 적혀 있었다.

    「이는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편찬한 야사이다. 그러나 신빙성이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하략)」

    “……신빙성이 없다고 해 줘.”

    활자로 읽으니 한층 더 기분이 찜찜하다.

    단연코 처음 듣는 이야기였고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이 이야기가 거짓일 수도 있고, 반대로 내 선조들이 치욕적인 역사를 은폐한 걸 수도 있다.

    “책 한 권만 보고 뭘 판단하겠냐만.”

    나는 한숨을 쉬며 남은 페이지를 주르륵 훑어보았다.

    그 외에 페불라에 대한 이야기는 없는 것 같은데…….

    그때, 책장 사이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어라.”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낡은 종이였다.

    뭘 끼워 놓은 거지?

    내용물을 들여다보자.

    「호르메이아의 어느 예언.

    그자는 여인이었고 사내였고 노인이었고 어린아이였으며 천사였고 악마였고 인간이었으며 괴물이었다.

    그자는 모든 이의 모습으로 다가와 가장 어두운 죄를 흩뿌렸다.

    수많은 빛이 그를 차마 단죄하지 못함은 그자의 등에 올라탄 거대한 빛에 뒤덮임이다.

    예언자 호르메이아가 가로되, 장차 인류는 900년의 평안을 얻을 것이며 그간에 죄악은 그림자 속에서만 옷자락을 스칠 것이다.

    제자 텔가가 스승에게 물었다.

    그러면 900년 후에는 어찌 되겠나이까.

    호르메이아는 답했다.

    그때는…….」

    “그때는 광명한 빛이 세상을 어루만질지어다.”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놀라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건 제가 끼워 놓은 사료예요. 그즈음에 있던 예언이라고 하더라고요. 학자들은 가치가 없다고 단언했지만, 야사 한 귀퉁이에 있으니 제법 그럴싸하죠?”

    “아, 네?”

    “인사부터 드려야겠네요. 안녕하세요, 시오라 보네티 님.”

    선량하게 웃는 얼굴의 사내가 내게 알은체했다.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안경.

    눈이 붉은 것만 제외하면 누가 봐도 학자를 떠올릴 법한 외관이었다.

    그와 눈을 마주치며 나는 기묘한 인상을 받았다.

    어딘가 친근하면서도 꺼림칙한, 모순적인 기분이…… 잠깐만, 진짜로 어디서 봤는데?

    잠시 고민하자 곧 기억이 떠올랐다.

    연갈색 머리칼에 붉은 눈!

    “신전 앞 인질?”

    “맞습니다, 기억해 주셨군요.”

    그가 수줍게 웃었다.

    폭도의 우두머리에게 붙들렸던 그 사람이었다.

    당시엔 제대로 얼굴을 볼 여유가 없어 알아차리는 게 늦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스쳐 지나간 사람 하나에 이런 기분이 든다고?

    내가 미심쩍게 사서를 바라보는 사이, 그는 웃으며 제대로 인사했다.

    “저번엔 감사했습니다, 에덴 화이트데저트라고 합니다. 신학관의 사서로 일하고 있어요.”

    “시오라 보네티……. 아.”

    두 번째 깨달음이 찾아왔다.

    “이 초상화는 누구야, 로이?”

    “아. 그건 에덴이야, 에이미. 나한텐 형 같은 사람이야. 되게 잘해 주거든.”

    한때의 대화가 잔상처럼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 에덴이로군.

    어렸던 크루엘로가 유일하게 따르던 사람이었지, 아마.

    자라며 사이가 멀어졌는지 언급이 적어졌던가?

    제대로 된 원인을 찾자 머릿속이 개운해졌다.

    별개로 눈앞의 남자는 한층 불편해졌다.

    왜냐하면 이 사람.

    “잘생겼네. 로이의 친척?”

    “아니, 에덴의 아버지가 대원로님이야.”

    원로회 수장의 외자였으니까.

    그때의 인질이 하필이면 대원로의 아들이었다?

    경계를 안 하는 쪽이 멍청이지.

    수상하다, 수상해. 하필이면 신학 도서의 사서로 있는 것도 굉장히 수상하다.

    “크루엘로가 제 이야길 전혀 하지 않았나 보군요.”

    내 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에덴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런 와중에도 안타까울 만큼 처연했다.

    “못 들어 보긴 했어요.”

    그러나 이 정도 미인계에 넘어가기엔, 내가 크루엘로를 봐 온 세월이 길다.

    이 남자도 그래, 어릴 때야 순수했겠지.

    하지만 다 커서도 그렇겠어? 분명 제 아버지의 사악함에 물들어…….

    “그럴 수밖에요. 그 애윽, 콜록!”

    “저기요……?”

    에덴의 입에서 폭포처럼 붉은색이 흘렀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갑자기 각혈이라고?

    뜬금없는 것도 정도껏이지, 이 만큼이나 맥락이 없으면 날 속이려고 가짜 피를 준비해 온…….

    “……걸 리가 없지! 괜찮으세요, 저기요?”

    크루엘로랑 오래 어울리다 보니 주인공 병이 옮았나.

    당황해서 나는 품을 뒤적거렸다.

    여전히 손수건은 없다.

    그런 섬세한 습관, 쉽게 생기지 않는답니다.

    그 와중에도 에덴은 힘차게 병약함을 뽐냈다.

    “아, 콜록, 괜찮, 습니다. 제가 몸이 좀 안 좋아서.”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요. 저기요, 이봐요?”

    “정말로 괜차……. 아.”

    “에, 에덴 님!”

    우와, 쓰러졌어.

    다행히 소리를 듣고 달려온 사서가 그의 몸을 받쳐 줬지만, 그는 의식을 잃은 뒤였다.

    사서들이 긴급히 조치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멍하니 고개를 숙였다.

    내 손에는 피가 튀어 있었다.

    바쁜 사람들을 앞에 두고 그걸 내려다보고 있으니 뭘까, 뭐랄까.

    왜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을까?

    ***

    미묘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도서관을 나왔다.

    점심이 가까운 때라 도서관 입구에는 제법 사람이 많아졌다.

    개중 몇이 나를 발견하고 알아본 듯 눈을 빛냈다.

    하이에나 대량 출몰!

    하여튼 그놈의 소문 때문에 귀찮은 일이 늘었다.

    아무도 다가오지 않으면 좋겠지만 벌써 근방에 사람들이 가득 모였고…….

    “혹시 보네티─.”

    “안녕, 스윗하트.”

    내 바람이 이루어졌다.

    언제 온 건지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온 크루엘로가 산뜻하게 웃었다.

    “데리러 왔어요.”

    이번엔 진짜 이 얼굴이 반갑네.

    화이트데저트의 마차 안.

    예의니 품위니 하는 걸 다 벗어던지고 나는 등받이에 편하게 기댔다.

    아, 좋다.

    “확인은 잘 했나요.”

    “…….”

    “달링은 표정으로 대답하는 재주가 있네요.”

    그래, 확인했다.

    내 신이 악신이라는 장황한 욕설을 직접.

    나는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겨우 한 권만 보고 믿을 순 없어요.”

    “믿을 필요 없잖아요.”

    “네?”

    “자기는 그 신한테서 막대한 성력을 선물 받았고. 그러면 그 교단이 지향하는 가치관과 상당히 일치한다는 말 아닌가요?”

    페불라의 이상적인 신도가 바로 나?

    맞는 말이네.

    “달링이 그게 부도덕한 일이라고 판단했다면 그 선조들도 똑같이 생각했겠죠.”

    “오.”

    “더군다나 역사란 승자가 기록하는 거잖아요. 레카논이 보는 페불라가 그랬을 뿐이에요.”

    “웬일로 논리적이네요.”

    “언제나 그렇듯 논리적이지요.”

    “왜 이렇게 말을 예쁘게 해 줘요?”

    “지금은 예쁨받아야 해서요.”

    크루엘로가 샐쭉 웃었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을 보다가 나는 문득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맞다, 신학관의 사서분이 화이트데저트던데?”

    “에덴이요.”

    “네. 신전에서 인질로 잡혔던 분도 그분이더라고요.”

    “알아요.”

    “조금 전에 각혈하고 쓰러지셨거든요?”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 신경 쓸 거 없어요.”

    그는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에덴을 상당히 따랐던 것 같은데─난 거의 말로만 들었지만─ 아는 게 많아져서 그런가.

    기분이 이상했으나, 마냥 믿고 있는 것보단 낫다.

    “재미없는 이야긴 관두고.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드린 것 같지 않나요?”

    “재촉하는 사람, 매력 없어요.”

    “그러면 곤란한데.”

    그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하고는, 검지로 턱을 두드렸다.

    뭐, 페불라 악신설에 놀라 미뤄 뒀을 뿐 답이 나와 있는 제안이기는 했다.

    크루엘로가 요구한 건 내가 해야 하는 일과 정확히 같았으니까.

    이렇게까지 떠먹여 주는 게 수상했지만, 그게 불구덩이라도 뛰어들어야 할 판이다.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일단 페불라가 부흥할 필요는 없어요.”

    크루엘로가 움직임을 멈췄다.

    크게 티 내지는 않았으나 미묘하게 커진 눈이 그의 당혹감을 드러냈다.

    “제물 이야기가 신경 쓰여서요?”

    “아니요.”

    그 문제에 확실한 건 없다.

    레카논이 왜곡해서 기록한 건지, 아니면 진짜 그런 미친 성자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면 다른 걸 기준 삼아야겠지.

    레카논이 퇴락한 걸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고대 신이 잊히기 시작하면서 우리 교단은 숨어들었다.

    격을 지키기 위해서든, 우리를 악신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을 피해 도망친 거든.

    이유야 뭐가 됐든 사람들을 저버렸다.

    그렇게 지켜 낸 힘으로 권력자와 거래하여 인위적인 영광을 손에 넣어라?

    와 닿지 않는다.

    직설적으로 말해 비겁하고 부자연스럽다.

    이게 올바른 선택이란 확신은 없었지만, 크루엘로의 말대로라면 내 선택이 옳겠지.

    “그냥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려고요.”

    “내버려 두면 사장될 텐데요. 신격을 유지할 만한 다른 수단이라도 있나요?”

    “음, 있지만 없어요. 어차피 제가 죽으면 의미 없게 될 테니까.”

    받아들여야지.

    태어난 사람이 죽는 것처럼, 모든 이야기에 결말이 있는 것처럼.

    크루엘로는 이해할 수 없는지 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속눈썹 밑 그림자가 평소보다 짙게 느껴졌다.

    “레카논과는 다르네요.”

    “다를 수밖에요.”

    그쪽은 규율과 절제의 신.

    배우고 실천해야 의미 있는 가치관이니 적극성 면에선 남다르다.

    “그러면 내 제안도 거절?”

    “받아들일게요.”

    “네?”

    “대가도 생각해 봤는데요, 역시.”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돈으로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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