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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9화 (9/162)

9화

베티는 자부심에 가득 찬 얼굴로, 나를 거울 앞으로 이끌었다.

셔링이 길게 잡힌 엠파이어 드레스가 시오라의 몸에 부드럽게 감겨 있다.

본판이 좋으니 잘 어울렸다. 감상 끝.

“공작전하께서는 정말 못 오시나요?”

“일이 바쁘시대.”

“그래도 아쉽네요. 얼굴만큼은 제국 역사서를 뒤져도 꿀…….”

합, 베티가 급하게 말을 끊었다.

인간적인 면모가 차라리 귀엽다.

그때 누군가 열린 문을 구태여 두드렸다.

“다 했냐?”

어제부로 내 남매가 된 가보트였다.

파트너 역을 맡았는데 싫어하는 티가 풀풀 났다.

그래도 인형 놀이는 착실히 해냈는지 머리와 옷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와우.”

나 때문에 꾸민 터라 크게 박수를 쳐 줬다.

짝짝짝, 한 번 칠 때마다 가보트의 표정이 조금씩 구겨졌다.

“그쯤 하고 나와.”

“넵!”

가보트가 설렁설렁 다가와 날 에스코트했다.

그렇게 싫으면 도망가면 될걸, 이상한 데서 착실하다니까.

이제 와서 말하자면, 가보트는 유일하게 내 입적을 반대했었다.

나랑 가족이 되기가 싫은 건지, 어떤 식으로든 크루엘로와 엮이기 싫은 건지.

영향력이 적은 탓에 그의 의견은 묵살됐다.

뭐, 대의를 위해서니 가보트가 참아야지 어쩌겠어.

내가 평생 시오라로 살 것도 아닌데.

파티장은 저택의 메인 홀.

중앙 계단을 빙글빙글 내려가면 되었다.

흰 보를 씌운 길쭉한 파티 테이블이 두 줄.

그 위로 화려한 커트러리와 화훼장식, 공들인 음식들이 빼곡했다.

휘황찬란하게 차려입은 귀족들은 저마다의 무리를 이루어 샴페인 잔을 부딪치며 떠들어 댔다.

그 분위기에서 누군가가 나를 발견했다.

“어머, 파티의 주인공이 도착했네요.”

소란이 멎고 묘한 시선들이 내게로 향했다.

이거 좀 오싹한데.

나는 표정을 가다듬으며 걸음을 옮겼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눈빛은 강하게, 입꼬리는 보일 듯 말 듯 당기고 눈동자는 돌리지 않는다.

샹들리에 아래를 주시하며 인사!

얕보이지 않도록 약간의 성력까지 풀었다.

“안녕하세요, 시오라 보네티입니다.”

와 주셔서 감사 어쩌고저쩌고.

준비된 말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말했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 주최자인 미뉴엣이 웃으며 다가왔다.

“사람들을 소개해 줄게.”

그리고 인사 지옥이 펼쳐졌다.

‘안녕하세요’만 몇 번을 했는지 그것만으로도 지쳤다.

중반부터는 내심 그런 기대를 품기 시작했다.

뭔가 일이 터져 주지 않으려나? 안 터졌다.

도망칠 핑계 안 생기나? 안 생겼다.

“레이디 시오라, 그러고 보니 곧 약혼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맞아요! 화이트데저트 공작전하시라던데.”

“듣기로 인형 극장에서 처음……. 아, 극장 이야긴 하면 안 되겠죠, 하하.”

그냥 속을 긁어 대기만 할 뿐.

웃고는 있지만, 슬슬 귀찮다.

가보트는 진작 팔을 빼고 도망갔고 미뉴엣은 상황을 관망했다.

인생은 외로운 거야.

“그냥 평범하신데 하하, 관심들이 많으시네. 하하.”

나는 애써 웃으며 지나가던 하인에게서 와인을 건네받았다.

“제가 알기로 전의 약혼자분들께는…….”

차라리 취하는 게 낫겠어.

나는 잔을 기울여 와인을 가득 머금었다.

그러고는.

“푸으으읍!”

“우악!”

힘차게 내뿜었다.

뭔데, 이거?

마시기 전엔 몰랐는데 입에 넣고 나니 어둑한 기운이 확 느껴졌다.

몬스터의 기운 같은데 몬스터로 담근 술 같은 게 있나?

아니면…….

“아.”

몬스터 독인가? 설마? 진짜?

“이게 무슨 짓입니까, 레이디 시오라!”

바로 앞에 있던 남자가 항의했다. 래버린스 경이랬나.

그의 얼굴에는 내가 뿜어 낸 와인이 그득 묻어 있었다.

잠깐만. 이게 정말 독이면?

“미안해요!”

큰일 났다! 남의 얼굴에 독 뿜었어!

나는 품에 손을 넣었으나 텅 비어 있었다.

유감, 손수건 같은 건 가지고 다니지 않는답니다.

하는 수 없이 테이블보를 찢어서 래버린스 경의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무슨, 괜, 윽, 저리, 괜찮, 살!”

뭐라고 저항하는 것 같지만, 네 생사가 걸린 문제니 참아라.

얼굴을 닦아 주며 나는 속으로 끊임없이 주문을 외었다.

정화, 정화, 정화, 정화!

“끅.”

“휴우.”

좋아, 이쯤이면 중독돼서 죽지는 않겠지.

나는 걸레가 된 테이블보를 휙 던져 버리고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깔끔 그 자체! 그런데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갛다.

오, 나 이 전개 알아.

“나한테 반했어요?”

“반했겠냐고!”

가보트가 내 팔을 잡고 끌어당겨 구석진 곳으로 데려갔다.

주위 사람들은 다 얼이 빠져 있어서 그러는 걸 보고만 있었다.

어쨌거나 탈출 성공?

“너 갑자기 왜 그런 거야?”

“바로 미쳤냐고 할 줄 알았는데 제법 다정하구나.”

“그 와인에 뭐, 이상한 거라도 들어 있었어? 맛이 달랐냐?”

오, 예리해.

하나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다.

사람한테 안 좋은 기운 같긴 했는데 견문이 짧아서 확신할 수 없다.

몬스터 담금주가 실재하는지만 슬쩍 물어볼까?

“아 씨, 내가 수상한 걸 봐서 그래. 화 안 낼 테니까 말해 봐.”

“수상한 거?”

“……제대로 보진 못했는데 어떤 하인이 와인에 뭘 넣는 것 같았어.”

오호라. 담금주를 즉석에서 제조하진 않을 테니까 그러면.

“진짜 몬스터 독인가?”

“도오읍!”

나는 서둘러 가보트의 입을 막았다.

파티장에 독 풀렸다고 동네방네 소문낼 일 있나!

아니지, 잠깐만.

당장 더 시급한 문제가 있었다.

“그 하인이 독 탄 잔을 바로 나한테 가져다준 거야?”

“그걸 잘 모르겠어. 수상해서 쫓아가다가 놓쳤거든.”

좋아, 정리해 보자.

먼저 최상의 경우, 나만 타깃이 되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파티장에 있는 누구라도 상관없다……?”

심지어 대상은 한둘이 아닐지도 모른다.

와! 망했는데?

“대답했으니 너도 대답해, 시오라. 그래서 아까 뭐였어?”

“조용히 해 봐.”

나는 성력을 끌어 올렸다.

─2 주문, 감각 확장extension.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고 기운을 느끼는 감각이 한껏 예민해진다.

아까 느꼈던 기운이 파티장 곳곳에서 느껴진다.

독 기운이 묻어나는 곳을 확인하자 공통점이 보였다.

검붉은 액체.

그건 전부 레드 와인에 들어 있었다.

맛이 비슷하든 색이 비슷하든 이유가 있겠지, 아무튼!

“가보트, 레드 와인 다 회수해야 해, 당장!”

“뭐, 뭐? 사람들 마시고 있는 건!”

“목마르다고 뺏어!”

“미친.”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뛰쳐나갔다.

그때부터 나는 한 마리의 망아지였다.

“오, 이 와인 맛이 톡톡 쏘는데요?”

“상해서 그래요, 버리세요!”

“헉! 사람이 갑자기 어디서! 보, 보네티 백작 영애?”

“반가워요, 레이디 캐서린. 목걸이가 참 잘 어울리네요. 이것도 인연인데 악수 한번 할까요?”

“네?”

─정화purification.

“만나서 즐거웠어요, 그럼 안녕!”

다음 사람.

“그렇다니까요. 목이 말라서 와인 한 모금만 아악! 와인 도둑이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목이 말라서! 아, 리리안트 경, 기사 되신 거 축하해요. 젊은 나이에 대단하시네요! 그 나이에 기사가 된 사람은 천 명도 안 되는데.”

“아, 예, 감사……?”

마시기 전이니 정화는 패스.

또 다음 사람.

“허버트 남작님, 상쾌한 맛을 좋아하신다면서요. 그거 말고 로제 와인은 어떠세요? 입맛에 딱 맞으실 것 같은데.”

“어, 안녕하세요. 레이디 시오라. 그럼 권해 주신 대로…….”

“앗. 그런데 옷깃이 흐트러져 있네요. 잠시만요.”

─정화purification.

“한층 멋있어지셨어요!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미뉴엣이 준 인적사항이 의외로 도움이 된다.

좋아하는 지점을 집어 주면서 말하니까 거부감 없이 와인을 뺏을 수 있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 뺏긴 게 아니냐는 사람에겐 좀 더 긍정적으로 세상을 보기를 권한다.

다음, 다음, 또 다음!

“이제 거의 다 한 것 같은데 남은 와인이…….”

“시오라 보네티!”

“음.”

미뉴엣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보는 눈 때문인지 표정은 차분했으나 목소리에는 화가 들끓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파티를 망치고 싶어서 환장했어?”

“정확히 그 반대야.”

“뭐?”

“미뉴엣, 이야기는 나중─.”

“홀메이즈 백작 영애, 정신 차리세요!”

당황한 외침이 파티장을 길게 가로질렀다.

우와, 일 났다.

“미뉴엣, 신관 데려와!”

나는 서둘러 소란해진 곳으로 달려갔다.

단풍색 머리의 여자가 쓰러진 채 가슴께를 부여잡고 있었다.

니나 그레이스 홀메이즈, 백작가의 외딸이다.

“끅, 끄윽!”

“홀메이즈 백작 영애! 갑자기 왜 이런…….”

“신관을 불렀어요, 잠시만요.”

나는 몸을 낮추고 니나를 살폈다.

낯빛이 파랗게 질렸고 숨을 과도하게 들이켜고 있다.

내부에서는 독 기운이 활개 쳤다.

정확히 살펴보려 니나의 손을 잡자, 그녀가 거세게 내 손을 움켜 왔다.

“무, 무섭…….”

호흡이 너무 거칠어서, 일단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레이디! 이게 무슨─!”

“코로만 숨 쉬어요, 천천히. 차분하게.”

“으읍!”

“괜찮아요, 니나. 죽을 일 없어요. 괜찮아요.”

니나의 상태는 빠르게 나빠졌다.

신관이 오길 기다리면 늦을지도 모르겠다.

증상이 발현되기 전엔 아무도 모르게 치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보는 눈도 많고 드러난 증상도 너무 뚜렷했다.

어떡한다?

그 순간.

“어…….”

내 손으로 축축한 것이 떨어졌다.

니나의 눈에서 줄줄 흘러내린 눈물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살 거예요, 살려 줄게요.”

몰라!

대충 핑곗거리만 있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서둘러 주위를 살폈다.

마침, 근처로 다가온 아군이 있었다.

“가보트, 종이봉투 가져와! 빵 봉투 같은 거!”

가보트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디저트를 담아 놓은 봉지가 주변에 있었다.

난 니나의 코와 입 주변에 봉지를 가져다 댔다.

봉지가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한다.

“봉지가 무슨 소용이 있는 거지요?”

“글쎄요, 저는 잘…….”

“일단 지켜봅시다.”

과호흡은 겉으로 드러난 증상일 뿐 실질적인 원인은 따로 있었지만, 눈속임용으론 괜찮겠지.

시선을 봉지에 돌려놓고 니나의 몸에 성력을 조심스레 들이부었다.

─정화purification.

“세상에나. 봉지를 댔더니 안색이 좋아지지 않았어요?”

네, 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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