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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7화 (17/162)
  • 17화

    “실속 있는 건 없어요. 가고 싶은 티파티 있으세요?”

    “안 가.”

    “네, 알겠습니다.”

    베티가 편지를 전부 벽난로에 쑤셔 박았다.

    얘도 좀 이상해.

    그러나 불타지 않은 것도 있었다.

    베티가 마지막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이건 가셔야 할 거예요.”

    “뭔데?”

    “궁정 무도회.”

    문가에서 들린 목소리가 베티의 답을 대신했다.

    고개를 돌리자 청량하게 웃고 있는 미뉴엣이 보였다.

    언제 왔담.

    “거길 꼭 가야 해?”

    “폐하께서 공작전하의 예비 약혼녀를 보고 싶어 하신다네. 아, 폐하께서 전하의 어머니 쪽 숙부신 건 알지?”

    “으으.”

    “잘됐잖아, 파티는 망쳤으니 이번을 진짜 네 데뷔탕트 볼로 하자고.”

    미뉴엣이 다가와 내 머리칼을 매만졌다.

    소름 끼칠 만큼 다정한 손짓이다.

    “시오라. 요즘 네 행보가 참 마음에 들어.”

    미뉴엣이 말하니 빈정거리는 것처럼 들리지만 진심이겠지.

    크루엘로는 우호적이고 보네티는 공격받지 않으니, 그녀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상황이다.

    “멋진 데뷔탕트가 될 거야.”

    미뉴엣이 말갛게 웃었다.

    이 애가 웃을 때면 나는 왜 이리 불안한지 모르겠다.

    하지만 교육 때도 괜찮았으니까 별일은 없…… 겠지?

    ***

    날짜는 훅훅 지나갔다.

    미묘한 불안감도 쌓여 갔다.

    수확제에서 그렇게 헤어진 이후 크루엘로에게서 연락이 없다.

    정체가 뭔지, 그날 무슨 짓을 한 건지.

    캐물으려고 왔어도 백번은 왔을 시간인데 무슨 생각일까.

    심지어는 궁정 무도회에서 내 카발리에─데뷔탕트의 파트너─로 와 달라는 부탁마저 거절했다.

    도통 바빠서 시간이 안 난다나.

    크루엘로의 꿍꿍이를 의심하는 가운데 날이 밝았다.

    오늘은 궁정 무도회 날.

    나는 한껏 차려입고 마차에서 내렸다.

    바로 앞에 화려하게 번쩍거리는 황궁이 보였다.

    그래서 제 소감은요.

    “무거워.”

    미뉴엣의 미소를 보며 느낀 불안감은 진짜였다.

    드레스에 천이며 보석을 얼마나 붙인 건지.

    대검을 몸에 펴 발랐어도 이 정도는 아니겠다.

    “걸어 다니는 보석상 같지 않아?”

    나는 내 카발리에를 돌아보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조용히 해, 나도 무거우니까.”

    가보트의 음침한 대답이 만족스럽다.

    그는 드레스 대신 망토를 걸쳤는데 그 무게가 또 대단해 보였다.

    어쩐지 어깨를 못 펴더라.

    “운동 좀 해, 가보트.”

    “너나 나나 똑같거든?”

    “아닌데. 나는 침실에서만 틀어박혀 지내서 체력이 이 모양─.”

    “조용히 해!”

    식겁하며 가보트가 내 입을 틀어막았다.

    네네, 아무렴요, 말조심해야지요.

    미뉴엣에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시오라 벨벳 시절은 입에 담지도 마.”

    “물어보면 어떡해?”

    “그냥 웃어. 가보트가 도와줄 거야.”

    “뭐? 미뉴엣, 너는!”

    “나는 일이 있어서 늦게 갈 거야. 바티, 넌 한가한 데다가 시오라의 카발리에잖아.”

    “……젠장.”

    과연 가보트가 도움이 될까?

    나는 미심쩍은 마음을 지우지 못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

    “그 나이에 벌써 그 경지라니 그야말로 제국의 홍복입니다.”

    “이 나라에 대현자가 나오겠습니다, 허허.”

    “과찬이십니다.”

    줄리안 미네르바.

    젊은 미네르바 소후작은 웃으며 귀족들의 칭찬에 응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겉과 다른 생각이 흘러갔다.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으려 알랑거리긴.’

    이래서 무도회에 오는 게 싫다.

    제 친구가 권하지만 않았어도 연구를 핑계로 저택에 틀어박혔을 텐데.

    “그러고 보니 크림슨 경도─.”

    “올리 자작님. 이번에 노르비앙으로 상로를 뚫으셨다면서요.”

    “예? 아, 맞습니다. 제가 이번에 아주…….”

    줄리안은 데이디어 크림슨에게로 향하려는 관심을 능숙하게 되돌렸다.

    그의 친구, 데이디어는 순진무구한 구석이 있었으니 먹잇감이 되게 둘 순 없었다.

    그러던 중.

    “저 레이디가 보네티에 입양되었다는 그분인가 봐요.”

    소란의 틈새에서 몇 마디 말이 줄리안의 귀로 들어왔다.

    그가 눈을 돌렸다.

    젊은 남녀가 무도회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하나는 아카데미를 다닐 동안 질리도록 봐 온 청년.

    다른 하나는 초상화로만 봤던 얼굴이다.

    화사한 금발과 창백한 낯, 그리고 오묘한 빛깔의 눈동자를 가진 미인.

    ‘시오라 보네티.’

    줄리안의 입매가 뒤틀렸다.

    파티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소식에 얼마나 황당했는지.

    덕분에 원로회에서 한 소리를 단단히 들었다.

    아마도 크루엘로 화이트데저트가 개입했을 것이다.

    보란 듯 몬스터 독 해독제를 보내지 않나, 수확제에서 데이트를 한 꼴만 봐도 훤했다.

    그 때문에 나돌아 다니는 소문도 아주 대단하지 않은가.

    ‘그 화이트데저트 공작이 여자한테 빠졌다.’

    물론 줄리안은 그 말을 한 자도 믿지 않았다.

    원로회의 속을 뒤집어 놓으려고 쇼를 한 거겠지.

    그들은 아직 공작이 세뇌에 걸려 있다고 믿는 듯했으나 바보 같은 착각이다.

    그러면 저 여자는 어떨까.

    자기가 공작에게 특별하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면…….

    “……건드려 볼까.”

    꾀어내면 재밌는 일을 벌여 줄지도.

    “가보트?”

    데이디어도 가보트를 발견한 듯했다.

    그녀가 반가운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저분이 새로 생겼다는 누이인가?”

    “그렇겠지. 인사하러 가려고?”

    “……글쎄, 가보트가 나를 반가워하진 않을 것 같아서.”

    서신을 보내도 답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아마.

    데이디어가 덧붙인 말에 줄리안이 눈가를 찡그렸다.

    “담아 둘 것 없어, 데이디. 원래 저 친구가 좀 까칠하잖아.”

    “아니, 아무래도 내가 실수한 게 있는 모양이다.”

    “그럴 리가.”

    “나는 괜찮으니 너라도 인사하고 와라.”

    데이디어 없이 가는 게 찔러 보긴 편하겠지만.

    그녀의 풀죽은 기세에 줄리안은 조금 난감해졌다.

    그때 누군가가 줄리안의 관심을 끌려고 소리를 높였다.

    “실은 소후작님께 드리려고 제가 좋은 선물을 준비해 왔습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무슨 남작이었다.

    그는 투박한 검은 병을 줄리안에게 건넸다.

    귀족들이 알게 모르게 그를 비웃었다.

    “웬 집시 부족에서 담갔다는 술입니다. 아마 처음 보셨을 겁니다, 이게 어떤 술이냐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설명을 듣고 싶지도 않아서 줄리안은 병을 받아 들며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어리벙벙해 있는 남작을 뒤로한 채 데이디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 잠깐 다녀올게, 데이디.”

    그는 다정하게 말하고 걸음을 떼었다.

    ***

    무도회장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그리고 내 주위에도.

    “세상에 머릿결이 정말 고우십니다.”

    “드레스가 잘 어울리세요. 어느 의상실에서 맞추셨나요?”

    “교육을 한 번에 통과하셨다면서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쏟아지는 말을 다 알아듣기도 어려웠다.

    초대장 보낸 사람이 다 여기에 있나 봐.

    황제가 나를 궁금해한다니 이 소란에서 꺼내 주길 바랐으나 턱없는 기대였다.

    그는 나를 한 번 쳐다만 보고 황후와 함께 돌아갔다.

    남은 건 나한테 관심이 1g도 없어 보이는 황태자뿐.

    그러니까.

    “팔 좀 놔.”

    “안 돼, 가보트.”

    얘라도 데리고 있어야지.

    저번처럼 가보트가 또 도망치려고 해서 나는 그의 팔을 꽉 움켜잡았다.

    “아니, 시오라. 나 목이 말라서 그래. 와인 한 잔만 가져올 테니까…….”

    가보트가 애처롭게 수를 썼다.

    답지 않게 약한 모습이었지만 넘어가지 않는다.

    “아니야, 와인은 음.”

    나는 주위를 살피며 트레이를 든 하인을 찾았다.

    그러는데 불쑥, 내 앞으로 잔이 하나 나타났다.

    “찾으시는 게 이거예요?”

    듣기 좋은 미성에 가보트가 움찔 굳었다.

    고개를 돌리자 와인을 건넨 이가 눈에 들어온다.

    사람 좋게 처진 눈꼬리에 쾌활한 미소.

    연분홍색 머리칼의 청년은 손쉽게 호감을 살 만한 미형이었다.

    외워 둔 인적사항에 있는 얼굴이며 동시에.

    “사주한 건 줄리안 미네르바야.”

    내 파티를 망치려던 장본인.

    “안녕하세요, 미네르바 소후작님.”

    “제 이름을 아실 줄은 몰랐는데, 가보트가 말해 주던가요?”

    줄리안 미네르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사근사근히 눈을 휘었다.

    “처음 뵙네요, 줄리안 미네르바라고 합니다. 가보트도 오랜만이네.”

    누가 봐도 호의 어린 태도였지만 속내를 아는 입장에선 글쎄.

    가보트는 굳었고 나는 웃었다.

    의무처럼 끌려온 무도회장에서 원로회의 끄나풀─추정─을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줄리안. 너도 잘 지냈냐?”

    “늘 똑같지. 아, 데이디어도 같이 왔어. 네게서 답신이 안 온다고 속상해하더라.”

    가보트는 어떻게 답하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난 그냥 웃었는데 가보트가 벌써 졌어!

    미뉴엣에게 따지고 싶다.

    우리의 주위를 둘러싼 이들이 새로운 먹잇감의 등장에 환호했다.

    “세상에, 미네르바 소후작님 아니세요?”

    “그러고 보니 가보트 공자님의 동기셨죠.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저는─.”

    “네, 반갑습니다. 그런데…….”

    줄리안이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래간만에 보는 친구와 할 이야기가 많네요. 괜찮다면 양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얼굴은 웃는데 기세는 단호하다.

    그 와중에도 버티려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한둘이 빠지자 우르르 물러났다.

    주위가 시원해졌다.

    음.

    이 사람, 좋은 사람일지도.

    “힘드시죠? 호의라고 해도 사람들의 관심이란 게 마냥 가볍지는 않잖아요.”

    진짜 좋은 사람 같은데.

    “아, 혹시 제가 괜한 일을 한 건가요?”

    “그럴 리가요. 좀 부담스러운 차였어요, 소후작님.”

    “그냥 줄리안이라고 불러 주세요. 가보트의 가족이면 딱히 남도 아니니까.”

    “그래요, 줄리안.”

    가보트는 이견이 있어 보였지만 이름이 편하다.

    부르라고 있는 게 이름 아닌가.

    “실은 여러모로 놀랐어요. 가보트한테 새 누이가 생겼다질 않나.”

    “그…….”

    “그 누이와 화이트데저트 공작 사이에 혼담이 오간다질 않나.”

    야, 좋게 평가한 지 30초 됐다.

    “조금 염려했어요. 저희가 봐 온 공작전하께서 워낙 성격이 분명한 분이셔서요.”

    “아하, 저희가 봐 온…….”

    “그래도 소문이 좋아 다행이에요. 시오라에겐 오지랖처럼 느껴지시겠지만.”

    “줄리안은 소문을 잘 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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