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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6화 (16/162)
  • 16화

    좋아, 집중하자!

    할 수 있다.

    “위대하고 지혜로운 페불라시여, 그대의 종이 감히 바랍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새하얀 빛이 풀려난다.

    “종말에 새로운 구원을 가져오소서. 결말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소서.”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고위급 주문.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다른 것들과는 시작부터 달랐다.

    폭포같이 거대한 물살이 엉성하게 기운 육체를 헤집고 파괴하며 넘쳐 나온다.

    내 것이 아닌 몸이 비명을 질러 댔으나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

    “어둠에 잠긴 이들에게 빛으로 향하는 길을 제시하소서.”

    폭력적으로 길을 연 광휘가 마침내 손끝에서 터졌다.

    남의 뜻대로 조각되고 있는 생명체를 뒤덮었다.

    “단 하나의 신도가 바라나이다.”

    ─페불라 신학 10주문. 역행retrogression.

    책의 낱장이 돌아간다.

    이전으로, 이전으로, 이전으로.

    영혼을 착취당하던 생명체, 굳어 가던 성력이 자유를 되찾고 유리관이 녹아내린다.

    그 안에 담겨 있던 담녹색 액체들이 진득하게 흘러 마법진을 지우고 삼켰다.

    그리하여 빛이 꺼졌을 때는, 그 자리에 있는 모든 것이 온전해졌다.

    이것은 나의 신의 권능.

    이야기의 신, 페불라가 내려 준 기적.

    ……이긴 한데.

    “허억!”

    신전 밖에서 10주문이라니!

    허약한 남의 몸으로 이런 짓은 말았어야 했는데.

    “죽을 것 같아…….”

    무릎을 꿇고 있을 기력도 없어 나는 드러누웠다.

    배 안쪽부터 온몸이 나를 쥐어짜며 소리쳤다.

    ‘미쳤어! 남의 몸에서 무슨 행패야?’

    비유하자면 10인용 배에 잠깐 천 명이 머무르고 갔다고 할 수 있겠다.

    며칠간 쉬어야 할 게 뻔했고, 이 몸과 영혼의 괴리도 심해졌을 것이다.

    괜히 했나?

    계시가 왔대도 적당히 뭉갤걸.

    쓸데없이 신수들의 감정이 흘러들어 오는 바람에 오버해서는.

    삐익.

    문득 가까이에서 소리가 들렸다.

    웬 병아린가 하고 고개를 돌렸더니 겨울 살쾡이가 다가와 있었다.

    조각상 같은 알갱이 더미가 아닌 온전한 모습으로, 새끼 신수가 내 손에 뺨을 비볐다.

    서늘했다. 그래서 생생했고.

    음.

    “……미안.”

    그래, 죽인 걸 후회하면 몰라도 살린 걸 후회하면 안 되지.

    아무리 내가 불량 성직자라고 해도 옳은 일을 한 거니까.

    비록 몸은 죽을 것같이 아파도 진짜 죽은 것도 아닌데 뭐.

    나는 손가락만 움직여 신수의 등을 살살 쓸어 주었다.

    “뭘…… 한 거예요.”

    위에서 무거운 물음이 울렸다.

    크루엘로였다.

    지금 길게 대화하기도 싫은데.

    머리가 몽롱하고 몸에 힘이 없어서 나는 짤막하게 답했다.

    “글쎄요.”

    “죽은 생명체를 부활시킨 거예요?”

    “당연히 아니죠.”

    부활이라니 터무니없다.

    내가 한 걸 굳이 말하자면.

    “상태를 되돌린 거예요. 얼음을 물로 되돌리는 것처럼 재료가 다 있어야 해요.”

    “부활과 뭐가 다른데요.”

    “그건 사라진 영혼까지 해결해야 하잖아요.”

    신의 권능을 극한까지 발휘하면 부활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신도에게 그 정도의 기적은 주어지지 않는다.

    내 원래 몸으로도 그건 안 된다.

    차라리 신에게 해 달라고 애걸해야겠지만, 어지간한 대의 없이는 안 해 주겠지.

    “그야말로 신의 영역이니까요.”

    아, 이제 못 버티겠다.

    의지와 상관없이 눈이 감긴다.

    여기서 잠들어도 크루엘로가 적당히 수습해 주겠지?

    그래도 원로회 편은 아닌 걸 알았으니 아주 약간은 마음이 놓였다.

    “흐아암, 그런데 왜요.”

    나는 가물가물한 눈을 들어 크루엘로를 보았다.

    “살려 달라고 빌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아니요.”

    “그럼…….”

    그리고 그쯤에서 전등의 불을 끈 것처럼 의식이 꺼졌다.

    새까만 안식이 찾아왔다.

    크루엘로가 잠든 이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신한테 소원을 빌지 않아요.”

    신에게 빌어 뭔가가 잘된 적이 없었으니까.

    그는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쓸고는 조그만 적의를 내려다봤다.

    겨울 살쾡이가 털을 곤두세우고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너무도 생동감 넘치는 모습에 헛웃음이 터진다.

    “분명히 베아티투도로 변했었는데 말이야.”

    베아티투도.

    달리 기적이라 불리는 이 물건은, 시오라의 말대로 성력을 형체화시켜 만들어졌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재료는 고대의 성력이다.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고대인들의 믿음은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 가 고대의 신과 신수, 정령을 만들어 냈다.

    그 원초적인 신성만이 베아티투도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물건은 마나 밀도를 말도 안 되게 드높이거나,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한 일을 일으키는 에너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 물건으로조차 신수를 생전으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건 말하자면 또 다른 형태의 죽음이었다.

    이미 가죽이 벗겨진 늑대가 되살아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데 어떻게?

    이걸 정말로 부활이 아니라 할 수 있나.

    강박적으로 떠오르는 질문의 연쇄.

    “……그만.”

    크루엘로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저도 안다.

    부활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시오라 보네티의 행적이 너무도 기이해서 착각했을 뿐이다.

    그는 시오라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정말 신전 측에서 나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유인했다.

    신관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이 마법진에 반응할 테니까.

    하나 튀어나온 건 예상 밖의 이름.

    “페불라라…….”

    고대 신학에서 어렴풋이 본 적 있던 울림이다.

    다 잊힌 신에게 그렇게 거대한 힘이 남아 있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복잡해졌지만 외려 개운해진 부분도 있었다.

    원로회도 신전도 아니다.

    당연하게 여겼던 추측이 모조리 박살 나는 게 이상하게 시원했다.

    뺙.

    마침내 용기를 낸 건지 겨울 살쾡이가 달려들었다.

    크루엘로를 물리치려는 듯 손등을 힘껏 물었지만, 간지럽지도 않다.

    그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새끼 신수는 손쉽게 잠들었다.

    아직 새끼였으니 마법 저항력도 약하겠지.

    그는 서서히 깨어나고 있는 다른 신수들을 둘러보았다.

    뭐.

    “신전에 신고해 뒀으니 알아서들 수습하겠지.”

    크루엘로는 공간을 잇는 게이트를 열었다.

    시오라를 품에 안은 이가 자리를 빠져나갔다.

    신전의 성기사들이 들이닥친 건 그 직후였다.

    ***

    반짝,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시야에 들어오는 건 검푸른 어둠이 내린 천장.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데자뷔가 느껴지는데.”

    세상에 이게 사람 목소리야?

    성대에 쇠를 달아 놨나, 내가 말하고도 깜짝 놀랐다.

    설마 또 죽고 새 몸에서 깨어난 건 아니겠지?

    그러면 세계는 이미 멸망한 건가?

    “깨어나셨어요, 아가씨?”

    바로 옆에서 음산한 소리가 울렸다.

    유령!

    “으아악!”

    소리가 난 쪽으로 베개를 집어 던지자 무언가 맞는 소리가 났다.

    맞았어? 사람?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베, 베티?”

    “네, 시오라 아가씨. 베티 플록스입니다.”

    “불도 안 켜고 거기서 뭐 해?”

    “주무시는 데 방해가 될까 해서요. 등을 켤까요?”

    “얼른 켜.”

    곧 침실이 환해졌다.

    베티는 베개에 맞아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그녀의 퀭한 얼굴을 보고 나는 쭈그러들어 사과했다.

    “유령인 줄 알았어.”

    “세상에 유령은 없어요, 아가씨.”

    “있어.”

    “밴시는 유령이 아니라 몬스터예요.”

    “아니, 밴시가 아니라……. 됐어, 그보다 왜 여기에 있었어?”

    “아가씨께서 아프신데 전속 시녀가 곁을 지켜야지요.”

    “네가 내 전속 시녀야?”

    어쩐지 요즘 베티만 오더라.

    세작을 이렇게 대놓고 심다니 너무하게 노골적이다.

    간병이 아니라 감시였다고 생각하자 미안한 마음이 싹 사라졌다.

    “나 어떻게 들어왔어?”

    “공작전하께 안겨서 들어오셨어요.”

    “윽.”

    “찬바람을 많이 쐬셔서 감기에 걸리신 것 같다는데 꼬박 이틀을 주무실 줄은 몰랐어요.”

    그렇게 변명했군.

    남의 몸으로 성력을 과다 사용한 부작용일 뿐인데……. 잠깐.

    “내가 이틀을 잤다고?”

    “정확히는 47시간 3분 18초가 지나가고 있네요.”

    “허…….”

    “신관님이 다녀가셨는데 몸에는 큰 이상이 없으시대요. 일단 식사를 가져오겠습니다.”

    베티가 나가는 걸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성력을 많이 쓰면 안 좋다는 건 알았지만 전보다 반동이 큰데?

    괜히 더 몸이 안 좋게 느껴졌다.

    으슬으슬, 한기가 치밀어서 나는 이불을 끌어와 몸을 꽁꽁 싸맸다.

    아픈 건 에이미 때가 마지막이었나.

    비가로 살 땐…… 일이 너무 바빠서 아플 겨를도 없던 것 같다.

    그 큰 저택에서 거의 나만 일했으니까.

    빙의 사기 아닌가? 크루엘로와 같은 저택에만 넣어 놓으면 다냐고.

    하늘 쪽을 슬그머니 노려보자 우르릉 천둥이 쳤다.

    잽싸게 눈을 깔았다.

    페불라시여,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

    그 후로 나는 일주일간 더 앓았다.

    열도 나고 체력도 떨어지고 이러쿵저러쿵.

    육체와 영혼의 괴리가 커져서 그랬지만, 다행히 좋아지긴 했다.

    그리하여 오늘.

    “안녕하세요, 시오라 아가씨. 오늘은 안색이 좋아 보이시네요.”

    베티가 웃으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응, 거의 다 나은 거 같아.”

    “잘됐네요.”

    나도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러자마자 쿵!

    산더미 같은 초대장이 앞에 쌓였다.

    이걸 어떻게 들고 온 걸까, 베티의 근력이 궁금해졌다.

    나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물었다.

    “파티에 왔던 손님들?”

    “아니요.”

    “그러면?”

    “공작전하께서 시오라 아가씨를 안고 오신 이후로 초대장이 많이 왔어요.”

    음. 나는 멀뚱히 눈을 깜박거렸다.

    화이트데저트 공작에게 안긴 감상이라도 말해 달라는 건가?

    그 품이 얼마나 넓었는지 그런 거?

    어둠의 크루엘로 팬 모임?

    “인형 극장 이후로는 보네티가 비리로 공격받은 적도 없고요.”

    “베티, 너 참 과감하다.”

    “가끔 실언한다고 지적받아요. 하지만 시오라 아가씨께서는 비밀로 해 주실 걸 아니까요.”

    이게 신뢰의 표현일까, 아니면 내 인맥이 없다고 먹이는 걸까.

    배배 꼬인 시오라 보네티는 나중의 복수를 계획했다.

    “전하께서 시오라 아가씨에게 빠졌다는 소문이 자자해요.”

    콜록, 헛기침이 나왔다.

    그거 진짜 통했어?

    사람들한테 침실에 숨겨 둔 결혼 계약서를 보여 주고 싶다.

    이혼 항목을 보여 주면 뭐라고 할까.

    아니지, 어쩜 그것도 사랑의 증거라고 생각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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