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마리오네트-12화 (12/162)

12화

따분하다는 목소리가 내 설명을 끊어먹었다.

이놈은 공부 못했을 거야.

크루엘로의 좋은 성적표가 떠오를락 말락 했지만, 나는 빠르게 기억을 흩어 냈다.

착각이야!

“아무튼 알아요. 그런데 그게 왜요.”

“가 봤어요?”

“…….”

“가 봤어요?”

“……칫.”

자기는 가 봤나.

내가 알기론 크루엘로도 간 적이 없었지만, 비가와 시오라 사이에는 4년이 있으니까 장담할 수 없었다.

그 사이에 약혼자도 여덟 번을 갈아치웠는데 무슨 일인들 불가능하겠어.

그런 내 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크루엘로가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같이 갈래요?”

“……왜요?”

“말했잖아요.”

분위기를 만들어 보려 한다고.

***

수확제라.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가 보고 싶은 때도 있었다.

내가 에이미이던 시절에 말이다.

“미안. 에이미. 너 혼자 다녀와도 괜찮은데.”

“됐어. 너 없이 혼자 보면 무슨 소용이야?”

크루엘로의 성장 과정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그렇다.

‘콩이 자라 괴물 호박이 되었다.’

어린 로이는 콩이었다.

순하고 자기주장이 약해 말을 잘 들었다.

저택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어른들의 말에도 순순히 따랐고 당연히 축제를 구경하러 나갈 수도 없었다.

나는 그게 좀 아쉬웠다.

미련이 대단치는 않았지만.

“여기서도 저 정도는 보이는걸.”

우리는 공작저 정원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 올라가 축제를 구경했다.

하늘에서 터지는 오색찬란한 불꽃.

오직 아름다움만을 위해 마법사가 피워 냈다는 찬란한 빛들을.

“로이, 네가 보기엔 어때?”

“정말 예쁜 것 같아.”

“로이?”

“아. ‘같아’가 아니라 예뻐. 가까이서 볼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나중에 보면 되지.”

“그래. 나중에 우리 어른이 되면 같이 수확제에 가자, 에이미.”

로이가 뺨이 달아오른 채로 웃었다.

나는 아이와 함께 웃었지만 그러자고 대답하지는 못했다.

아무 일 없이 시간이 흐른대도 에이미는 어른이 되지 못할 걸 알았으니까.

수확제에 갈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성인의 몸으로, 나는 수확제에 왔다.

귀엽고 깜찍하던 로이는 간데없고 성인 크루엘로와 함께.

“왜 그렇게 봐요?”

“참담해서요.”

그 귀엽던 아이를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원로회 놈들, 만나면 가만두지 않겠다.

크루엘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우리는 후드가 달린 로브만 입고 호위도 없이 단둘이었다.

심지어 인식 방지 마도구도 비활성화해 뒀다.

이유도 말하지 않은 크루엘로의 제의에 나는 주저 없이 응했다.

왜 그랬냐면.

“분위기를 만들어 볼까 해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서.

소문이 나게 해서 혼담을 파할 수 없게 만들려는 거다.

좀 더 직설적으로, 목적은 원로회를 엿 먹이려는 거겠지.

적어도 난 후자 때문에 나왔다.

이런 걸 보면 크루엘로와 원로회는 확실히 틀어진 걸까?

그러면 좋겠는데.

돌연 크루엘로가 걸음을 멈춰서 딱딱한 등에 코를 부딪쳤다.

“말 좀─.”

“저기 달링의 취향과 딱 맞는 가면이 있네요.”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인형 극장에서 썼던 거랑 비슷하지만 가격이 세 배쯤 싸 보이는 가면이 나를 반겼다.

“아니거든요.”

“그러면 뭐가 마음에 들어요?”

답답한데 굳이 가면을 써야 하나. 어차피 소문내러 나온 거면서.

뚱하니 눈만 깜박거리는데 크루엘로가 전시된 가면 하나를 가리켰다.

“사자?”

“오!”

“아니면 양?”

“오…….”

“사슴? 토끼?”

“우…….”

“처음에 본 사자?”

“오!”

“알기 쉬운 건 좋은데 사람 말로 해요.”

크루엘로가 전시된 가면을 들어 내게 건넸다.

가판에 상인은 없었지만, 착용해 봐도 된다고 쓰여 있었으니까.

가면을 쓰고 나는 거울을 들여다봤다.

시오라의 금발이랑 금색 갈기가 아주 잘 어울렸다.

“좋아요. 그러면 제가 전…….”

잠깐만. 전하라고 부르면 안 되겠지?

나는 크루엘로의 팔을 잡아당겨 끌어내리고 소리를 낮춰 물었다.

“뭐라고 불러요?”

“달링, 허니, 자기, 내 사랑. 오아시스?”

“장난하지 말고.”

“장난이라고 생각하니 섭섭하네요. 그러면 적당한 애칭 좀 지어 줄래요?”

“그러면 로이로…….”

아차.

무심코 입에 익은 이름을 꺼냈다가 뒤늦게 실수했다는 걸 알았다.

크루엘로의 얼굴이 굳었다.

후드 때문에 제대로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차게 다물린 입매는 보였다.

요즘 긴장이 너무 풀렸나 봐.

나는 그의 눈치를 살살 살피며 말을 이었다.

“부르면 안 되겠죠?”

“……아니요.”

크루엘로가 입매를 늘여 웃었다.

조금 전의 어둡던 기색은 사라지고 말끔한 웃음이었다.

“마음대로 불러요.”

부를 수 있겠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두 번 다시 실수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그러면 애칭도 정했으니 제 가면 좀 골라 줄래요?”

“어휴, 커플인가? 길쭉길쭉한 게 아주 잘 어울리네 그래!”

가판을 비웠던 상인이 자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내가 쓴 가면을 보고는 전시된 가면들을 살폈다.

“아가씨가 사자를 골랐으니 그러면…… 호랑이는 어때? 아니면 멧돼지?”

“사자와 멧돼지가 무슨 상관이죠.”

“사자면 멧돼지지! 자네는 그 유명한 동화도 모르는가?”

“아주머니, 좀 더 연약한 동물은 없어요? 멧돼지는 세잖아요.”

“엥? 이 청년이 그리 연약한가?”

아니, 좀 연약해졌으면 해서.

초식동물의 탈을 쓰고 있으면 약해질지 어떻게 아는가.

“그러면 이건 어떤가?”

그렇게, 사자와 가젤은 본격적인 축제 구경에 나섰다.

사자는 이론만 빠삭했기에 가젤이 앞장섰다.

처음 도착한 곳은 조그만 박스.

그 앞에는 팻말로 ‘곧 〈인형극 : 모르모로의 희생〉이 공연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인형극엔 안 좋은 추억이 있는데요.”

“그 추억을 씻어 드리려고 왔어요.”

“피로?”

“하하, 농담은.”

내 진심을 매도하다니.

성의 없이 웃은 크루엘로가 의자에 앉아서 나도 떨떠름하게 옆에 앉았다.

그의 말대로긴 했다.

박스의 커튼이 열리고 나온 인형들은 털실을 붙여 놓은 목각인형으로, 아동 대상의 공연인 것 같았다.

속 시커먼 우리가 연극을 보는 건 아이들에게도 실례 아닐까?

심란한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손바닥만 한 인형들이 무대로 쫑쫑 걸어 나왔다.

내레이션이 시작됐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세상엔 지금과 달리 많은 신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착한 신도 있었지만 나쁜 신도 있었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악신이라 불렀습니다.]

[이것은 어느 무시무시한 고대 악신의 이야기입니다.]

삐빅! 고증 오류!

세상에 나쁜 신은 없다.

고대 신의 신도로서 확언할 수 있었다.

일찌감치 김이 새서 자세가 삐딱해졌다.

[악신은 사람들을 홀려 자신을 숭배하게 하고는, 믿음이 생긴 이들을 제물로 삼았습니다.]

[물경 수백에 달하는 이들이 악신에게 희생당했습니다.]

[어디선가, 이러한 악행을 눈치챈 용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분은 바로 레카논의 성자, 모르모로였습니다!]

레카논이라면 나도 안다.

규율의 신의 진명.

내 신과는 사이가 안 좋댔지.

정확히는 교단끼리의 문제였다지만, 수백 년 전의 일이니 별로 관심은 없다.

[성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랜 전쟁 끝에 마침내, 모르모로는 악신의 성자를 쫓아내고 무찔렀습니다.]

[하지만 모르모로도 무사하지는 못했습니다.]

모르모로 인형이 쓰러지고 앞에서 구경하던 아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우는 아이까지 생겼다.

저 조그만 인형에 집중하는 모습이 귀엽고 재밌었다.

[다행히 모르모로의 희생으로 더 이상 제물이 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모르모로의 묘비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그리고.]

“응?”

인형들이 일제히 쓰러지더니 박스 뒤에서 사람이 나왔다.

“모르모로의 의지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갑자기요?

인형사가 인자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뒤쪽에서 흰 빛이 터졌다.

내 것과는 달랐지만 명백히 성력이다.

“왜 성력이…….”

“쉿.”

크루엘로가 검지를 입가에 댔다.

그러는 동안 박스의 뒤쪽에서는 흰옷을 입은 성직자 셋이 추가로 나타났다.

수상쩍기 짝이 없다.

선두에 선 여성이 입을 열었다.

“모르모로 님의 후손이 이 땅에 살아 계십니다. 그 선조와 마찬가지로 가엾은 이들을 돌보고 계시지요.”

“아, 저 알아요!”

“저도 알아요! 마믹 성녀님 맞죠!”

“맞습니다. 이것은 성녀님께서 수확제를 맞은 이들에게 나눠 주라 지시하신 성수입니다.”

“우와!”

“함량은 적지만, 여러분 모두에게 신의 축복이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가장 말단으로 보이는 성직자가 내게도 성수를 나눠 주었다.

나도 얼떨결에 하나 받았다.

새끼손가락만 한 병에 담긴 우윳빛 액체.

온 힘을 다해 집중하면 희미한 성력이 느껴질락 말락.

이쯤 되면 실효가 없는 수준이다.

옆에 있던 크루엘로도 웃으며 성수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허?”

그리고 그는 말단 성직자의 옷자락에 자기 마나를 발라 놨다.

추적 마법 같은데?

설마 이러려고 온 거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시오라 본체는 마나를 다루지 못했을 테니까.

“정말 이 공연을 보고 싶어 오신 거예요?”

“그럼요. 고대 신에 관심이 많아서.”

입만 열면 거짓말이지, 아주.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요, 달링. 그 성수 쓰면 안 돼요.”

“……왜요?”

“오래돼서 상했거든요. 저번에 썼다가 곤란해졌어요.”

“농담 한번 재미없네요.”

“자기 몸으로 실험해 보고 싶다면 굳이 말리진 않을게요.”

저 말을 듣고도 쓸 수 있을 리 없다.

애당초 쓸 생각도 없었지만.

나는 괜히 찝찝해져서 성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는 새 성수를 다 나눠 준 성직자들은 바람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꼭 도망치는 것 같네요. 그럴 린 없겠지만.”

“도망치는 거 맞아요.”

“네?”

“불법 공연이라 단속 나오거든요.”

크루엘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삑,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치안을 담당하는 병사들이 달려와서는 이곳저곳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진짜로? 왜?

“신관이 불법 공연이라고요?”

“고대 신의 신도는 이단이니 허가가 나올 리 없죠. 예외는 ‘마믹’뿐이에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