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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5화 (15/162)
  • 15화

    “아, 지루해, 지루해, 지루해.”

    경박한 하이 톤의 목소리.

    웬 여자가 눌어붙은 치즈처럼 말을 늘이고 있었다.

    “10원로야, 잠도 못 자고 지루해 죽겠다. 이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냐?”

    10원로?

    원로회는 어지간한 고위 가문엔 다 있었지만…….

    나는 크루엘로의 표정을 보고 싶었으나 보이는 건 너른 등뿐이었다.

    “20분도 채 안 남았습니다. 그리고 바깥에서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아,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하나하나 따지고 들지 마.”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낮추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틈새로 두 사람이 보였다.

    그들의 외형적인 특징이 너무도 분명해서, 나는 반사적으로 〈운명〉을 떠올렸다.

    하나는 신경질적인 목소리의 여성.

    못해도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이의 머리칼은 목덜미에 닿을 만치 짧은 주황빛이다.

    「9원로, 큐딜의 언행은 뒷골목 건달과 다름없었다. 그녀는 화이트데저트의 상단을 운영했는데 불법 물품을 다루길 서슴지 않았다. 수도와 공작령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안 그래도 언제 추적자가 올지 모릅니다. 자칫 정보가 새 나가면 위에서도 가만히 있으시진 않을 겁니다.”

    “지랄하네. 윗선이 네 무기냐? 나야말로 네 윗대가리야.”

    그 앞에 있는 남성은 족히 2m에 근접한 거인이다.

    가면을 써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나 덩치가 곰같이 커다랬고 뻣뻣한 흑발이 가면 위를 덮고 있었다.

    「10원로, 아레스는 가장 젊은 원로였는데 순수한 완력으로도 돌을 부술 만큼 강건했다. 또한 덩치가 믿기지 않도록 몹시 은밀했기에 물밑에서 많은 이들을 암살했다.」

    분명히 화이트데저트의 원로회다.

    둘 다 최정상은 아니었으나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힘 있는 인물이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과잉 해석하지 마십시오. 저는…….”

    돌연 10원로, 아레스가 상체를 크게 움직였다.

    날붙이가 위로 날아들었다.

    천장을 뚫고 이쪽으로.

    내 바로 눈앞까지!

    콰득.

    너무 가까워 형체의 초점조차 잡히지 않았으나 곧 형태가 선명해졌다.

    단검…… 이었다.

    “후.”

    나는 가늘게 심호흡했다.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고, 천장의 틈새로 피가 떨어지지도 않았다.

    일차적으로는 내가 빠르게 반응한 덕이었고 이차적으로는 크루엘로가 나를 잡아당긴 덕이다.

    그 좁은 곳에서 어떻게 몸을 돌렸는지 용케도 나는 그의 품 안에 있었다.

    놀라라.

    “뭐 하냐?”

    “……아닙니다, 느낌이 안 좋아서.”

    “난 또 네 무력이라도 과시하는 줄 알았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예민 떨지 말고 자리나 지켜. 감지 마법을 둘둘 말았는데 쥐새끼가 들어오면 모르겠냐?”

    쥐보다 큰 게 둘 들어와 있습니다만.

    나는 곁눈질로 크루엘로를 살폈다.

    잠입에 있어서 내가 뭘 하지는 않았으니 들키지 않는 건 크루엘로의 마법 덕일 터.

    솜씨가 좋은 거야 〈운명〉만 보고도 알았지만, 왜 그렇게까지 해서 여기에 들어온 걸까.

    의문이 또 하나 쌓였다.

    “지루한데 기분까지 잡쳤네. 야, 나 그냥 간다.”

    “상단주님.”

    “네가 처리해. 애당초 내 일은 다 했고 원래 담당자는 저택에 처박혀 있는데 나만 전전긍긍하는 게 무슨 우스운 꼴이야?”

    “상단주님께서 위임받으신 일입니다. 명령 위반은 중죄입니다.”

    “어, 꼰질러.”

    큐딜은 귀를 후비적거리며 바깥쪽으로 향했다.

    아레스가 몇 번 그녀를 불렀으나 들은 척하지도 않았고 곧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홀로 남겨진 사내가 으득 이를 갈았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아레스가 시계를 흘긋 살폈다.

    그러더니 안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시야를 벗어나는 걸 보며 나는 초조해졌다.

    원로가 둘이나 있는데 붙잡아 심문조차 못 한다고?

    아까 크루엘로가 오기 전에 감옥에서 탈출할걸.

    그랬으면 뭐라도 해 볼 수 있었을 텐데.

    뒤늦게 후회가 일었다.

    “표정이 왜 그래요?”

    크루엘로가 속삭여 물었다.

    아차, 아직 안겨 있는 상태였지.

    고개를 돌리자 생각한 것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눈은 아주 이상했다.

    사람이 아닌 사물을 바라보는 듯 열이 없고, 그 대신 차오른 건…… 기묘한 호기심.

    “‘저걸 놓치면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닌데요.”

    “두 사람을 알아요?”

    “전하는요. 아세요?”

    마른침을 넘기며 반문하자 크루엘로가 웃었다.

    아름답게 꾸며진 표정은 꼭 천사 같았으나 그만큼 인위적이다.

    그가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몰라요.”

    “거짓─.”

    “그러니까. 거짓말을 하면 바로 티가 나잖아. 그런데 왜 모르는 척하지?”

    크루엘로가 고개를 기웃거렸다.

    그러며 내 어깨에 묻은 먼지를 느리게 털어 냈다.

    “칼이 날아들었는데 겁도 안 먹고 움직임도 이상하게 재빨랐고.”

    “…….”

    “달링은─.”

    그때.

    우우웅, 묵직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그 근원지에서 느껴지는 건 마나의 파동이었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설 만큼이나 커다란 힘.

    처음에도 강렬했으나 1초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대체 뭘 하는 거지? 이 정도면.

    “수도 사람들도 느낄 텐데.”

    나는 위쪽을 힐금 올려다봤다.

    그러다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수도에는 지금 거대한 마법진이 가동 중이다.

    불꽃놀이는 마법으로 펼치는 공연이었고 그만큼이나 마나의 유동이 활발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일부러 이날을 골랐다.

    등잔 밑에서 수작질을 부리기 위해.

    “여기서 내려가는 통로는─!”

    “쉿.”

    크루엘로가 입가에 검지를 댄 순간, 아래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났다.

    다시, 아레스였다.

    무슨 장치를 작동시키고 나왔는지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군인같이 절도 있고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겨우 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도 강도를 더해 간 파동은 이제 내 속까지 뒤흔들었다.

    불길한 예감이 극에 달했다.

    크루엘로의 앞에서 이러고 싶진 않았지만.

    “비켜 봐요.”

    나는 크루엘로를 밀치고 천장의 틈새를 걷어차 부쉈다.

    드러난 공간으로 뛰어내려 가볍게 착지, 아레스가 나왔던 방향으로 달려가자 거대한 문이 보였다.

    문에는 홈이 나 있었는데 그 부분을 중심으로 복잡한 마법이 느껴졌다.

    크루엘로의 앞에서 주문까지 써야 해?

    그 순간 뒤에서 크루엘로가 손을 뻗었고 철컹, 문이 열렸다.

    “뭘 한 거예요?”

    그가 독특한 문양의 패를 보여 주었다.

    저런 건 또 어디서 훔쳤대.

    “큐딜은 허술해서 훔치기 쉽거든요.”

    그가 성큼성큼 나를 지나쳐 걸었다.

    나도 다급히 움직였다.

    문을 넘어가자 답답하고 더운 기운이 확 강해졌다.

    문 너머에 있던 건 기다란 나선형의 계단.

    아래로 내려갈수록 심장이 조여들었다.

    마침내 그 계단을 다 내려갔을 때 바닥과 벽면 전체에 그려진 거대한 마법진이 보였다.

    광장에 있는 것보다 조금 작은, 짙은 적색의 진.

    그 위에는 담녹색 액체로 가득 찬 유리관이 세로로 서 있었다.

    액체에 잠긴 건 신령스러운 생명들.

    “헉.”

    모두가 신수였다.

    나도 모르게 숨을 토해 낸 순간.

    머릿속에 폭풍이 인 것처럼 격렬한 두통이 일었다.

    파도치듯 시야가 일렁였고 곧이어.

    [구원하라.]

    계시가 내려왔다.

    뇌리에 선명하게 신어가 새겨진다.

    수많은 감정이 범람해 쏟아졌다.

    잠들어 있는 신수들의 분노, 슬픔, 절망과 체념.

    내 것이 아닌 고통이었지만 괴로워 눈이 뜨거워졌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나는 홀린 사람처럼 진으로 향했다.

    그리로 들어서기 직전.

    “뭐 해요.”

    크루엘로가 나를 붙잡았다.

    그는 눈가를 찡그리고 있었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저기에 들어가면 얼마나 나빠질지 시험하고 싶어요?”

    “……저게 뭔데요?”

    크루엘로는 당혹스럽고 조금은 화가 난 듯했으나 그 외에는 멀쩡했다.

    신수들은 괴로워했고 나 역시 성력이 들썩거리는데 마법사인 그는 무사했다.

    그래서 이게 성력과 관련된 진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추측건대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이거, 성력을 뽑아내는 진이에요?”

    “…….”

    “내가 이 진에 반응할지 확인하고 싶어서 데려온 거고요?”

    어떻게 안 건지는 몰라도, 그는 나를 신전 측 사람이라 의심했던 걸까?

    크루엘로는 잠시 침묵하다가 긍정했다.

    “……원로회 측 사람이 아닌지 확신이 필요했어요.”

    신전과 연이 닿은 사람이면 원로회와 한편일 리 없으니까.

    이제야 납득이 된다.

    크루엘로가 원로회와 다른 편이라는 확신도 섰다.

    시야를 방해할 정도로 눈물이 차올라서 눈가를 닦아 내자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반대로 크루엘로는 조금 초조해 보였다.

    “일단 나가요. 마법진의 작동을 멈추고 얘기해요.”

    “늦었어요.”

    멈추더라도 저들은 무사할 수 없을 테니까.

    내가 말을 내뱉은 즉시 유리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자 조금은 눈에 익은 동물이 있었다.

    손바닥만큼 작은 연하늘색 고양이.

    겨울 살쾡이는 색을 잃고 얼어붙은 것처럼, 새하얀 알갱이들로 변해 있었다.

    멀리서나마 내가 본 적이 있는 형태였다.

    “저거 베아티투도예요?”

    “……눈이 좋네요.”

    인형 극장에서 게늄 자작이 건네던 밀수품.

    황실과 신전에서 이중으로 금지한다던 그 물건이었다.

    과연 그럴 만했다.

    신수에게서 성력을 뽑아내 굳힌 에너지원.

    인간이 다룰 수 있도록 변형한 신의 힘이 베아티투도였으니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얻을 수도 없겠지.

    깨달은 순간 조소가 나왔다.

    그리고 다시 한번.

    [구원하라.]

    머릿속에 낙인된 글자가 불타올랐다.

    알았어, 알았다고요.

    나는 크루엘로의 손을 뿌리치고 진으로 들어갔다.

    그러자마자 구역감이 치밀었다.

    와, 토할 것 같아.

    얼른 해결하자.

    바로 뒤에 크루엘로가 있는 게 걸렸지만, 신이 시키는데 어쩌겠는가.

    계시가 내려오지 않아도 원로회의 일은 기쁘게 망쳐 주겠지만 어쨌거나 내겐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뭘 하려는 거야.”

    크루엘로의 물음에 나는 답했다.

    “인간의 죄를 되돌려야지.”

    나는 무릎을 꿇었다.

    내 성력을 굳히려 안달이 난 진을 양손으로 짚고 눈을 감았다.

    마법진에 닿아 있는 손이 탈 듯이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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