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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24화 (24/162)

24화

“안 됩니다.”

바로 문전박대 당했다.

나는 그렇다 쳐도, 악명 높은 화이트데저트 공작의 이름도 통하지 않는 건 놀라웠다.

“외부인의 개입은 공정성을 손실시킵니다. 조사가 막바지니 바깥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추가적인 증거품을 가져왔는데요.”

“필요한 증거품은 충분히 확보했습니다.”

“그러면 마믹 성녀님이라도 만나 뵙고 싶은데.”

“조사가 끝나면 다시 방문을 청해 주시지요.”

골치 아프게 단호하네.

신전에서 이 건을 생각보다 심각하게 다루는 모양이다.

연극 제작자한테 면회를 요청하는 건 꿈도 못 꾸겠다.

더 버텨 봐야 진상을 밝히긴커녕 진상이 되겠는데, 음.

“그러면─.”

뺙.

어디선가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렸다.

뭐지, 가보트네 볍씨가 근처에 있나?

주위를 두리번거려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무언가가 치맛자락을 물어 당겼다. 시선을 내리자.

“겨울 살쾡이?”

수확제에서 만났던 그 고양이잖아?

진작 도망간 줄 알았는데 신수들을 여기서 보호해 준 건가?

“고양아!”

삐익, 삑!

다시 볼 줄은 몰라서 반가웠다.

그건 이 애도 마찬가지였는지 흥분한 겨울 살쾡이가 계속 울었다.

“어? 잠깐!”

기어이는 내 몸을 타고 올라 품 안으로 들어왔다.

왜 이제야 왔냐는 듯 뺨을 비비적거리는데 세상에.

감동적일 만큼 귀엽다.

“너, 사람 여럿 죽이겠다.”

“세상에 저 아이가……!”

신관이 놀라서 중얼거렸다.

“초면인데 달링이 마음에 들었나 보네요.”

크루엘로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아차, 친한 척하면 안 되겠지. 난 수확제 그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까.

겨울 살쾡이를 떨어뜨려 놓으려는데 고양이가 애처롭게 울면서 발톱으로 내 옷을 붙잡았다.

음, 으으음…….

“신관님, 제가 이 고양이를 좀 안고 있어도 될까요?”

“이거 좀 먹여 봐 주십시오!”

“네?”

다른 신관이 허겁지겁 접시와 포크를 내밀었다.

그 위에 있는 건 노란 별 모양의 열대 과일이었다.

살쾡인데 과일?

“신수는 육식을 안 해요.”

“…….”

이런 지식으로 크루엘로에게 밀리다니 괜히 자존심 상한다.

포크로 과육을 찍어 내밀자 살쾡이가 앞발로 포크를 잡고 과일을 갉아 먹었다.

신관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먹었어!”

“어, 그렇죠. 살쾡이가 과일을……. 저기요?”

“여기 온 지 며칠이 지났는데 크흑,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흡!”

운다.

인간한텐 그토록 단호하더니 새끼 고양이 앞에선 맥을 못 추는군.

정작 고양이는 먹는 데 정신이 팔려 신관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가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꾹꾹 눌러 닦았다.

그러더니 두 눈에 결연한 빛이 어렸다.

“좋아요, 마믹 성녀님을 만나게 해 드리겠습니다.”

“프, 프리가 수석 신관님!”

“신수가 살갑게 대하는 것만 봐도 알지요. 나쁜 뜻으로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렇죠? 해맑게 웃는 얼굴을 보며 나는 따라 웃었다.

그러며 생각했다.

참 사기당하기 좋겠다고.

살쾡이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신전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겨울 살쾡이는 좀체 떨어지려 하지 않아서 그대로 내 품에 있었다.

귀여우니 괜찮아.

마믹 성녀는 수도의 대신전에서도 꽤 깊은 곳에 있었다.

복도를 따라 걷기를 한참, 외진 복도의 끝에 이르러서야 발걸음을 멈추었다.

똑똑, 아까의 신관이 노크했다.

“성녀님, 프리가입니다. 신도 두 분을 모셔 왔습니다.”

“아,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장 먼저 기다란 게 눈에 들어왔다.

진녹색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뭔가…….

“미역?”

“점심 식사는 잘 하셨습니까? 다름이 아니오라…….”

나는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프리가가 사정을 설명하고 있어서 내 말을 들은 사람은 없었다.

“흐음.”

……크루엘로는 들은 듯했지만, 얜 사람 아니야.

“그러면 이야기 나누시지요.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안내해 준 신관이 나갔다.

방에 있던 사람은 둘.

하나는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 이쪽이 마믹이겠지.

얼굴은 회색빛이 돌았고 깊게 처진 눈꼬리와 자줏빛 눈동자는 음울했다.

키가 큰데 몹시 야위어 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옆에 있는 남자는 연보랏빛 머리칼의 성기사. 20대 중반쯤인 듯했다.

긴 머리를 목 뒤에서 묶은 냉정한 인상의 미형으로, 황금빛 눈동자에서 진한 성력이 느껴졌다.

일단은 인사.

“안녕하세요, 마믹 성녀님. 시오라 보네티라고 합니다.”

“크루엘로 화이트데저트입니다.”

“아, 반갑습니다. 마믹이라고 해요. 부끄럽지만 성녀라 불리고 있습니다. 이쪽은…….”

“성녀님의 호위를 맡은 로 블루입니다.”

나는 마믹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러면서 확인한 거지만 역시 성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믹 정통설 폐기!

“그래서 두 분께서는 어쩐 일로 저를 찾아 주셨을까요?”

성물을 보고 싶어서요!

그리 말하고 싶지만, 나도 이제는 제법 사회화를 거친 몸이다.

적당히 돌려서 말해야지, 생각하는데.

“레카논의 성물을 보고 싶어 왔습니다.”

내가 한 말 아니다.

범인은 크루엘로.

“네?”

“레카논의 다른 신도가 의심하더군요. ‘마믹 성녀’를 신전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게 아닌지. 그 성물이 진짜긴 한지.”

음…….

“레카논의 신도가 아니니 자기네들을 도와줄 리도 없다며 정당하게 조사해 달라, 읍.”

나는 일단 크루엘로의 입을 막았다.

그러나 진실과 거짓을 마구 뒤섞은 말은 이미 다 나온 뒤라서…….

“무엄하십니다! 성녀님께 예를 갖추십시오!”

「교단의 신도조차 돌보지 않으면서 그 의무를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나한테 입이 틀어 막힌 크루엘로가 허공에 글자를 썼다.

왠지 가보트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억울한 건, 그때는 내가 크루엘로 역할이었다는 거다.

왜 크루엘로만 만나면 내가 말리는 역이 되어야 하는 거지?

홧김에 손을 떼어 버렸다.

“무도한 이교도의 죄를 덮는 건 성녀님의 의무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성녀님께서는 옛 레카논 성녀의 후손일 뿐, 지금도 레카논을 믿는 건 아닙니다.”

“그렇…… 죠, 오해가 있으셨던 것 같네요.”

어쭈.

나는 크루엘로를 풀어 준 김에 참전하기로 했다.

“하지만 레카논 덕에 성녀가 되신 건 맞잖아요?”

“그건…….”

“레카논이란 이름이 없었다면 지금 같은 대접을 받으셨을까요?”

“더는 이야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이만 나가 주십시오!”

“성녀님께 무례한 게 누군지 모르겠군.”

크루엘로가 로 블루를 향해 빈정거렸다.

그러면서도 눈은 살살 웃는데 같은 편인데도 얄미웠다.

“대변인이라도 되는 양, 한 마디도 못 하게 하는데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취급인가, 아니면 대외 명분용 도구 취급인가.”

그러게, 어째 반박은 로 블루만 하고 있네.

그는 화를 내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말을 잇는 게 정말로 마믹을 향한 모욕이 될 거라 판단한 모양이다.

뒤늦게 마믹이 입을 열었다.

“저도 물론…… 레카논의 신도분들을 도와드리고는 싶어요. 하지만 독극물을 사용한 건 중죄니 덮을 수는 없지요.”

질 싸움에는 안 끼겠다는 건가.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짠!

나는 품에서 성수병을 꺼냈다.

그러고는 마개를 열고 뒤집어 보였다.

선명한 독의 흔적에, 로 블루가 성녀를 뒤로 물렸다.

“어떻게 독이 되었는지는 아시겠죠?”

“그…… 날의 성수병인가요?”

“네, 제가 직접 받았어요.”

마믹은 섣불리 손을 뻗지 못하고 머뭇거렸고, 로 블루가 대신 성수병을 받아 살폈다.

그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레카논 측에서 조작한 증거가 아닌지 확인해야 할 겁니다.”

“그럴 거면 검은 독을 안 발랐겠죠. 마치 성수가 변색하면 즉각적으로 발견되길 바란 사람처럼 검은색을 썼잖아요?”

성수는 희니 검은 독이 섞이면 바로 눈에 띈다.

레카논에서 독을 뿌렸다면 흰 독을 썼을 것이다.

죠엘에게 이런 이야기는 안 해 줬었지만.

로 블루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증거품으로 제출하겠습니다.”

오케이, 해결!

……인데 잠깐만, 내가 왜 이걸 열심히 주장하고 있는 거지?

난 그냥 증거물 주고 성물이나 구경하러 온 건데?

좀 전의 일을 더듬어 보자 흐름이 변한 원인이 나왔다.

크루엘로!

어느새 뒤로 빠져 있던 그가 천진하게 눈을 깜박였다.

이놈한테 완전히 말려들었어!

그때 어디선가 요란한 굉음이 들렸다.

여기랑은 꽤 먼 곳인데 신수가 사고라도 쳤나.

“그러면 더 할 말씀은 없으신─.”

“큰일 났습니다!”

누군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복장으로 보아 성기사, 기껏 펴졌던 로 블루의 얼굴이 도로 구겨졌다.

“제대로 절차 갖추십시오.”

“아, 예! 헤일로 2성기사단의 루카스입니다! 현재 신문 중이던 레카논의 신도 하나가 난동을 부려 사제 다섯이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음?

“또한 외부에서 레카논의 신도라 주장하는 이들이 예배관을 습격하여 건물의 절반가량이 파손되었습니다!”

저기요?

“예배관을 찾아 주신 신도 일곱 분이 인질로 잡혀 있습니다! 당장 레카논의 성물을 돌려주지 않으면 5분이 지날 때마다 한 명씩 살해할 예정이라 경고했습니다!”

어…….

“당장 성녀님을 모시고 대피하라는 대신관님의 전언입니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 나는 크루엘로를 툭 쳤다.

그가 날 쳐다보자 입 모양으로 말했다.

‘게이트.’

튀자.

당장 도망쳐야 한다.

기껏 레카논을 옹호한 직후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크루엘로가 샐쭉 눈을 휘며 소리 없이 답했다.

‘거부.’

나쁜 자식!

내가 가시방석에 앉건 말건 로 블루는 혼자 생각을 정리한 듯 마믹에게 고개를 돌렸다.

“성녀님, 상황에 따라 레카논의 성물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내어드려도 괜찮습니다. 기적을 잃은 성물보다야 신도의 목숨이 먼저겠지요.”

“어? 기적을 잃어요?”

“부끄럽지만 제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성력의 흔적만 남은 상태였습니다. 성물이 어떤 기적을 발휘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지요.”

그렇게 말하고 마믹은 방의 안쪽으로 들어가 상자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그 안에서 나온 건, 머리만 있는 하얀 나귀 조각상이었다.

두 눈에 파란 신석이 박혀 있었는데 성력은 흔적만 느껴졌다.

말로 들을 때보다 실감이 난다.

고대 교단 중에는 가장 위세가 좋던 곳인데 레카논이 이 꼴이 났구나.

원수인데도 이런 건 쓸쓸하네.

로 블루가 우리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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