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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4화 (14/162)

14화

얘가 신수인 걸 어떻게 아냐고?

기억 상실…… 이란 핑계는 미뉴엣만 알고 성력을 느낄 줄 안다는 진실은 털어놓을 수 없다.

다급히 머리를 굴렸다.

“아니, 그, 사전에서 본 것 같아서요.”

우리 신전에는 신수 책이 거의 없었지만─연구가 덜 된 시기였다.─, 바깥엔 그런 사전도 있겠지.

“아하, 사전에 신수의 새끼 때 모습도 실어 주나요? 찾기 어려울 것 같은데.”

“세상에 있는 신수 사전을 다 보셨어요? 지금 저 심문하세요?”

“그러려는 건 아니고.”

크루엘로는 말끝을 늘이며 검지로 턱을 두드렸다.

그러다가 불현듯 좋은 생각이라도 난 것처럼 눈을 휘었다.

불길한데.

“선택지를 두 개 줄게요.”

“……뭔데요.”

“하나, 그 새끼 고양이를 순순히 내게 넘기고 집으로 돌아간다.”

“다음 걸로 할게요.”

“진짜요?”

아무렴 키워드만 봐도 그렇다.

신수. 불법. 크루엘로의 개인적인 용무.

이런 걸 확인하고도 저택에서 한가롭게 잠이나 자면 내 신이 노한다.

내가 위험한 상황이라면 유감스럽게도 졸렬한 선택지를 고르겠지만 그럴 리도 없으니까.

나는 의지를 담아 크루엘로를 쳐다봤고 그는 웃었다.

“후회하지 말아요.”

***

그리고 지금.

“똑바로 들어가!”

시오라 보네티, 20세, 감옥에 갇혔습니다.

“젠장, 제보자가 없었으면 영락없이 망할 뻔했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철문이 닫혔다.

젠장은 네가 아니라 내가 해야지.

나는 눈앞의 쇠창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요약하자면 간단하다.

불법적인 일이 벌어지는 장소를 알아내야 한다.

아무나 붙잡아서 심문하기엔 시간이 없다.

그런데 그 무리가 추적 중인 대상이 있네?

그 대상이 잡혀 들어가면 손쉽게 본거지를 알아낼 수 있겠네?

결론. 크루엘로가 나를 팔아넘겼다.

허허, 허허허.

“더러운 배신자 같으니!”

겨울 살쾡이를 훔쳐 간 사람을 봤다고 신고해 버릴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2번을 골랐겠냐고.

나는 창살에 머리를 박았다. 이마에 냉기가 스며들었다.

수갑에 묶인 두 손도 묵직해서 현실감이 생생히 들었다.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될까.

“죽나?”

그렇더라도 세계가 망하지 내가 망하는 건 아니다.

나야 원래 몸으로 돌아가는 게 전부일 뿐.

인형 극장에서 있던 일 때문에 영 의욕이 안 난다.

원래 몸이라.

남의 몸살이를 너무 오래 했는지 이전 기억이 좀 희미하다.

바깥 시간으로는 12년이 흘렀고, 내가 체감하기론 4, 5년이 흘렀다.

빙의에는 시차가 있다.

이전 몸에서 살다가 죽고 새 몸에 들어갔을 때 나는 곧바로 눈을 뜬 것처럼 느끼지만, 바깥 시간은 그새 몇 년이 흘러 있다.

그러니 지금 몸이 죽고 다음에 눈을 떴을 땐 모든 게 끝나 있을 것이다.

이 몸에서도 시간이 넉넉한 건 아니지만.

“1년도 안 남았잖아.”

구체적으로 날짜를 세어 보니 정말 빠듯하네.

더군다나 거사 날짜가 변동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원로회가 왜 그날을 골랐는지, 꼭 그날이어야 하는지 나는 몰랐으니까.

에휴,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일하자, 일.”

지금부터 수갑 풀기 마술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1번. 성력을 모은다.

2번. 쇠사슬을 끊는다.

3번. 손목에 달라붙은 고리를 뜯어낸다.

“참 쉽죠?”

수갑─이었던 것─의 잔해물을 귀퉁이에 던져 놓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있지도 않았는데 온몸에 서리가 낀 듯 차갑다.

바로 앞에는 자물쇠로 잠긴 쇠창살이 보였지만, 뭐 수갑이랑 다를 거 있나.

힘을 주고 창살을 양옆으로 당겨서 나갈 공간을 만들면…….

끼이익, 바깥쪽 철문이 열렸다.

“…….”

문을 연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붉은색이었다.

음.

“당연히 갇혀 있을 줄 알고 온 건데…….”

그 눈은 나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내려와 창살을 비집고 연 내 손으로 향했다.

이어 한구석에 처박힌 수갑의 잔해물로도 향했다.

다시 나와 눈을 마주쳤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변명했다.

“여기 물건들이 다 불량이네요. 쇠창살이 말랑말랑해요.”

“아, 그래요?”

크루엘로가 성큼성큼 다가와 손등으로 쇠창살을 두드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에 창살이 뚝, 하고 부러졌다.

“맞죠! 불량이죠? 이게 나뭇가지야, 쇠창살이야.”

“그러게요. 겨우 코끼리가 미는 힘 정도에 부러지다니 창살이 심각하게 약하네요.”

나쁜 자식.

“아, 그래요. 나 힘세요.”

“힘이 센 정도가 아닌데요. 마나를 못 다루는 사람이 이게 되나?”

“되니까 됐겠죠.”

“그러고 보니 인형 극장에서 말도 안 했는데 마도구의 존재를 눈치챘던가.”

“아닌데요. 뭐가 반짝거려서 본 건데요?”

“품 안에 있는 게 반짝거렸다고요?”

“딴지 걸러 왔어요?”

“그건 아니니까 뭐, 좋아요, 자립적인 게 나쁜 건 아니죠.”

크루엘로가 창살을 마저 비틀어 열고 날 부축하려는 듯 손을 뻗었다.

화제가 바뀐 게 반가워 나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나 그러자마자 몸 안에 마나가 밀려들어 왔다.

이놈이?

“진짜 마나가 없네.”

당연하다. 성력은 내 영혼에 잠겨 있으니까.

크루엘로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웃거렸다.

“와, 그새 탐색하려고 붙잡은 거예요? 성격 진짜.”

“아무튼 재밌는 걸 알아 왔어요.”

“티 나게 말 돌리지 말아요, 얼마나 재밌는 걸 알아 왔든…….”

나는 말을 다 맺을 수가 없었다.

크루엘로가 감옥 한 귀퉁이로 가더니 천장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미쳤나 싶어 눈을 가늘게 뜨는데 놀랍게도.

“처, 천장이!”

블록이 열리고 사람 키만 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밀 통로인가?

“재밌겠죠?”

크루엘로가 샐쭉 웃는 건 얄미웠지만,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재빠르게 천장이 열린 곳으로 향했다.

신이 나서 곧바로 올라가려다가 멈칫했다.

천장까지 높이는 2m쯤, 난 조금 전 의심받았으니까 역시.

“못 올라가겠는데 올려 줘요.”

이럴 땐 약한 척을 해야지.

“이제 와서?”

“아니면 사다리라도 가져다주시든가요.”

“……거짓말인 게 뻔하지만.”

크루엘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그러더니 불쑥 나를 들어 올렸다.

한 손으로는 등허리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오금을 받쳐서.

짐짝처럼 들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내 사랑을 위해 속아 줄게요.”

크루엘로가 훌쩍 위로 뛰어올랐다.

심장 터지는 줄 알았네!

***

“……세 뿔 순록 수컷 셋, 겨울 살쾡이 암수 두 쌍에 새끼까지 준비 마쳤습니다.”

시오라와 크루엘로가 숨어든 건물의 지하 3층.

가장 안쪽의 집무실에서, 중년 여성 하나가 의자에 눕다시피 기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큐딜, 화이트데저트의 9원로이며 신수의 성력을 뽑아내는 일의 총책임자였다.

큐딜의 손에서 만년필이 떨어질락 말락 흔들거렸다.

“허이고야, 새끼는 좀 빼지. 그걸 또 부득부득 주워 와 가지고.”

큐딜이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보고하는 이는 10원로인 아레스였다.

“인마, 걔 내가 놔줬다. 아니면 그 밤톨만 한 게 어떻게 도망가냐?”

“위에서 지시한 사항입니다.”

“위에서 까란다고 다 까지 말고 생각을 좀 해. 새끼까지 주워 말리면 나중에는 신수를 어디서 구할래? 꼴에 강제로 교배도 안 되는 놈들인데.”

“다음에 건의해 보십시오.”

“진짜 말 이쁘게 해? 응?”

“큰일 났습니다!”

그때 그들의 부하가 소리를 높이며 뛰어 들어왔다.

“야, 쟤 봐.”

큐딜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턱을 까딱였고 아레스가 곧바로 움직였다.

“겨울─. 컥!”

“절차도 없이 들어와선 안 된다고 교육받지 못 했나 보군.”

“죄, 송, 급, 윽, 급하게 보고드릴 일이…….”

“어떤 상황이라도 마찬가지이다. 네가─.”

“야, 됐어. 잠깐 놔 봐.”

아레스는 눈썹을 까딱했다가 손을 풀었다.

부하는 바닥에 쓰러져 숨을 헐떡였고 큐딜은 그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녀가 부하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

“뭔데, 친구야. 숨을 쉬게 해 줬으면 말을 해야지.”

“네, 네! 감옥, 에 헉 가둬 둔, 도둑이, 헉, 사라졌습니다!”

“뭔 소리래. 아는 거 있냐, 아레스?”

“겨울 살쾡이를 훔쳐 갔던 도둑 말입니다. 제보 받고 감옥에 가둬 뒀다고 들었습니다. 보고 올렸을 텐데요.”

“씁, 아까 베고 잔 서류가 그건가? 그래서 제보자는 냅뒀냐?”

“제보만 받고 처리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러면서 도둑은 왜 살려 둬. 진작 죽였어야지.”

하여튼 고지식한 놈들.

큐딜은 길게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효, 신수 납품도 끝났는데 내가 왜 이 지랄을 하는지.”

“바, 로 추적을 붙였으니 멀리 가지는…….”

“됐어, 이 친구야. 그새 빠져나간 거 보면 작정하고 들어온 놈 같은데 퍽도 잡겠다.”

그녀가 아레스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가자. 준비되는 대로 바로 말리고 빠져야지, 황실 기사단 오면 골치 아파진다.”

“예, 상단주님.”

그들이 집무실을 나섰다.

***

낑꿍낑깡.

이것은 철판을 밟는 소리다.

비밀 통로를 이따위로 만들다니 그냥 들어왔다간 단번에 들켰겠다.

크루엘로의 마도구─다시 착용했다─ 덕에 다행히 이 요란한 굉음이 새어 나가지는 않았다.

소리 외에도 현실은 로망과 너무 달랐다.

감옥은 지하에 있었고 우리가 향할 곳은 그보다도 더 아래쪽이었다.

그래서 중간중간 통로에서 나왔다가 다음 통로로 갈아타야 했는데 갈수록 환경이 엉망이었다.

춥고 먼지 냄새가 심하고 좁았다.

너비는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정도에 높이는 내 키보다 조금 큰 정도?

덕분에 앞선 크루엘로는 고개를 수그린 채 걸었고 뒤를 돌아보기도 힘들어 보였다.

아니지, 이건 장점인가.

나는 뒤돌지 못하는 이에게 말을 건넸다.

“저, 수확제에 데려오신 거요.”

“네.”

“그냥 소문내러 오신 게 다예요?”

“달리 뭐가 있겠어요.”

“혹시 아까 겨울 살쾡이한테 살기라도 뿌리셨나 해서.”

타이밍 좋게 살쾡이가 내 품에 들어온 게 생각할수록 이상하단 말이야.

떠보듯 한 질문에 크루엘로가 멈칫했다.

나는 그의 등을 찌르며 재촉했다.

“뭐 하는 거예요, 멈추지 말고 움직여요.”

“……내가요? 어째서.”

“이 일에 연관되게 하려고?”

“그렇게 해서 뭘 얻는데요.”

“나야 모르죠!”

나는 당당히 말했다.

크루엘로에게 개인적인 용무가 있고 그걸 나한테 들키기 싫었다면 좀 더 철저하게 움직였을 거란 추측이다.

우연히 도망간 겨울 살쾡이를 만나고 그 고양이가 내 품에 뛰어 들어왔다.

이것보다는 큰 그림이 따로 있었다는 게 더 자연스럽잖아?

“달링은 왜 그렇게 대책이 없어요?”

“그 외의 부분이 다 완벽하니까요. 이 정도 인간미는 있어 줘야─.”

“그러다 애먼 데서 죽으면 어떡하려고.”

크루엘로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장소 때문인지 음산하게 들렸다.

음.

겁먹지는 않았다.

─속으로─누누이 말했지만, 내가 죽는다고 해 봐야.

“그러면 세계가 망하겠죠.”

“아직도 그 얘기예요?”

“진짜로요. 전 손해 볼 거 없답니다.”

“그걸─.”

크루엘로가 순간적으로 말을 멈추었다.

통로 아래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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