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그러네.”
크루엘로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얼굴을 쓸었다.
“모리온을 없애려는 건 맞아요. 사적인 원한 때문에 복수하고 싶은 것뿐이지만.”
갈가리 찢어 주는 것만으론 성에 차지 않아서요.
그의 목소리는 감춰 놓은 격랑으로 들끓고 있었다.
복수심.
제 인생을 망쳐 놓은 대가를 받고 싶은 걸까.
마땅한 감정이긴 했다.
“의도야 어쨌든 결과적으론 모두에게 좋은 일이겠죠.”
그는 금세 감정을 갈무리하고 웃었다.
그 미소가 참으로 가면 같았다.
“나를 도와줘요, 달링이 말했던 ‘세계 평화’를 위해.”
나는 잠깐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감정을 다스려야 하는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물론 무보수로 일해 달라는 건 아니에요. 사람의 선의에는 한계가 있잖아요?”
“뭘 주실 건데요.”
“페불라 교단의 부흥이라면 매력적인가요?”
부흥이라니 상상도 못 한 패였다.
“사실 좀 의아했어요. 미약한 교단들도 목소리를 내잖아요.”
“음.”
“그런데 그만한 힘을 가진 페불라의 신관은 숨죽이고 저택에만 틀어박혀 지냈죠.”
아, 내가 들어오기 전의 시오라를 박해받는 교도라 해석했나 보다.
“고서를 찾아보고서야 알았어요. 자칫하다가는 현 신전까지 적으로 돌려 버릴 판이니 그럴 수밖에.”
“네?”
“기록도 얼마 없으니 그것도 뒤집을 수 있어요. 약간의 조작만으로도─.”
“저기,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몰라요?”
크루엘로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드물게도 그는 당황한 것 같았고 그래서 나는 불길해졌다.
뭐지?
“인형극을 같이 봤잖아요.”
“〈모르모로의 희생〉이요? 그게 왜요?”
“거기 나오는 악신이…….”
아, 잠깐.
잠깐만, 설마!
“……페불라잖아.”
***
빰빠밤 빰빰빰 빰!
트럼펫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이어 붉은 커튼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무대가 드러난다.
[지금 바로 〈인형극 : 모르모로의 희생〉이 공연됩니다!]
털실을 붙인 목각인형들이 쫑쫑 걸어 나왔다.
가장 뒤쪽에 있는 인형이 크게 입을 벌리며 말했다.
[이것은 어느 무시무시한 고대 악신의 이야기.]
[악신은 수백의 사람들을 해치고 제물로 삼았습니다.]
[용사, 모르모로만이 그 악행을 눈치챘지요.]
[성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인형들끼리 마구 치고받고 싸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작고 움직임은 투박했지만, 날붙이가 부딪는 소리는 살벌했다.
마침내 하나가 승리를 거뒀다.
와! 인형이 칼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이야, 모르모로가 승리했습니다! 위대한 영웅은 악신의 성자를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그 잔당이 남아 있네요.]
인형의 고개가 휙, 이쪽으로 돌아왔다.
쓰러진 인형들도 비틀비틀 일어나며 이쪽을 바라봤다.
한순간 그들의 눈이 빨간빛으로 번쩍이더니.
[살려 둬선 안 되겠죠?]
와락, 인형들이 달려들었다.
동시에 꿈이 끝났다.
“악!”
비명을 지르며 나는 벌떡 일어났다.
서재의 책상에 엎드렸던 터라 온몸이 뻐근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어쩌면 꿈도 이따위로 꾼대.
등줄기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시오라?”
옆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가보트다.
나를 막 깨우려던 참인지 그의 손이 허공에 어정쩡하게 떠 있었다.
“악몽이라도 꿨냐?”
“‘악’ 자 들어가는 말 하지 마.”
“뭐래, 네 비명도 ‘악!’이었어.”
“악! 아악! 악!”
나는 머리를 움켜쥐고 소리쳐 댔다.
가보트가 짜증 난 표정으로 귀를 막았지만, 속이 시원해지진 않았다.
오히려 서러워서 나는 도로 책상에 엎어졌다.
“으흐흑.”
“왜 그래, 미쳤냐?”
네가 내 심정을 어찌 알겠냐.
막 자정이 넘은 시간, 나는 정서적으로 얻어맞고 돌아왔다.
제안은 생각해 보겠다고 뭉갰지만, 내가 감당할 이야기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거기 나오는 악신이 페불라잖아.”
“말도 안 되잖아!”
“……이제 좀 무서우려고 그래.”
악신?
신의 근본적인 정의부터 부정하는 말이다.
전지전능하고 악했으면 악마였겠지, 그걸 누가 신이라고 칭해?
그런데 그 신이 바로 내 신이란다.
“가엾게도 스윗피, 〈모르모로의 희생〉은 실화를 기반으로 한 연극이에요.”
“물론 수백 년 전의 이야기니까 와전된 부분도 있겠죠.”
“하지만 사람들이 ‘페불라’를 악신으로 기억하고 있는 건 분명해요.”
나는 원망스럽게 하늘을 노려봤다.
페불라시여, 뭐 하십니까?
지금 하나뿐인 신도가 시험에 들려고 하는데 계시라도 내려 주셔야지요.
털 달린 짐승들 구할 때만 빼꼼 나왔다가 모르는 척하시기 있어요?
“도대체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마지막 책이야.”
연민도 없는 가보트는 내게 책이나 내밀었다.
제목은 〈고대의 신앙 : 수백 가지 이름〉, 고대 신학 도서였다.
그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는 뱁새가 뺙, 울었다.
“볍씨 아직도 안 돌려보냈어?”
“볍씨 아니거든, 피아니시모라고 몇 번 말 해? 얘도 감정이란 게 있는 새인데─.”
가보트의 말을 무시하고 볍씨가 쪼르르 날아 내 어깨에 올라왔다.
그 조그만 머리통을 몇 번 기울이더니 내 얼굴에 뺨을 비볐다.
전번의 겨울 살쾡이 같군.
“젠장, 걘 왜 널 좋아하냐?”
“얘도 감정이 있는 새라서 날 좋아하는 게 당연하지.”
뺙.
“동조하지 마, 피아니시모.”
나는 가보트가 준 책을 펼쳐 목차를 살폈다.
레카논은 있지만, 페불라는 없다.
하는 수 없이 레카논 항목이라도 펼쳤지만, 다섯 페이지가 전부였고 페불라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이 책만 특별한 게 아니라 백작저의 서재에서 본 모든 신학 도서가 이 모양이었다.
이렇게 기록이 없는데 크루엘로는 뭘 보고 그런 주장을 한 거지?
“……날 엿 먹이려고 거짓말한 건가?”
그럴싸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아니, 변태가 됐다는 말은 아니고.
“누가 널 엿 먹이는데.”
“공작.”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럼 100%겠네. 아무튼, 고대 신학 도서는 이게 마지막이야.”
“그래. 책 찾는 거 도와줘서 고마워, 가보트.”
“나야 뭐 한가하니까. 너는 책상에 엎어져 잘 정도로 훨씬 한가했지만.”
말에 뼈 섞기는.
마음이 아파서 요양한 거다.
“더 알아보고 싶으면 황궁이나 신전 도서관에 가 봐.”
“아냐. 나는 이미 마음의 평화를 찾았으니 불필요한 선택지를 늘리지 말아 줘.”
“뭐래.”
떨떠름하게 중얼거리는 가보트의 목소리와 노크 소리가 맞물렸다.
서재에 온 건 베티였다.
“아, 시오라 아가씨 여기 계셨군요. 가보트 공자님도 안녕하세요.”
그녀는 공손하게 인사하더니 곧 병 하나를 들어 보였다.
“저번에 말씀하신 그 병 찾았어요!”
레카논의 성수병이었다.
“흠.”
나는 베티가 찾아온 병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인형극이 끝나고 레카논 교단에서 나누어 준 성수.
병 안에 든 우윳빛 액체는.
“전과 똑같은데?”
그냥 성수였다.
원로회가 누명을 씌웠다는 건 들었지만, 이게 왜 독극물 취급을 받는 거지?
누가 가짜로 신고했나? 아니면 바꿔치기 당했나?
어떻게 생각해도 께름칙하다.
고대 교단을 다 이단 취급한다고 해서 지금 신전이 이단 사냥을 할 정도로 막 나가진 않는다.
법적인 선에서 박대할 뿐.
조사는 제대로 할 텐데 뭘까.
내용물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나는 마개를 열었다.
그리고.
“허.”
답은 거기에 있었다.
***
짧은 주황빛 머리칼이 목덜미에서 흔들거린다.
9원로, 큐딜은 심드렁하게 서류를 읽고 있었다.
수확제 사후 보고서, 재밌는 이야기는 없다.
당연하다.
아레스한테 떠넘기고 내뺀 일이 완전히 망했으니까.
수확제에서 풀려난 신수들은 다 신전으로 넘어가 당분간 손쓸 수 없게 됐고, 그 일로 신전은 황궁에 항의 중이다.
그것만이라면 나았겠지만, 익명의 제보자가 신전에 비밀 서류까지 떠넘겼다.
일명 〈베아티투도 제작 일정〉.
당연히 신전은 뒤집어졌고 큐딜은 사고의 책임을 떠맡았다.
그놈의 제보자만 아니었어도!
그녀가 눈가를 찡그렸다.
“아무래도 도련님 같단 말이야. 그걸 은밀히 빼낼 만한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큐딜에게 서류를 가져온 이, 줄리안이 그녀의 짜증에 응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세뇌당한 척이야 얼마든 할 수 있는 법이니까요.”
“그렇지?”
“요즘의 행보를 보세요. 여자에 미친 척을 하고 있는데 맥락도 없이 첫눈에 반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아, 맞아. 나도 들었어. 그러고 보니 그 여자 인적 사항도 보고받았는데.”
어디에 뒀더라.
큐딜은 서랍을 열고 여기저기를 뒤적거렸다.
정돈되지 않은 서류 몇 장이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뭐, 딴 놈이 치우겠지.
그러던 중 큐딜은 원하는 서류를 찾았다.
어디 얼굴이나 볼까 하고 그녀가 몇 장을 넘겼다.
오?
“이야, 갑자기 도련님이 이해되려 그런다. 보통 미인이 아니네.”
“……9원로님.”
“줄리안, 네 취향은 아니냐?”
“전…….”
줄리안이 눈가를 조금 찡그렸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해서 큐딜은 히죽 웃었다.
“아, 하긴 네 취향은 그 딱딱한 친구지. 키가 181cm랬나, 머리까지 고동색이라 웬 고목나무 같던데.”
“…….”
“농담이야, 농담. 대놓고 기분 나빠 하네.”
사실 별로 상관은 없다.
크루엘로가 세뇌에 걸려 있든 그런 척을 하든.
어떻게 발버둥을 치더라도 결론은 같을 테니까.
큐딜은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가 다시 읽기 싫은 서류로 눈을 내렸다.
아, 역시 짜증……. 어라?
“보네티 백작 조사 연장됐어?”
“예, 베아티투도 건으로 조사 중이었으니까요.”
“푸하하, 황궁에서 나오질 못하네. 이거 실은 징역살이 아니냐?”
큐딜이 경박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관련도 없는 남이 그만큼 고생한다는 게 굉장히 재밌었다.
보고서의 마지막 부분이 또한 그녀를 즐겁게 했다.
“좋아, 수습은 수월하게 되고 있네. 이렇게 된 거 성물까지 한 번에 빼내 보자고.”
“교단에 심어 놓은 세작도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척하면 척이네, 응?”
큐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엔 실수하면 안 돼.”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줄리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자, 그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나가 봐, 큐딜이 손짓했다.
줄리안이 고개를 숙였다가 방을 나섰다.
닫힌 문을 바라보며 큐딜은 비죽 웃었다.
“귀한 집안에서 귀여운 등신이 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