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마리오네트-26화 (26/162)
  • 26화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거기, 여자! 당장 움직이지 않고 뭐 해!”

    “아, 넵! 쥐가 나서. 얼른 가겠습니다.”

    나는 다시 걸었다.

    그러나 조금 전과 달리 머릿속에서 희망찬 가설이 피어나고 있었다.

    원래 성물의 기적이 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단 말은…… 무슨 일이 생겨도 기적인 척할 수 있다는 거네?

    나는 가까워지는 괴한들을 바라보았다.

    세 발자국 남았다.

    가까워지자 그들에게서 희미한 흑마법의 냄새가 났다.

    역시 레카논의 신도도 아닌 모양이니 좋아.

    두 발자국, 한 발자국, 그리고 정지.

    “이제 드리면 될까요?”

    “어서 내놔!”

    대장이 품에 끼고 있던 인질을 팽개치고 성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나는 아낌없이 성력을 끌어모았다.

    주문을 쓸 필요도 없다.

    발산!

    “아아아악!”

    그야말로 쩌렁쩌렁한 비명에 가슴이 호쾌해졌다.

    이 자리에 태양이 뜬 것처럼 환한 빛이 터졌다.

    일반인들도 일시적으로 앞이 안 보일 밝기인데 흑마법사들에겐 훨씬 더하겠지.

    막대한 성력이 뒤쪽에도 영향을 줘서 게이트가 일그러졌다.

    레카논의 신도가 레카논의 성물에 당할 리 없으니 누명도 벗길 수 있고.

    “이, 이게 어떻게 된……!”

    “지금이 기회입니다, 폭도들을 잡으세요!”

    “오오, 신이시여!”

    넋을 놓았던 사제와 성기사들이 괴한에게 달려든다.

    이미 속수무책이 된 상황이라 덥석덥석 잘도 잡힌다.

    으하하, 속이 너무 시원해서─.

    “쿨럭!”

    피를 토했다.

    “시, 신도님!”

    엥?

    품에 꼭 끌어안고 있던 성물 위로 붉은 액체가 미끄러져 흘렀다.

    왜죠? 전혀 무리하지 않았는데?

    갑작스러운 각혈에 의아해하는 차, 그 원인이 뒤늦게 제 존재감을 과시했다.

    근원지는 새하얀 머리의 나귀.

    그 안에서 느껴지는 건 전혀 다른 형질의 성력.

    그리고 분노.

    알아차리자 화가 나기보단 웃음이 난다.

    “아, 그래. 아직 소멸 안 했다 이거지.”

    다른 신의 성력을 제 성물에 집어넣었다고 레카논이 단단히 화가 났나 보다.

    그게 반가웠다.

    기분과는 별개로 무릎이 풀썩 꺾이고 시야가 흐려졌지만.

    누군가가 나를 받쳐 줬다.

    “괘, 괜찮으십니까?”

    뿌옇게 거대한 연갈색과 붉은 점이 보인다.

    그게 대장에게 잡혀 있던 인질이라는 건,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시야가 까맣게 꺼졌다.

    ***

    시오라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의식을 잃은 게 벌써 두 번째다.

    나는 낯선 천장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여긴 어디지?

    나는 아직 시오라인 것 같긴 한데.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정신이 드시나요?”

    마믹이었다.

    그녀는 벽을 책상 삼아 종이에 뭘 쓰고 있었다.

    음.

    “……그거 뭐예요?”

    “보고서예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리해 달라고 하셔서요.”

    “아하. 저 한 며칠 누워 있었나요?”

    “그럴 리가요, 딱 세 시간이에요. 여기는 의무실인데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정신이 드시길 기다리고 있었어요.”

    마믹이 웃었다.

    그 모습에서 묘하게 초조함이 묻어났다.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드려야겠네요. 덕분에 레카논이 누명을 벗었거든요.”

    “제가 아니라 성물이 했는데요, 뭘.”

    “그렇더라도 제 품에선 아무런 기능도 못 했으니까요. 저, 그래서 말인데…….”

    나는 가만히 눈을 돌려 방 안을 살폈다.

    환자를 눕히는 침대가 여럿 보였으나 사람은 마믹뿐이다.

    좋네.

    “어떻게 성물을 사용하셨는지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그래도 제가 명색이 그 후손인데 다루지 못하는 게 부끄─.”

    “그 자리 빼앗길까 봐 무서워요?”

    “네?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야.”

    마믹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내 과감한 호칭을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얼굴 가득 물음표가 떠올랐다.

    “지, 금 ‘야’라고 하셨……?”

    “너, 레카논의 신도 아니지?”

    “네? 아니요, 맞는데요!”

    “아까 성물이 말해 줬어.”

    물론 거짓말이다.

    선의의, 새하얀, 백옥 같은 거짓말.

    “그, 그럴 리가? 하하, 무슨 말씀을, 하하, 방금 깨어나셔서 그런지, 꿈이랑 착각하신 모양이네요. 성물, 이 어떻게 말을 해요?”

    “하더라고, 내 품에선.”

    마믹의 얼굴이 각양각색의 감정으로 물들었다.

    당혹감, 불신과 불안감.

    그 얼굴을 보며 나는 입 안으로 주문을 외었다.

    ─2주문. 판별discern.

    일반인, 개중에서도 감정적으로 동요한 이에게 더 잘 먹히는 진실 판별 주문이었다.

    신도들끼리는 솔직해지는 주문이라고 불렀다.

    “신관님들은 내 말 믿을걸.”

    마믹이 확 굳었다.

    돌처럼 딱딱하게. 그리고 곧 억누르고 있던 분노와 초조함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래서 뭐. 어쩌려고. 나를 고발이라도 하게?”

    되게 잘 먹히네.

    “오, 반말.”

    “왜! 너는 반말 쓰는데 나는 못 써? 나보다 열 살은 어린 게!”

    “누가 뭐래. 근데 너 몇 살인데?”

    “……31.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중요한 건 레카논이니까.”

    “아아악! 레카논, 레카논, 그놈의 레카논! 지긋지긋해 죽겠어!”

    마믹이 들고 있던 보고서를 벽면에 내팽개쳤다.

    나는 그걸 슬쩍 주워다가 다시 한번 살폈다.

    “고대 신이란 게 대체 뭐야! 만물에 신이 있다고 생각하면 모든 게 신이 된다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음, 음.”

    “그러면 만물이 다 신인데 나는 뭐야. 나는 왜 이런데.”

    “성녀라며.”

    “개뿔!”

    마믹이 비명을 지르며 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나는 잠깐 문 쪽에 감각을 집중했다.

    돌연 그녀가 내 쪽으로 몸을 확 돌렸다.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응? 나도 뭔지도 모를 신의 후손인 척하기 싫었어, 그런데 어떡해.”

    마믹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양팔을 펼쳐 보였다.

    단순히 마른 걸 넘어서 느껴지는 생기가 터무니없이 약하다.

    “나도 먹고는 살아야지! 이런 몸으로 뭘 해 먹고 살아?”

    자조하듯 킬킬거리며 웃다가, 이번에는 또 침대 옆에 주저앉았다.

    그녀가 내 손을 붙잡고 애원했다.

    “나 봐줘, 한 번만 봐주라. 응? 내가 이렇게 빌게. 뭐 필요한 거 있어? 도와줄까? 궁금한 건 없어?”

    “그러면 그 성물은 어떻게 얻게 된 거야.”

    “지금 그딴 게 뭐가 중요해!”

    “아, 고발하러 가야겠다.”

    “아, 말할게! 말한다고!”

    그녀는 생각에 잠긴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로 굴리며 끙끙댔다.

    “무슨 꿍꿍인지 몰라도…….”

    “아아냐! 그냥 기억이 잘 안 나서 그래. 성물 옆에 기록이 있었는데.”

    “되는 대로 말해 봐.”

    “일단 내 선조도 무슨 교단의 신도였대. 싸웠다고 했나? 전리품으로 레카논의 성물을 남긴다고 했어.”

    “……그 교단이 어딘데?”

    “뭐였지. P나 F로 시작했는데…….”

    나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물었다.

    “페불라?”

    “맞아, 그런 이름이었는데! 어떻게 알았어?”

    “성물이 가르쳐 줬어.”

    “거짓말! ……진짜?”

    그녀는 긴가민가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 모양새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혹시나 했지.

    마믹이 쓰던 보고서의 필체가 너무 독특했다.

    그리고 그 특이한 필체를 나는 본 적이 있었다.

    「이것은 바깥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고대 신 페불라시여, 부디 기적을 일으켜 주소서.」

    〈운명〉의 마지막 장에 덧붙여진 글.

    그 책을 써서 페불라에게 제물로 바쳤던 사람이 마믹이었다.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으나 확실했다.

    “에휴.”

    〈운명〉을 쓴 게 누군지는 한 번쯤 알아보고 싶었다.

    페불라 신전을 고립시킬 때 있던 신관과 신도들을 다 가둔 걸로 알고 있는데 바깥에서 누군가 제물을 바친 게 신기해서.

    사명감을 가지고 세계 멸망을 막으려는 기특한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서.

    그런데.

    “그게 마믹이라니.”

    “뭐야, 무슨 의미야?”

    내가 밖에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게 사기꾼 때문이라니!

    김이 새고 사명감이 줄어들었다.

    물론 나도 필요할 때는 사기를 쳤지만, 내 경우는 선의에서 나온 거니 다르다.

    아무튼 다르다.

    별개로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왜 페불라의 신도에게 레카논의 성물이 있었던 건지.

    악신설 때문에 엄청 신경 쓰인다.

    하지만 일단은 지금 상황을 정리할 때였다.

    “그래서 기어이 날 고발하겠다고? 응?”

    “안 해.”

    “……정말?”

    아무렴.

    믿음이 1g도 없긴 해도 같은 식구를 팔아넘길 리가 있나.

    그만한 득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물론 대가는 받을 것이다.

    “그 대신.”

    “응?”

    “그 기록 최대한 빨리 찾아서 나한테 가져다줄 것.”

    “그거면 돼……?”

    “그리고 나중에 필요하면 날 도와줄 것. 그럼 입 다물어 줄게.”

    마믹은 눈을 깜박이다가 곧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이 너무나도 어린아이 같았다.

    ***

    결론만 말해 레카논의 누명은 완전히 벗겨졌다.

    마개에 독을 바른 범인이 외부의 사주를 받고 교단에 잠입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그 사람을 심문할 수는 없었는데 왜냐하면.

    “독사했습니다. 온몸에 가시에 찔린 자국 같은 게 있는데, 식물 계열 마법으로 추정 중입니다.”

    시체로 발견됐으니까.

    이쯤 되니 레카논에는 동정 여론이 생겼고, 성물이 일으킨 기적에 대한 소문도 퍼졌다.

    신전은 마땅찮아 보였지만 알 반가.

    레카논 교단으로부터는 감사 인사를 잔뜩 들었고, 연극의 스크립트를 짠 신관도 만날 수 있었다.

    창작 소설이라고 말해 주길 바랐는데.

    “예, 인형극에 나온 악신은 페불라가 맞습니다.”

    “우연히 황궁 도서관에 들어갈 일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읽었습니다.”

    “레카논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귀족님께서도 한번 읽어 보시는 게 어떨지.”

    ……안 만나는 게 좋았을지도.

    신앙적으로는 우울해졌지만, 얻은 게 아예 없지는 않았다.

    사건 해결에 큰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나는 황태자에게 불려 왔다.

    다름 아닌 공로금을 받으러!

    “고생 많았네. 신전 문제를 해결한 게 제국의 귀족이라 어찌나 다행인지.”

    백금발의 숏컷.

    키가 크진 않아도 단단한 체격의 여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제국의 황태자였다.

    “신수 문제로 신전에서 항의가 대단했는데 덕분에 말이 사그라졌어.”

    나는 공손히 고개를 수그리고 마음과 다른 말을 꺼냈다.

    “성물이 제 손에서 빛을 발한 건 우연이었지만, 도움이 됐다니 기쁠 따름입니다.”

    “신수 건이 뭔지는 물어보지 않는군.”

    “제가 알아도 될 일이었다면 진작 제 귀에 들어왔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공작이 말해 준 게 아니고?”

    얕은 유도신문이군, 속을 줄 알아?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깜박였다.

    황태자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입도 맞추지 않았나? 공작이 신수를 보호하면서 자네 핑계를 댔는데 말이야.”

    “예? 무어라고…….”

    “제 예비 약혼자가 마음이 너무 여려 신수를 지켜 달라고 했다던데.”

    크루엘로오오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