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마리오네트-13화 (13/162)

13화

“마믹이 누군데요.”

“레카논 교단의 마지막 정통? 이단을 편입하기 위해서 신전에서 영입한 여자예요. 말로는 성녀라고 칭송하지만, 실권은 없죠.”

어쩐지 성수가 말도 안 되게 묽더라니 사방에서 이용당하는 상징물이구나.

속이 쓰렸다.

고대 신의 교단들이 이단 취급을 받는 건 알았지만, 직접 목격하기는 처음이었다.

이런 취급을 받으며 세계를 구해야 하다니.

에이, 기분 나빠. 나는 몸에 들어간 힘을 조금 뺐다.

“다음은 어디로 가실 거예요?”

다음으로 향한 곳은 광장이었다.

가을임에도 내리쬐는 햇빛이 강렬한 오후 3시, 한쪽엔 악단이 있고 그 밖에도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특이하게도 그들은 전부 가면을 쓴 채였다.

“가면무도회예요?”

“비슷하죠. 안 쓰고 오면 눈치를 주거든요.”

“아까부터 느꼈는데 왜 이렇게 수확제를 잘 아세요?”

“볼 일이 많았어요. 제대로 즐기긴 처음이지만.”

“그러면 진작 오시지, 왜 이제 와서?”

“혼자 오고 싶던 건 아니라서.”

“나중에 우리 어른이 되면 같이 수확제에 가자, 에이미.”

반사적으로 어릴 때 한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겠지?

에이미가 죽은 게 언젠데 설마.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궁정 악단보다 장엄한 맛은 덜했지만, 동화적인 음색이 몽롱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고 보니 민요를 제대로 듣는 것도 처음이네.

음유시인이 입을 열었다.

[나는 마리오네트.]

“그럼.”

크루엘로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가면 안의 눈에 햇빛이 고여 예쁜 보석처럼 반짝였다.

“한 곡 추실래요, 레이디?”

“어……. 민속춤은 출 줄 모르는데요.”

뭘 하는지도 모르고 따라왔을 뿐인데 알 리가 없다.

얼마 전 사교춤을 복습했다고 해도, 민속춤과는 완전히 다른 분야였다.

“어렵진 않아요, 실수해도 상관없고.”

“음.”

“그러라고 가면을 쓴 거니까요.”

“뭐, 그러면…….”

나는 말끝을 흐리며 슬그머니 크루엘로의 손을 잡았다.

솔직히 재미있을 것 같았다.

몸을 움직이는 건 대체로 좋아하는 편이고 사교춤도 재미있었으니까.

이 김에 크루엘로의 발이나 실컷 밟아야지.

[나는 마리오네트. 무엇이든 될 수 있다네.]

마침 노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크루엘로의 리드를 따라, 곁눈질로 다른 사람들의 춤을 훔쳐보며 엉성하게 몸을 움직였다.

진짜 마리오네트처럼 어설픈 내 모습이 웃기다.

[유리구두를 신은 공주도 용을 무찌르는 용사도 대륙을 다 가진 황제도.]

[인형사의 명령대로 보는 이의 기대대로 무엇이든 된다네.]

“앗, 죄송.”

발을 밟은 걸 사과하며 나는 실수인 척 한 번 더 밟았다.

크루엘로의 눈이 가늘어졌지만 모르는 척.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증오도, 무엇이든 된다네.]

[두근두근 들뜬 꼬마를 설레게 하고 유치하다고 깔보던 어른의 콧대를 꺾어 준다네.]

경쾌한 리듬이 생각보다 즐거웠다.

“첫 춤은 무도회장에서 출 줄 알았는데 이것도 나쁘지 않네요.”

“이쪽이 더 재밌을 것 같은데요.”

“아직 안 춰 봤잖아요.”

“그건 그런데……. 푸흡!”

“왜 웃어요?”

나는 크루엘로의 어깨 너머를 봤다가 서둘러 눈을 돌렸다.

멧돼지랑 사자가 춤추고 있다.

아까 본 그 가면이다.

별것도 아닌데 분위기 때문인가, 왜 이렇게 웃긴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나는 마리오네트.]

[하지만.]

[뎅뎅뎅, 오늘도 종이 울려 버렸어. 12시가 되었다.]

[공주의 구두도 용사의 검도 황제의 관도 녹아내릴 시간이야.]

[꼬마도 어른도 모두가 돌아가네. 나도 캄캄한 상자 속으로 돌아가네.]

여유를 되찾고 리듬을 따라 부르다가 눈을 찡그렸다.

“노래 가사가 묘하게 음침하네요.”

“그래요?”

[음음음. 어둠에 갇힌 나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네.]

“들어 봐요, 저─.”

갑자기 크루엘로가 내 몸을 확 끌어당겼다.

춤의 한 동작인 듯했지만 그럼에도 갑작스러웠다.

서로 가면을 쓰지 않았더라면 피부가 스쳤을 수도 있는 가까운 거리.

가면이 만들어 낸 그림자 사이에서 크루엘로의 눈이 선명히 빛났다.

“난 마음에 드는데.”

“갑자기…….”

“줄에 묶여 움직이지 못하는 신세라네.”

[줄에 묶여 움직이지 못하는 신세라네.]

크루엘로가 즐거운 투로 흥얼거렸다.

음유시인의 노랫소리와 그의 목소리가 한데 겹쳤다.

“사실 비슷한 처지거든요.”

“…….”

“달링은 안 그런가요?”

[무엇도 될 수 없는 가엾은 나무토막. 손가락도 까딱할 수 없는 배역 잃은 그림자.]

크루엘로의 말이 의미심장했다.

뭘 알고 하는 말일까?

즐거웠던 온기가 싹 빠져나가고 가슴 안쪽이 식었다.

원로회에서는 크루엘로를 제대로 쓰기 위해 그를 세뇌했다.

이전의 삶에서 나는 그의 세뇌를 풀어 주었지만, 그에게 제대로 설명해 준 적은 없었다.

세뇌도 모리온도 화이트데저트가 어떻게 생겨난 가문인지조차.

자칫 원로회에 내 행적이 흘러들어 가면 난도는 걷잡을 수 없이 올라갈 테니까.

하지만 내가 말해 주지 않는다고 영영 모를 일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아이는 자란다.

소년은 생각하고 청년은 행동한다.

〈운명〉의 이야기만으로 나는 크루엘로를 재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오. 12시는 매일매일 있다네. 쓰러질 시간은 매일매일 온다네.]

[해가 뜨면 나는 다시 눈을 뜨고 무엇이든 된다네.]

[나는 마리오네트. 무엇이든 될 수 있다네.]

어느새 손끝이 뻣뻣해졌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자리가 무거우세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결혼에 그런 조건을 다신 것도 그것 때문?”

“비슷해요. 듣기로 제 가문은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했거든요.”

진짜 아나 보네.

머리 아파라.

[배역을 받으면 살아나는 끔찍하고 사랑스러운 마리오네트.]

[줄에 매여 춤추는 가엾고 순종적인 마리오네트.]

[모두의 행복을 위해 내가 있다네.]

“그 목적과 영 상관없는 사람한테 넘기는 게 아예 없애 버리는 것보다 재밌겠더라고요.”

“…….”

“목적이 뭔지 안 물어봐요?”

“별게 있겠어요? 그냥 돈, 힘, 권력 그런 거겠죠.”

[오늘도, 내일도, 매일매일 있다네.]

나는 천연덕스럽게 답하며 가면에 감사했다.

노래가 끝났다.

악단은 연주를 마무리하고 다음 곡을 준비했고, 춤을 추던 사람들도 들뜬 목소리로 담소를 나누었다.

새가 지저귀는 듯한 발랄한 소란 속에서, 나는 가면을 쓴 커다란 사내를 바라봤다.

그는 나를 관찰하듯 물끄러미 보다가 가벼이 말했다.

“달링은 현명하네요.”

아무렴.

***

해가 저물고 하늘에 빽빽하게 별이 떠올랐다.

어느새 하루가 다 지나 축제는 불꽃놀이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그런 때에.

“그럼 이쯤에서 돌아가요.”

크루엘로가 깔끔하게 말했다.

뭐!

“불꽃놀이는요?”

아차, 이게 아닌데.

너무 몰입해서 즐겼나, 멋쩍어져서 나는 입술을 오므려 말았다.

하지만 수확제까지 왔으면 불꽃놀이를 보는 게 맞지 않나?

“불꽃놀이를 보고 싶었어요?”

“음.”

화이트데저트의 나무에서 보는 불꽃놀이도 아름다웠다.

더 가까이서 보면 괜찮은 경험이 될 것 같은데.

오늘이 아니면, 나도 평생 수확제에 올 일은 없을 것이다.

세계 멸망을 저지하면 나고 자란 신전으로 돌아갈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아쉬워서 나는 슬그머니 눈을 굴렸다.

크루엘로가 의외란 듯 눈을 깜박였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곤란해요, 개인적인 일이─.”

“그러니까 놓치는 게 말이 되냐고!”

분에 찬 외침이 크루엘로의 말을 잘라 먹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았다.

제법 외진 골목길, 어렴풋하게 재색 머리의 여자와 덩치 큰 남자가 보였다.

“그게 얼마짜린데 미쳤어? 내가 수면제 정량보다 두 배는 쓰라고 했지?”

“세 배는 썼거든. 왜 나한테 지랄이야, 원래도 약물 면역력이 강한 개첸데 어쩌라고?”

“젠장, 위에서 그딴 변명 신경이나 써 줄 거 같냐?”

여자가 퉤, 바닥에 침을 뱉었다.

“들키면 너나 나나 모가지야. 됐으니 빨리 찾기나 해.”

“알겠으니까 닥쳐. 그래 봐야 덜 자란 겨울 살쾡이야. 근처에 있겠지.”

겨울 살쾡이?

처음 듣는 이름에 의문을 갖던 때.

뺙.

이상한 소리가 발치에서 울렸다.

고개를 수그리자 웬 주먹만 한 고양이가 내 발등으로 꾸물꾸물 올라왔다.

털은 연하늘색이고 이마에 다람쥐 같은 줄무늬가 나 있는 모양새가 어째.

“겨울 살쾡이……?”

“늦었나.”

크루엘로가 중얼거렸다.

그때 골목에서 다투던 이들이 밖으로 나왔다.

이 고양이를 어째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 겨울 살쾡이─추정─가 내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어라, 이것은 간택?

남녀는 재수 없단 듯 땅에 침을 뱉고 사라졌다.

사람 그림자가 멀어질 때까지 우리는 약속한 것처럼 침묵하다가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슴 안쪽에서 조그만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고양이가 많이 놀란 듯했다.

나는 고개를 정면으로 고정한 채 눈만 굴려 크루엘로를 보았다.

“방금 ‘늦었나.’라고 했죠. 이게 개인적인 용건인 거 맞죠?”

“부정해도 안 믿을 거잖아요. 그건 왜 주웠어요.”

“혹시 밤눈이 어두우세요? 제가 주운 게 아니라 알아서 들어온 거잖아요. 그래서 얜 뭐예요?”

“글쎄요.”

슬슬 아까 그 사람들과 멀어진 것 같아서, 나는 걸음을 멈췄다.

품에서 고양이를 꺼내자 그 동물이 내 손바닥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마냥 부드럽다기보단 고드름을 자디잘게 조각한 것처럼 차고 껄끄러웠다.

‘겨울 살쾡이’라는 이름이랑 딱 어울리는데 진짜인……. 잠깐만.

“몬스터라도 되나 보죠.”

“몬스터는 무슨, 신수거든요!”

나는 작게 소리쳤다.

신수를 본 적은 없었지만, 성력이 느껴지는 동물이 신수 말고 뭐가 있겠나.

그런데 그렇다면 더 기이한 일이다.

모든 신수를 신전에서 거두어 돌보는 건 아니지만, 이들을 해하는 건 엄금하고 있다.

이 고양이한테 무슨 일이 있던 걸까.

불법의 냄새가 솔솔 풍겼다.

“달링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크루엘로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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