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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21화 (21/162)
  • 21화

    가보트의 기세가 단번에 죽었다.

    “나는 못 불러. 몇 번이나 해 봤다니까.”

    “그래도 해……. 잠깐만.”

    나는 가보트를 내버려 두고 진의 몇 군데를 고쳤다.

    이미 쓰인 글자를 바꿀 수는 없었기에 따로 추가했다.

    약간 누더기 같아졌지만 뜻만 통하면 되겠지.

    “좋아, 연결됐다.”

    “너 아직도 내가 잘못 그렸다고 생각해서 그러냐? 이거 고대 룬어라 학자들도 해석을 거의 못 해. 그나마 우리 가문에서 보전한 자료가 많은 건데 그걸 훼손한다고 정령이─.”

    “해 봐.”

    “……사람이 말하면 좀 들어.”

    “지금 느낌이 좋아서 그래.”

    가보트가 계속 미적거리니까 귀찮다.

    나는 그의 양 뺨을 소리 나게 붙잡고는 목소리에 미미한 성력을 실어 말했다.

    신뢰감 +1.

    “해.”

    “……안 돼도 난 모른다.”

    안 될 리가 없지.

    나는 이미 답지를 알기 때문에 자신만만하게 팔짱을 끼고 가보트를 채근했다.

    그가 마지못해 의식을 실행했다.

    기대는 거의 없어 보였지만, 그럴 때 맺는 결실이 더 극적인 법이다.

    “세상을 이루는 지고한 자연께 청하나이다…….”

    우우웅, 아까보다는 훨씬 미약하나 마법진에서 반응이 일기 시작했다.

    옅게 부는 바람. 코끝에서 나는 청량한 향.

    가보트의 눈빛이 변하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나는 등허리를 더 당당히 폈다.

    “……그리하여 제 곁에 머무를 바람 한 조각을 청하나이다.”

    화아악!

    절정에 이른 바람이 한순간 공간을 강하게 휘저었다.

    실내였음에도 머리칼과 옷자락이 강하게 펄럭거리고 천장의 등이 깜박이며 흔들렸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자유로운 바람의 기운이 느껴졌다.

    어디, 어디 있지?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바람의 정령은 새의 거죽을 쓰고 구체화한다.

    가보트의 정령은 뭘까.

    알바트로스? 하피 이글? 천둥새 같은 건 아니겠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 의아해하던 찰나에.

    뺙.

    음?

    어쩐지 겨울 살쾡이처럼 들리는 소리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나는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보트는 이미 그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진의 가운데, 허공이 아니라 바닥에.

    삐뱍!

    볍씨를 부풀려 놓은 것처럼 동그란 몸체.

    까만 콩 두 개를 콕콕 박아 놓은 것 같은 두 눈.

    연둣빛 솜털을 한껏 곤두세운 이 동그라미는……! 뱁새였다.

    “미안해, 가보트.”

    나는 잽싸게 사과했다.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불길했다.

    그 난리를 피워 놓고 이런 돌콩만 한 애를 불러내다니, 내가 못하는 것도 있구나.

    인생사 처음으로 좌절을 배웠다.

    그 순간 가보트의 두 눈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어라?

    “가보트, 너 설마…….”

    “흐윽.”

    초록빛 눈동자 아래로 물 두 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진짜다, 진짜 운다.

    어떡해!

    “아니, 미안해. 나도 설마 아기 주먹만 한 애가 나올 줄은 몰랐어. 최소한 어른 주먹만 한 정령은 될─.”

    삑?

    “넌 조용히 해 봐, 얘 속상해서 울잖아.”

    “속상, 흑, 해서 우는 게 아니 윽.”

    “그럼 뭔데. 기뻐서 우는 건 아닐 거 아냐.”

    “맞, 흑.”

    ……기뻐서 운다고?

    이걸로? 진심?

    그때 누군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미뉴엣이었다.

    “뭐야, 이거.”

    기운을 느끼고 쫓아온 걸까.

    그녀의 눈이 곧바로 뱁새에게로 향했다.

    미뉴엣이 입을 벌렸다.

    “바티 너…….”

    “미뉴엣.”

    뭐지.

    왜 감동적인 상황인 것처럼 분위기가 흐르지?

    미뉴엣이 놀란 표정을 갈무리하며 천천히 가보트에게 다가왔다.

    금방이라도 끌어안아 줄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얼굴만 그랬을 뿐, 미뉴엣은 가보트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악, 미뉴엣!”

    “빨리 계약해! 기운이 다 흩어질 때까지 기다리니?”

    “마, 맞다!”

    가보트가 허겁지겁 정령에게 손을 뻗었다.

    뱁새는 고개를 몇 번 기웃거리더니 그의 손가락에 콩, 하고 머리를 박았다.

    그리고 스르륵, 둘의 기운이 연결되었다.

    “……우와.”

    볍씨랑 계약했어. 진짜로 계약했다!

    세상에.

    나라면 안 해. 차라리 진짜 뱁새를 키우고 말지.

    설마 미뉴엣의 정령도 저 정돈가?

    후대로 갈수록 정령술도 몰락했다더니 어쩜…….

    나는 측은하여 두 남매를 번갈아 쳐다봤다.

    미뉴엣이 떨리는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일단 축하하긴 하는데 어떻게 된 거야, 바티.”

    “나도 잘 몰라, 시오라가…….”

    뒤늦게 비밀로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지 가보트가 말끝을 흐렸다.

    이미 말해 놓고 저러면 무슨 소용이겠냐만.

    미뉴엣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돌아보았다.

    “네가 도와준 거야?”

    어떻게 알았냐고 따질 줄 알았는데 그런 느낌은 아니다.

    나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결은 묻지 말아 줘. 뭐라고 물어봐야─.”

    “기억 안 난다고 하겠지.”

    “으응, 진짜야.”

    “……그래. 어쨌거나 도움을 받은 입장이니 그런 걸 따질 생각은 없어.”

    “그렇지, 그렇지. 여기서 더 따지면 사람도 아니지.”

    “빚은 가보트 말고 나한테 달아 둬.”

    “응?”

    “쟤는 어차피 쓸 데도 없을 테니까.”

    뜻밖의 결실이다.

    그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나는 재차 힘차게 끄덕였다.

    ***

    가보트의 정령 소환을 도와주고 내 삶은 훨씬 편해졌다.

    일단 품위 유지비 명목으로 지급되던 용돈이 두 배는 늘었고 전속 호위 기사도 둘이나 생겼다.

    역시 미뉴엣이 이 저택의 실세였어.

    물론 백작이 부재중─여태 황궁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인 걸 감안해야겠지만.

    한참 책을 읽다가 나는 창밖을 보고 놀랐다.

    새까맣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됐대.

    내일은 크루엘로를 만나는 날이니 이쯤에서 자야겠다.

    생각하며 책을 덮은 순간, 대뜸 창문이 열렸다.

    도둑?

    “안녕, 스윗피.”

    나는 몇 번 눈을 깜박이다가 눈가를 비볐다.

    “벌써 잠들었나?”

    “꿈이 아니라 현실이에요.”

    대뜸 쳐들어온 무뢰한이 창틀을 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일단 물었다.

    “스윗피는 뭐예요.”

    “아, 역시. 자기는 창문으로 들어온 것보다 그걸 먼저 물어볼 줄 알았어요.”

    “그래서 뭐냐고요.”

    “요즘 애칭이 단조로워서 늘려 봤어요. 스윗피, 스윗하트, 내 오아시스.”

    “세상에 그런 쓸데없는 짓을. 지금 몇 신지 아세요?”

    “아니까 왔어요.”

    크루엘로가 산뜻하게 웃으며 시계를 가리켰다.

    00시 02분.

    “사흘 후에 데이트하자고 했었죠?”

    아. 자정이 넘었으니 사흘이 찼다고.

    자기는 시간 맞춰 온 거라 그거야?

    미쳤냐는 소리는 입이 아플 지경이다.

    “아직 안 자길래 마음이 통한 줄 알고 기뻤는데 섭섭하네요.”

    “혹시 예의가 뭔지 아세요?”

    “보안보다 중요한 건가요?”

    “남 눈에 안 띄려고 여기까지 들어오셨다고요?”

    “그럼요. 누가 달링이 침실에 없는 걸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크루엘로가 손가락을 튕겼다.

    나와 그의 사이에 다른 장소로 연결된 게이트가 열렸다.

    그가 우아하게 팔을 내밀었다.

    “가실까요, 레이디?”

    몹시 떨떠름했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나는 별수 없이 그의 팔을 잡았고 시야가 확 뒤집어졌다.

    눈을 두어 번 깜박였을 때 보인 건 화이트데저트 공작저의 다이닝룸.

    그리고 식탁을 가득 채운 만찬이었다.

    진짜로 꿈 아냐?

    혼자 태연한 크루엘로는 내 앞의 의자를 빼 주고 제자리를 찾아갔다.

    “일단 식사부터 할까요?”

    “이 시간에요?”

    “전 오늘 온종일 굶었거든요.”

    요즘도 그래?

    고치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해 댔는데.

    나는 눈가를 찡그리며 말했다.

    “집중하면 끼니 거르는 습관…….”

    을 ‘시오라’는 몰라야 한다는 게 이제 떠올랐다.

    나는 재빨리 말의 방향을 틀었다.

    “있으세요? 몸에 안 좋은데.”

    “…….”

    크루엘로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긴장 풀고 있으니 자꾸 실수하네.

    설마 들켰나? 그럴 린 없다.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하더라도 죽은 사람이 다른 거죽을 뒤집어쓰고 앞에 있다고 상상하기가 쉬운가.

    그가 곧 다시 웃었다.

    “바쁘면 몰아서 먹긴 해요. 식사 생각이 없으시다니 유감인데 그러면 그쪽에 둔 신문이라도 보고 계실래요?”

    뭘 하든 남 먹는 걸 보는 것보단 생산적이겠지.

    나는 옆쪽에 있는 신문을 펼쳤다.

    크루엘로의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찍혀 있다.

    “아침에 본 거예요.”

    “3면도 보셨어요? 레카논 독극물 사건.”

    “봤는데요.”

    크루엘로의 입에서 그 일이 거론되자 다시금 찝찝해졌다.

    진짜 얘가 무슨 짓을 꾸민 건 아니겠지.

    그가 우아하게 썬 고기를 입에 넣었다.

    “성수를 독극물로 만든 게 저희 원로회예요.”

    어?

    “기미가 이상해서 꼬리를 붙여 보니 그렇더라고요.”

    “아니……. 그, 누명을 씌웠다고요? 왜요?”

    “원로회의 전신이 네크로맨서 조직이에요.”

    “딸꾹.”

    노골적인 고백에 절로 딸꾹질이 나왔다.

    입을 틀어막으면서도 놀란 눈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걸 왜 네가 말해?

    각오는 하고 왔는데 방향이 좀 이상하지 않아?

    “역사가 깊어 고대 교단과 트러블이 많았죠. 하나씩 하나씩 원로회 손에 사라졌고요.”

    원로회에서 고대 교단 사냥도 했단 말이야?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지만, 매우 그럴싸했다.

    “페불라도 예외는 아니겠죠. 달링은 원로회의 적이에요.”

    크루엘로는 단정 지어 말했다.

    나는 부정하지 않았고 그가 눈을 가늘게 휘었다.

    “그러면 내 편이 되어 줄 수도 있겠네.”

    “뭘 바라시는 거예요.”

    “글쎄요. 윗사람이 없고 유능한 성직자?”

    그는 고기를 한 덩이 더 입에 넣으려다가 포크를 내려 두었다.

    짝, 박수 한 번에 식탁 위의 만찬이 모조리 사라졌다.

    온종일 굶었다면서 겨우 저거 먹고 끝이라니, 참견하고 싶어서 입술이 움찔거린다.

    “원래는 레카논을 포섭해 볼 생각이었는데 더 확실한 선택이 눈앞에 나타났더라고요.”

    심드렁하게 말하며, 그가 입을 닦았다.

    “원로회랑 싸우란 소리예요?”

    “그건 내가 할 거고. 성직자만 찾을 수 있다는 뭘 좀 찾아 줬으면 해요.”

    “뭘─.”

    “모리온Morion.”

    아. 정말로…….

    반응하고 싶지 않았는데 얼굴 표정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세계 멸망의 원흉, 원로회에서 수백 년간 쌓아 온 부정한 힘.

    크루엘로는 그 이름을 영영 모르길 바랐으니까.

    내 반응에 그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아나 봐요.”

    “찾아서 어쩌려고.”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내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머리가 탁했다.

    “없애야죠. 세상에 있으면 안 될 힘인데 내버려 둘 수 없잖아요.”

    “지금 거짓말해서 좋을 게 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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