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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25화 (25/162)

25화

“두 분께서는 루카스 경과 함께 가 주십시오.”

로 블루는 크루엘로의 무력을 빌리고 싶은 듯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강하긴 하니까 없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나 보다.

진짜로 나을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이 급박해서 우리는 서둘러 복도로 향했다.

루카스가 안내하는 대로 뛰어가면서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레카논은 진짜 뭐지?

독극물 사건은 원로회에서 조작한 거잖아.

그러면 이 폭동도 거기 수작질?

교단 사냥이라고 하기엔 일을 과하게 벌이는데.

달리 얻어 갈 거라도 있…….

삐약.

품에서 겨울 살쾡이가 작게 울었다.

그 불안한 울음소리를 듣고야 깨달았다.

얻어 갈 게 있다!

나는 루카스에게 소리쳐 물었다.

“신수 어느 쪽에 있어요?”

“예? 갑자기 그건…….”

내 물음에 덩달아 불길해졌는지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배관의 반대 방향입니다.”

“지키는 사람은요.”

“아마 80% 이상이 예배관 쪽으로 재배치됐을 겁니다.”

이거였구나.

레카논은 미끼다.

신수를 되찾아 가기 위해 이용했을 뿐!

머릿속에 수확제에서 봤던 모습이 펼쳐졌다.

액체에 잠겨 있던 신수들, 다 죽어 가던 모습, 베아티투도로 변한 겨울 살쾡이.

그리고 그때 흘러들어 왔던 감정까지도.

“안 돼.”

황급히 몸을 돌리려던 때, 부드러운 손길이 내 어깨를 붙들었다.

크루엘로였다.

“내가 갈게요.”

“네?”

“늦지 않을 거예요, 이번엔.”

그 목소리에 확신이 담겨 있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게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인데도 어쩐지 생소했다.

***

Mommick : 혼란을 일으키다.

마믹의 삶은 조부가 이름 지어 준 그대로 흘러갔다.

인생이 평온해진 줄 알았던 지금조차도.

“검 솜씨는 괜찮은데 정신력이 너무하네. 이런 간단한 수작질에 넘어가면 어떡해.”

로브를 쓴 괴인이 로 블루를 걷어찼다.

그 모습을 보며 마믹은 벌벌 떨었다.

좀 전의 광경이 눈앞에 선연했다.

난데없이 벌어진 전투, 갑자기 제 앞으로 날아든 마법, 그걸 막아 주다가 독에 당해 쓰러진 로.

“성…… 녀님, 도망치십시오.”

“하하, 성녀는 무슨.”

분명 세상 어디보다 안전해야 할 신전인데도 또다시 엉망진창이다.

그녀는 몸을 웅크린 채 질끈 눈을 감았다.

마믹은 한미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녀를 낳다가 죽었고, 아버지는 그보다 한 달 전 사고로 죽었다.

“부모를 다 잡아먹은 짐승 같으니!”

마믹을 길러 준 할아버지는 틈만 나면 그런 말을 했다.

그녀는 할아버지가 무섭고 싫었지만, 그런 조부마저 죽은 후에는 삶이 더 끔찍해졌다.

열다섯. 보육원에도 들어갈 수 없는 나이였다.

성장기 때 제대로 먹지 못해 몸도 부실하고 인상도 어두웠다.

돈벌이를 할 만큼 뭘 배우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살아야 해서, 그녀는 집 전체를 뒤져 팔 거리를 찾았다.

그러다가 발견했다.

새하얀 나귀 머리 조각상과 그 옆에 있는 서신을.

「이것은 레카논의 성물이다.」

서신에는 선조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선조의 교단과 레카논 교단이 싸웠고, 그 싸움에서 승리하여 전리품으로 성물을 얻었다.

교단의 영광을 상징하는 귀한 것이니 소중히 간직하라.

그 머리 아픈 이야기 속에서, 마믹이 알아들은 건 ‘레카논’ 한 단어였다.

고대 신의 교세는 다 허물어지고 약간의 유명세나마 남은 건 레카논뿐이었으니.

처음에는 그 성물을 팔아넘기려 했으나 곧 생각이 바뀌었다.

덜 자란 소녀에게 제값을 쳐 줄 어른은 없다.

대신에 마믹은 마을 공용 도서관을 찾아가 신학 도서를 다 뒤졌고, 신전을 찾아갔다.

“제 선조가 레카논의 마지막 성자예요. 그 이름값을 이용하시면 이단을 포용하실 수 있을 거예요.”

마믹은 레카논 교단의 후손이 아니다.

그러나 레카논의 행세를 해야 제값이 더 올라간다는 걸 알았다.

그리하여 이단 통합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신전에서 명예 성녀로 임명받았고 호의호식할 수 있었다.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왜 이렇게 된 거야.’

레카논의 폭도가 쳐들어왔다면 가짜인 저를 내버려 둘 리 없다.

그래서 그녀는 성물을 내놓고 예배관의 반대쪽으로 대피했다.

그런데 왜!

어째서 신수들은 잠들어 있고 신전의 외벽은 뚫려 있단 말인가.

로 블루도 이겨 내지 못하는 괴한과 마주쳐야 한단 말인가.

“살, 살려 주세요.”

마믹이 애써 애원했으나 비웃음을 살 뿐이었다.

“감사해요, 성녀님. 덕분에 성녀를 잡으러 온 폭도가 신전 외벽에 구멍을 뚫었다고 둘러댈 수 있겠어요. 신수들도 그리로 도망친 줄 알겠지.”

괴한의 발치에서 거대한 줄기가 꿈틀거리며 올라왔다.

가시가 빽빽이 달린 자줏빛 덩굴.

그 끝에서 피어난 장미가 주둥이를 벌리듯 가운데 꽃잎들을 열었다.

가운데에서 짙은 독액이 뚝뚝 떨어졌다.

로 블루를 중독시킨 진액.

“그럼 안녕히 가세요, 성녀님.”

넝쿨이 그녀의 목을 향해 휘감아 들어왔다.

마믹은 절망하며 눈을 감았다.

그 순간.

파삭,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겨우 하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라니 너무 시시한데.

크루엘로가 따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뒤에는 벌벌 떠는 성녀, 앞에는 후드를 쓴 침입자.

꼭 연극에나 나올 법한 장면인데 어쩜 이리 시답잖을까.

크루엘로는 얼어붙은 꽃잎을 짓밟아 깨뜨렸다.

“……화이트데저트 공작.”

“날 아나? 하긴, 모르기도 힘들겠지.”

“왜 여기에 온 거지.”

“신수들의 안위가 걱정돼서?”

아차, 덧붙이는 걸 잊으면 안 된다.

“내 정 많은 달링이 부탁했거든.”

사랑에 푹 빠진 미친놈.

큰 의미는 없지만, 태어나 처음 해 보는 배역이 꽤 재밌었다.

괴한은 더 말을 섞지 않고 손을 뻗었다.

바닥에서, 허공에서, 천장에서.

사방에서 솟아난 넝쿨이 크루엘로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하나 결말은 같다.

파삭, 파삭, 파삭.

“계속할 건가?”

재미없는데.

크루엘로의 지루한 목소리에 괴한이 이를 갈았다.

막대한 마나가 그의 손끝에 모여들더니 그 지점을 뿌리 삼아 싹이 텄다.

그러나 독화를 제대로 피워 내기도 전.

“재미없다니까.”

“윽!”

마법을 손쉽게 무산시킨 크루엘로가 괴한의 목을 쥐고 들어 올렸다.

마법 때문에 공기는 차가워졌으나 그의 눈빛은 더할 나위 없이 뜨거웠다.

크루엘로가 웃으며 속삭였다.

“아카데미 졸업이 일렀나 봐, 줄리안.”

손 너머로 그의 경악이 느껴졌다.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왜.

인식 방지 마법을 걸어 둬서?

아카데미에서는 감추던 주력 마법을 사용해서?

터무니없는 소리.

그가 저를 향한 열등감 때문에 원로회의 개 노릇을 하고 있는 건 진작부터 알았다.

그럼에도 내버려 뒀던 건.

“재밌을 줄 알았는데 실망이야.”

“세뇌, 당했다는 건 역, 시 거짓말……!”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크루엘로가 팔을 휘저어 줄리안을 벽면에 처박았다.

방식은 거칠었지만 사실상 놓아 준 거다.

아니나 다를까, 줄리안의 뒤로 거대한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했다.

신수를 빼돌리기 위해 준비한 것 같으나 넘어가도록 눈감아 주는 건 하나뿐이다.

“쿨럭,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내가 확신을 줘서 기쁜 모양이야?”

“아니! 진작부터 확신했지. 네가 그 형편없는 여자한테 반했다는 것부터가 너무나 헛소리였으니.”

크루엘로의 입매가 살짝 굳었다.

“인간의 감정을 모르는 괴물아, 언젠가 이날을 후회하게 해 주마.”

독을 품고 말하는 소리는 가소롭다.

언제나처럼. 아니, 오늘은 조금 더 거슬리나.

크루엘로가 손을 펼쳤다.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하지.”

“뭐, 크흑!”

줄리안이 기댄 벽에서 솟아난 거미 다리 같은 백색 마법.

크루엘로가 천천히 손을 오므렸다.

그가 썼던 것보다 확연히 상위 차원의 얼음 마법이 줄리안의 사지를 조여들었다.

“윽, 흑, 컥!”

“나는 후회하는 게 제일 싫단 말이야.”

마침내 크루엘로가 주먹을 쥐었을 때, 얼음으로 된 거미가 제 품에 있는 걸 꿰뚫었다.

스산한 굉음이 울리고 공간 전체에 성에가 꼈다.

그러나 거미의 먹이가 있던 공간은 텅 비어 있었다.

“도망쳤네.”

크루엘로는 역할을 마친 게이트를 흘긋 보았다.

줄리안을 통해 알아볼 게 있어 그냥 보냈지만, 기분이 좋진 않았다.

***

“마지막 경고다, 성물은 저 여자가 들고 오게 해!”

“저, 저분은 신관이 아닙니다!”

“잔말 말고 따라!”

주인공이 된 기분이 이럴까.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봤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저 여자’였으니까.

바깥쪽에 몰려 있는 폭도들.

모두 시커먼 옷과 복면을 쓰고 있다.

레카논의 표식이 그려져 있긴 한데, 저걸 진짜로 봐도 될는지는 모르겠다.

그들 뒤로는 활성화된 게이트가 열려 있었고 그 옆에는 인질 여섯이 무릎 꿇려 있다.

그 앞에서 마지막 인질을 끼고 있는 게 대장 격의 인물로.

“진짜로 죽여 버리는 수가 있어, 얼른 움직여!”

나더러 성물을 가져오라 협박하고 있었다.

보는 눈이 있는 데서 성력을 못 쓰니 크루엘로를 보냈을 뿐인데, 여기서도 주인공이 되어 버리는군.

“저 말에 따르지 마십시오, 신도님. 가까이 가시면 신도님의 목숨까지 해칠 겁니다.”

“뭐? 여기 있는 인질은 중요치 않은가 보지!”

“크윽!”

“인질에 손대지 마십시오! 성물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누가 가져가든 상관없지 않습니까!”

“여기 신관이 감히 우리 성물에 손을 대는 것조차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시끄러워서 귀청 터지겠네.

나는 체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제가 갈게요.”

“안 됩니다, 신도님!”

나는 신관의 말을 무시하고 그녀의 품에서 성물을 가져왔다.

나귀 머리를 끌어안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니 주변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어째야 할까.

사실 삼류 연극 같아 별로 몰입은 안 되지만, 좋은 상황은 아니다.

내가 성물을 넘겨주면 어떻게 될까.

저 대장 놈은 일단 성물을 빼앗을 것이고 손에 든 칼을 휘두를 것이다.

나한테. 그리고 다른 인질들한테도.

그래야 신전이 더 개판이 될 거고 자기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 테니까.

그러고는 게이트로 도망가겠지.

알면서도 나는 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렇게 탁 트인 데서 성력을 쓸 거야, 검을 쓸 거야.

에휴, 이 성물에 뭔 기능이라도 남아 있으면 얼마나 좋냐고.

레카논, 뭐 해. 자존심도 안 상해?

“부끄럽지만 제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성력의 흔적만 남은 상태였습니다. 성물이 어떤 기적을 발휘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지요.”

그렇지, 다 죽어 가는 신한테 자존심은 무슨…… 인데 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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