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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23화 (23/162)
  • 23화

    곤경에 처한 이들이 있다.

    그리고 내겐 그 상황을 해결할 능력과 증거가 있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아, 전제를 하나 달아야지.”

    참고로 원수 사이다.

    내 선조와 사이가 그렇게 나빴단다.

    원래는 그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덕분에 악신 소릴 들었다니까 기분이 두 배로 나쁘다.

    “귀찮기도 하고 굳이 나대기도 싫고.”

    득을 본다면 움직이겠지만, 얻을 건 원로회 엿 먹이기가 전부인 상황.

    몹시 한가한 와중에도 고민이 된단 말이지.

    나는 침대를 좌우로 구르며 고민했다.

    그때.

    “응?”

    창밖 멀리서 소란이 느껴졌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약속도 없이 아가씨를 만나실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 경고입니다.”

    정문 가까이 다가갈수록 경비원의 목소리가 선명해졌다.

    대접받는 기분에 어깨가 펴진다. 으흠!

    “제발 부탁입니다. 연락만이라도 넣어 주십시오. 이쪽은 생사가……. 아!”

    경비와 말다툼을 하던 이가 나를 발견했다.

    굉장히 수상쩍은 외형의 청년이었다.

    내가 수확제에서 그랬던 것처럼 로브를 걸치고 후드를 깊이 눌러써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일단은 흑마법사 같지는 않고.

    “시오라 아가씨, 가까이 가시면 안 됩니다.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

    “무슨 일인데?”

    가까이 다가가자 청년이 곧바로 움직였다.

    털썩, 무릎 꿇는 소리가 요란하다.

    돌바닥인데 무릎이나 안 깨졌는지 모르겠다.

    “부디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누구?”

    “아, 저는.”

    그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후드를 벗어젖혔다.

    그러자 놀랍게도!

    “진짜 평범하다.”

    “……네, 진짜 평범한 레카논의 신도입니다.”

    “신전에서 신문 중이지 않나?”

    “신관님들은 모두 끌려가고 일반 신도만 남았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다시 살폈다.

    질이 나쁜 옷과 거친 피부.

    좀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손을 계속 떨었으나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그와 눈을 마주쳤다.

    “나랑 언제 봤다고 도와 달라는 거야?”

    “그날, 사자 가면을 쓰고 인형극을 보러 오셨지요? 두 분에 대한 소문이 수도 전역을 돌아 알 수 있었습니다.”

    “아하. 그래서.”

    “혹시 귀족님께서 그때 받으신 성수병을 가지고 있으시다면…….”

    “달라고 찾아온 거야? 보통은 만나 주지도 않을 텐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신관님들께서 모두 처형당하실까 봐 무서워서.”

    음, 그렇겠다.

    독극물을 나눠 준─누명이지만─ 이를 살려 줄 리는 없겠지.

    이종교 문제만 아니었으면 진작 황궁 조사실로 끌려가 사형 판결이 났을 일이다.

    종교 재판이라고 결과가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았지만.

    “그 성수병만 주시면 평생의 은혜로 삼고 조용히 돌아가겠습니다.”

    계속 이 상태로 말해야 하나?

    나는 무릎을 꿇은 진짜 평범한 청년과 경비를 한 번씩 쳐다봤다.

    안에 들였다가는 이교도니 뭐니 소문이 잘못 날 것 같은데.

    “일단 일어나서 말해.”

    “아닙니다, 부탁하러 온 처지니 이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뭐. 내가 부담감을 느낀다고 도와줄 확률이 올라가는 건 아닌데.”

    “그런 게…….”

    “오히려 추락한다. 오, 지금 5% 떨어졌어. 10%, 15%─.”

    “이, 이, 일어났습니다!”

    청년이 벌떡 일어났다.

    그냥 병만 쥐여 주자.

    결정하던 때 말 울음소리가 주의를 가로챘다.

    새하얀 말 네 마리가 이끄는 사두마차.

    화려한 마차의 겉면에는 새하얀 모래가 담긴 시계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린 이는.

    “음? 선약이 있나 보네요.”

    크루엘로였다.

    마차를 타고 오다니 웬일로 정상적이람?

    예고 없는 방문에 당황한 경비가 나와 크루엘로를 번갈아 쳐다봤다.

    내가 대신 물었다.

    “전하께서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이긴요. 아양 떨러 왔죠.”

    “전하와 진짜 안 어울리는 말이네요.”

    “화, 화이, 트 데저트 공작전하.”

    얼마나 악명 높으면 마주칠 일 없는 평민도 알아볼까.

    청년이 이를 딱딱 부딪치며 부들부들 떨었다.

    자랑스럽다, 크루엘로! 위세 한번 찬란하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할까요. 괜찮다면 저 친구도 같이 가는 게 좋겠네요.”

    레카논의 신도를?

    책임져 줄 사람이 생겼으니 나도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물론 한 가지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안 좋은 일 생기면 전하 책임.”

    ***

    우리는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레카논의 말단 신도, 크루엘로, 그리고 나.

    정리하자니 실로 이상한 조합이다.

    두 사람을 내버려 두고, 나는 사실에서 따로 성수병을 챙겨 왔다.

    “일단은 이게 내가 받았던 성수야.”

    나는 잘 보이도록 병을 들어 올렸다.

    맑은 액체가 찰랑.

    죠엘─신도의 이름이란다─이 간절한 눈으로 내 손끝을 쳐다봤다.

    “그런데 이걸 어쩌려고?”

    “독극물이란 건 누가 바꿔치기한 걸 겁니다. 귀족님께서 가지고 계시던 성수병이면 신전에서도 의심할 리 없으니 진실을 알아주겠지요.”

    그렇게 쉬울 것 같진 않은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죠엘의 표정도 어두웠다.

    “신관님들이 왜 잡혀가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부 성력을 사용하시니 선량한 의지는 이미 증명됐을 텐데.”

    “현 신전과 지향점이 다르지 않나.”

    크루엘로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아, 그러네.

    레카논은 규율과 절제의 신.

    늦은 기상이나 폭식을 처벌할 만큼 요즘 사람들과 가치관이 다른 교단이다.

    그게 레카논의 ‘선량함’, 성력을 쓸 수 있는 기준이었다.

    참고로 페불라의 신조는 ‘자연스럽게’라서 요즘과 별 차이가 없다.

    “사람들에게 독극물을 푸는 게 어떤 기준에서 선량함이 되겠습니까…….”

    “나야 그 교도가 아니니 모르지. 자네가 숨길 수도 있는 문제고.”

    크루엘로가 차게 말했다.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면서 연기 한번 출중하네.

    죠엘이 원로회에게 포섭당했는지 떠보려는 걸 수도 있겠지만.

    그를 심문하려 부른 건 아니었으니 나는 대화의 흐름을 되돌렸다.

    “사실 성수가 어쩌다 독극물이 된 건지, 나는 알 것 같아.”

    “저, 정말이십니까!”

    “도와줄 수도 있어, 네가 뭐 하나만 대답해 준다면.”

    “뭐든 답하겠습니다! 물어보십시오.”

    “〈모르모로의 희생〉에 나오는 악신이 누구야?”

    크루엘로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난 진지하다.

    자기합리화로 결론 내렸지만, 페불라의 신도로서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실화를 기반으로 구성된 이야기는 맞아?”

    “예? 갑자기 연극을 왜…….”

    “빨리!”

    “저, 저는 잘 모릅니다. 인형극의 스크립트를 제작하신 신관님이 현재 신문을 받고 계셔서.”

    “하필? 그러면 다른 사람은.”

    “신관님들 말고는 모를 겁니다. 저희는 현재의 교리만 공부…… 하니까요.”

    도움 안 돼!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페불라시여, 이 사람이 모른답니다.

    그러면 당사자라도 제게 답을 내려 주시는 게 맞지 않을까요?

    하지만 내 신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내가 털 달린 짐승만 못해?

    세상에 화풀이하고 싶어졌지만, 애먼 사람을 괴롭히는 대신 나는 성수병을 열었다.

    그리고 죠엘에게 마개의 밑 부분을 보여 주었다.

    “검은 게 묻어 있지? 이게 독이야.”

    “예?”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독이 녹아든다.

    식물 독이라 나도 기운만으로는 눈치챌 수 없었다.

    “하, 하지만 성수잖습니까. 재생력의 정점이 독에 오염될 리가…….”

    “그만큼 미약했으니까 가능하겠지. 처음 얼마간은 버텼더라도 독이 많아지면 오염되는 거야.”

    “그런……. 그러면 귀족님의 병은 어떻게 무사한 겁니까?”

    “내가 입었던 로브 주머니 폭이 좁았거든. 내 시녀도 그런 쪽으로 강박증이 있어서 구멍 난 상자에 세워서 보관했고.”

    원래는 포션 보관 상자라고 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내 성력도 알게 모르게 성수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을 것이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죠엘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면 신관님들의 무고를 증명할 수 있겠군요!”

    “범행 수단을 증명할 수도 있고.”

    “예?”

    “마개 안쪽에 독을 누가 발랐겠어. 내부 사람인 게 뻔하잖아.”

    그게 아니라면.

    누가 몰래 들어와서 성수병을 열고 마개에 독만 바른 다음 들키지 않고 탈출했다?

    원로회라면 그럴 능력이야 있겠지만 뭐 하러?

    내부 신도를 포섭하면 훨씬 간단해지는데 말이다.

    깎아내리려는 건 아니지만 죠엘의 태도는 규율의 신을 섬기는 신도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전반적인 신앙의 수준이 이 정도라면, 비도덕적인 한 명을 꾀어내기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일반 신도의 말이니 들어주지도 않을걸.”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그쪽에 영향력 되는 사람 있잖아. 마믹 성녀?”

    신전에서 이교도를 포용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세웠다는 그 사람.

    의도적으로 쥐여 준 영향력이지만 이쪽이라고 못 쓸 거 있나.

    수확제 일을 떠올리면 레카논에서도 잘만 써먹던데.

    그러나 죠엘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여잔 레카논의 신도가 아닙니다. 저희 교단과는 일면식도 없어요.”

    “엥?”

    “갑자기 레카논의 성물을 들고 나타나서는 본인이 모르모로 성자님의 후손이라 주장했습니다. 신전 측에서 레카논의 이름값을 이용하려 만든 인물임이 분명합니다.”

    “오. 그러면 성물이 가짜라는 거야?”

    “가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신전에서 입증을 마쳤다고 하니까.”

    “기적이라도 발휘한 거야? 무슨 능력이 담겼는데?”

    “그건 신관님들도 모릅니다. 듣기론 자료가 말소됐다고…….”

    들을수록 마믹이 정통 같은데.

    혹시 얘네가 가짜 아닐까?

    “아무튼 신전의 편이니 저희를 도와줄 리 없습니다.”

    “근데 인형 극장에선 성수를 나눠 주는 게 마믹이라고 했잖아.”

    “그, 그건! 저희도 일방적으로 이용당하는 게 분해서…….”

    와, 사기를 치고도 성력을 써?

    ……라고 말하려다가 나는 그 말을 삼켰다.

    결코 찔려서 그런 건 아니다.

    “그래도 레카논 이름 팔아 성녀 됐다며, 만나 보지.”

    “혹시나 하고 오래전부터 만나려고 했는데 만나 주지도 않았습니다.”

    죠엘의 분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로 찔리는 게 있는 듯이 구네.

    하지만 평소엔 그렇게 회피했어도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레카논이 이대로 독극물 누명을 써 버리면 그 덕에 성녀가 된 사람에게도 반드시 악영향이 갈 것이다.

    어쩔까.

    흥미가 생긴다.

    연극의 스크립트를 쓴 사람도 신전에서 조사받는 중이니, 성물을 구경할 겸 잠깐 다녀올까?

    “그러면 우리가 한번 만나 보도록 하지.”

    “전하? 방금 ‘우리’라고 했어요?”

    “갈 생각이잖아요, 달링. 눈빛이 변했는데.”

    나는 반사적으로 눈가를 더듬었다.

    읽히고 있다니!

    “도, 도와주시는 겁니까?”

    죠엘이 벌떡 일어나 허리를 90도로 구부려 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무를 수도 없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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