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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1화 (11/162)
  • 11화

    크루엘로는 돌아가는 마차에 올랐다.

    기다란 다리를 구부리고 등받이에 기대자, 바퀴가 느리게 구른다.

    엽궐련 하나를 꺼내 들고 커터로 그 끄트머리를 잘랐다.

    손끝에서 피워 낸 불씨가 옮겨 붙었을 때 그는 궐련을 입에 물었다.

    “원로회에서 진짜로 손을 썼다.”

    기이하게도 아무도 죽지 않았으나 확실하다.

    즉, 시오라 보네티를 향한 원로회의 악의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시오라 보네티.

    크루엘로는 여자를 떠올렸다.

    제 속을 긁으려는 듯이 금발에, 화려한 미인.

    미뉴엣 보네티에게 접근해 곤란한 혼담을 대신하길 자처했다.

    그 이전의 행적은 없었고 저택에만 틀어박혀 지낸 것치곤 성격이 밝으며 아는 게 많다.

    그래서 그는 누군가가 ‘시오라’의 존재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했다.

    흔적을 조작해 웬디─멜로스 부부에게 입양아를 만들고 그 자리에 그녀를 끼워 넣었다고.

    대원로의 유난스러운 분노에 유쾌해하면서도 혹 노인의 그런 모습이 연기가 아닐까 의심했다.

    시오라를 만들어 제 삶에 끼워 넣으려는 범인이 원로회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아니라는 답을 얻었으니, 다음 후보를 찾아야 한다.

    그 여자의 배후 세력으로 유력한 건.

    “신전이려나.”

    원로회의 전신은 네크로맨서 단체였고, 신전에서 세작을 붙이려는 게 이상치 않다.

    마침 수확제가 코앞이니 도움을 좀 받아 볼까.

    그러려면 혼담을 확정 짓고 움직이는 게 나을 것이다.

    알아볼 시간이 필요해 관심도 없는 조건을 들먹이며 확답을 미뤘지만, 원로회의 사람이 아니라면 거절할 이유도 없었으니.

    ‘적당한 조건을 만들어 봐야겠군.’

    그가 궐련을 깊게 빨아들였다.

    ***

    산처럼 쌓여 있는 선물 더미.

    수신인은 모두 같다, 시오라 보네티.

    “이게 다 뭐야, 베티?”

    “파티에 오셨던 분들이 보내셨어요.”

    “니나 홀메이즈?”

    “그분이 제일 많이 보내셨지만요. 캐서린 포인트 자작 영애, 숀 허버트 남작님, 그리고…….”

    어라, 이름들이 익숙한데.

    친한 척하면서 와인을 뺏었더니 날 좋아하게 된 건가, 숨길 수 없는 나의 매력이란.

    “저 자수정 브로치는 윌리엄 래버린스 경이 보내셨어요.”

    “오? 비싸 보이던데.”

    래버린스 경이라면 나한테 몬스터 독을 맞고 얼굴이 붉어진 사람이다.

    나는 의기양양해져서 어깨를 폈다.

    “거봐, 나한테 반한 거라니까?”

    “콜록!”

    맞은편에서 차를 마시던 가보트가 잔기침을 터뜨렸다.

    가보트는 승복하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그날 같이 뛰어다닌 이후로 가보트는 나를 자주 찾아왔다.

    나는 특별히 어울려 주고 있었다.

    세상에 친분만큼 든든한 방패도 없는 법이라지.

    가보트의 영향력은 햄스터의 발바닥 젤리만큼 소소했지만.

    “야, 그러면 차라리 갈아타는 게 어때?”

    “갈아타다니?”

    “누구라도 공작보다야 낫겠지.”

    “어허, 동생. 듣는 귀가 있으니 말조심해.”

    “베티밖에 없잖아.”

    “베티가 있잖아!”

    대놓고 미뉴엣의 세작인데.

    베티가 어색하게 웃으며 내 방을 빠져나갔다.

    “너 진짜 결혼할 거냐?”

    “아직도 포기를 못 하셨구려, 가보트 선생. 내 성은 이미 보네티인데 말이오.”

    “괴상한 말투 집어치워. 그래, 입양까진 그렇다고 치자고.”

    오? 이거 봐, 친분이 최고라니까?

    “입적 처리까지 끝난 마당에 굳이 약혼할 거 있냐. 못 한다고 버텨.”

    “그러다 쫓겨날걸.”

    “파양이 그렇게 쉬운 줄 아냐?”

    “그러면 밤손님을 써서 목을 스윽─.”

    “야!”

    가보트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왜 이렇게 순진하게 군담, 나보다 귀족에 더 익숙할 텐데.

    뭐, 그가 바라는 대로 파혼이 아예 가능성 없는 일은 아니다.

    크루엘로가 내세운 조건이 뭔지도 아직 모른다.

    대량학살까지 벌이려던 원로회가 한 번 실패했다고 순순히 물러날 리도 없고.

    음, 원로회가 한 짓이 맞겠지? 줄리안 미네르바는 대체 뭐람.

    정황, 내 직감, 그리고 크루엘로의 반응까지 범인이 원로회라고 말하는데 그 이름만 튄다.

    〈운명〉에서도 언급된 적 없는데 뭘까.

    한낱 하수인이라 그런지, 아니면 나 때문에 생긴 나비 효과인지.

    정보가 더 필요하다.

    나는 가보트를 한 번 곁눈질했다.

    “줄리안 미네르바는 대체 뭐람?”

    “뭐, 뭐?”

    “아, 생각만 하려고 했는데 육성으로 말했네. 미안해, 가보트. 신경 쓰지 마.”

    “일부러 말한 거 다 티 나거든.”

    내 연기에 성의가 부족했나?

    반성한다.

    “아카데미 동기라며, 친했어?”

    “전혀.”

    “그러면…….”

    어라, 잠깐만?

    “그래, 네가 피해자니까 너한테도 이야기해야겠지. 사이가 썩 좋지는 않았어. 질 나쁜 녀석이었지.”

    “…….”

    “그래도 파티장에서 무작위로 독극물을 탈 정도인지는 몰랐는데.”

    “…….”

    “그게 정말 혼자서 저지른 일이라면 이유는 아마 공작 때문일 거야. 아카데미에 다닐 때 열등감……. 야, 듣고 있냐?”

    가보트가 뭐라 뭐라 말했지만,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전혀 친하지는 않은 동기.

    하지만 습관을 바로 알아차릴 만큼 상대를 잘 알고 있다.

    거기에 그날의 그 어두운 분위기를 합치면!

    “첫사랑? 걔한테 차였어, 가보트?”

    “뭐……?”

    가보트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렸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곧이어 백지장 같던 그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역시!

    “시오라 보네티!”

    “어, 어?”

    “세상에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뭐가 어째?”

    아닌가 보네.

    가보트의 얼굴에 악마 같은 분노가 가득 차올랐다.

    슬금슬금 퇴로를 살피던 때, 밖에서 베티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오라 아가씨, 공작전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와! 손님 왔대. 나 가 볼게, 가보트.”

    “야! 너 거기 안 서? 시오라 보네티, 야!”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잽싸게 도망쳤다.

    어휴, 놀라라.

    ***

    보네티 저택의 응접실.

    사내는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크루엘로가 반가운 건 오랜만이다.

    모처럼 만에 나는 웃으며 인사했다.

    “하루 만이네요, 너무 반갑다.”

    “너무 자주 오면 매력이 떨어지나요?”

    “그럴 리가요. 하루라도 빨리 결혼하고 싶은 마음뿐인데.”

    “마음이 통해 기쁘네요, 달링. 그래서 말인데요.”

    크루엘로가 웬 서류를 내밀었다.

    “이야기를 좀 진전시키러 왔어요.”

    “이건…….”

    “저번에 말했던 내 조건이요.”

    문서엔 좀 약한데.

    나는 일단 그 내용을 읽었다.

    이것저것 복잡한 이야기가 많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이 조항이었다.

    「A는 B에게 언제든 이혼을 요구할 수 있으며, B는 이를 거부하지 아니한다.

    이때 A는 재산 목록의 1번부터 15번까지를 B에게 위자료로 지급해야 한다.」

    A는 크루엘로, 내가 B였다.

    간단히 말해 크루엘로가 원하면 언제든 이혼해야 한다는 말이다.

    흠.

    “전하, 숨겨 둔 애인 있어요?”

    “없을걸요.”

    “그러면 이 조항은 뭐예요?”

    “조금 걸리는 게 있어서? 일단 다 보고 얘기할래요?”

    그러지, 뭐.

    서류를 뒤로 설렁설렁 넘기니 맨 끝에 크루엘로의 재산 목록이 나왔다.

    맨 위부터 차례로…….

    「1. 오거스트(화이트데저트 공작령).」

    눈을 깜박했다.

    잘못 읽었나 싶어서 얼굴을 천천히 서류 가까이로 가져갔다. 속눈썹에 종이가 닿을 때까지.

    그래도 글자가 변하지 않아서 이번에는 서류와의 거리를 천천히 벌렸다.

    그대로네?

    “자기, 뭐 해요?”

    “혹시 미치셨어요?”

    “모르고 있었어요?”

    분하다.

    자기성찰이 잘된 미친놈은 이길 수가 없어.

    “그러니까 전하께서 이혼을 요구하시는 날에 영지를 준다고요?”

    “작위도 공작저도 성도 전부요.”

    “아니……. 그게 가능해요?”

    “가능하니까 계약서까지 써 뒀겠죠.”

    그 가능성에 원로회의 의견은 1g도 들어가지 않은 듯하다.

    찜찜하다.

    굉장히 탐나는데, 그래서 찝찝하다.

    이거 사기당하는 징조인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크루엘로와 결혼은 해야 했지만…….

    “절대로 이혼하지 않겠다는 의사로 받아들일게요.”

    크루엘로는 긍정하지 않고 웃었다.

    꼭 가문을 외부인에게 넘겨주고 싶어 안달 난 사람 같다.

    ……진짜 그걸지도 모르겠다.

    “다 읽었죠? 슬슬 서명했으면 하는데.”

    “음, 할 건데요. 저한테도 조건이 있어요.”

    “말해 봐요.”

    “우리 결혼 빨리 해요.”

    크루엘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결혼을 빨리 한다고 이혼도 빨라지는 건 아니에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돈 욕심이 제법 있다고는 들었어요.”

    “아니라고!”

    “그러면 이유가 뭔데요?”

    너랑 결혼해야 합법적으로 공작령을 뒤져 볼 수 있으니까요!

    〈운명〉이 시작되기까지 1년도 안 남았는데 적당히 협조하시죠?

    ……라고 말할 수는 없다.

    “실은 저한테도 평생의 숙원…… 이라기보다는 로망이 있어요.”

    “이혼하는 로망?”

    “잠깐이라도 성에서 살아 보고 싶어요.”

    크루엘로의 말을 무시하고 꿋꿋이 말했다.

    임기응변으로 쥐어짜 낸 것치곤 그럴싸하다.

    공작성의 실체는 악취 나는 네크로맨서들의 본거지라도, 겉보기엔 웅장하고 아름다울 테니.

    “물론 공작저도 좋긴 한데요, 그래도 성이─.”

    “성에 갈 일이 없을 텐데요?”

    “네? 공작부인이 되면 영지에 가 봐야죠. 전하께서 순찰 같은 걸 하실 때 따라가도 되고.”

    “영지 순찰은 큐딜이 했던가. 난 작위 계승할 때 빼고 간 적 없어요.”

    “요양차 간다거나?”

    “신전도 멀고 마정석 광산 때문에 건강에 좋은 환경은 아니에요. 그렇게 나쁘지도 않지만.”

    진짜?

    그러면 결혼할 이유가 없는데?

    나는 입을 벌리고 크루엘로를 쳐다봤다.

    그가 헛웃음을 지었다.

    “진심인가 보네. 그렇게 궁금하면 약혼하고 데려가 줄게요. 출입금지 당한 건 아니니까.”

    “진작 말하지!”

    “하하.”

    “거기서 자도 되나요?”

    “원하는 만큼 있어요.”

    나는 곧바로 서명했다.

    크루엘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한층 홀가분해져서 소파 등받이에 늘어졌다.

    “달링이 협력해 줘야 하는 부분이 있어요.”

    “도장 찍는 거 말고요?”

    “이미 짐작하시는 듯하니 말하겠지만, 원로회에서 제법 반대가 심해요.”

    오,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는데.

    “어느 정도야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자칫 곤란해질 수도 있겠군요.”

    “책잡히지 않도록 처신하라는 건가요?”

    “아니요, 분위기를 만들어 볼까 해서.”

    음?

    크루엘로가 찻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달링, 수확제엔 가 봤어요?”

    “수확제……?”

    “몰라요?”

    “아, 아, 알거든요!”

    그래도 밖에 나온 지가 몇 년인데 모를 리가!

    나는 내 결백을 증명하려 아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수확제.

    마탑과 연계해 황실에서 주최하는 축제였다.

    수도 수페르 광장에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고, 진을 동력으로 삼아 갖은 마법을 선보인다.

    낮에는 궁정 악단, 밤에는 떠돌이 음유시인들이 광장을 돌며 위대한 이들의 업적을 노래했다.

    황실 기사단은 제복을 차려입고 광장을 행진했다.

    120여 개의 부스에서 먹거리를 팔고, 규모가 작은 연극을 하거나 민속춤을 추기도 했다.

    돈이 굉장히 많이 들어가는데, 이는 푸른 피의 특별함을 과시하고 신분제를 굳건히 하기 위한 수작질…….

    “그것참 흥미롭긴 한데 수확제 강의는 언제까지 들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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