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직원의 표정이 바뀐 게 느껴졌다.
어깨가 굳고 동작이 경직됐다.
나는 크루엘로를 쳐다봤다.
네가 소개한 길드에서 뭐라고 말하는지 어디 들어나 보자.
“대상에 대한 정보는─.”
“종달새 우짖는 낮, 길을 걷는 그림자가 산등성이에 이르면.”
상황을 관망하던 크루엘로가 끼어들었다.
혹시 소외되는 상황을 못 견뎌서 관심을 끌려는 걸까?
그러나 뜻밖에도 직원은 그 이상한 물음에 답을 내 주었다.
“……어둠을 기던 뱀이 천 개의 비늘을 벗고 반기리.”
시 같기도 하고 선문답 같기도 하다.
그리고 암호문 같기도……. 어라, 설마 진짠가?
“대금은 선불입니다.”
상대가 한층 사무적이고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면 크루엘로는 조금도 분위기를 바꾸지 않고 품에서 전표 한 장을 꺼냈다.
액수는 보지 못했지만, 과자 살 돈이 적혀 있진 않겠지.
“충분할 걸세.”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알고자 하십니까.”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크루엘로가 나를 쳐다봤다.
나보고 질문하라는 것 같았다.
당사자 앞에서 자기 정보를 캐 보라고 하면 내가 못 할 것 같아서?
어림없는 소리.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일단은 아까 했던 헛소리를 수습하는 데서 시작했다.
“공작의 이상형이 어떻게 되지?”
크루엘로가 하대했으니 나도 말을 높이지는 않았다.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약혼녀들의 공통점을 취합해 놓은 정보로 알려 드릴까요?”
“약혼녀…… 들?”
복수형?
크루엘로한테 ‘에이미’ 외의 약혼녀가 있었다는 말인가?
적어도 비가로 지낼 때까지만 해도 그에게 다른 상대는 없었지만, 음.
비가의 몸에서 죽고 시오라가 되기까지는 4년의 공백이 있다.
그사이에 작위도 계승했으니 혼담 하나 거쳐 갔다고 한들 이상치 않다.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찜찜하여 나는 물었다.
“약혼녀가 총 몇 명이었지?”
옆에서 크루엘로가 웃었다.
불길함을 자극하는 소리였고 아니나 다를까.
“총 아홉 명입니다.”
“아홉…….”
말문이 턱 막히는 숫자다.
진짜로? 4년 사이에 여덟 명이나?
머리가 아파 와 나는 이마를 짚었다.
“파혼한 이유는.”
“수도원에 들어간 이가 하나. 거래로 합의한 이가 다섯. 병에 걸린 이가 둘. 사망자가 둘입니다.”
“……그러니까 여자 측에서 다 파혼을 요구했다고? 그럴 거면 처음부터 혼담을 거절하지 않고.”
“혼담을 거절할 경우 비리를 폭로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가문이 무너진 케이스가 넷입니다.”
가문이 무너질 만한 비리라니 어떤 쪽인지 감도 안 온다.
이걸 자업자득이라고 해야 하나?
“떳떳하게 살지 그러셨어요! 하다못해 약점이라도 잡히지 마셨어야죠! 왜 아버지의 비리 때문에 보네티가 공작의 장난감이 돼야 합니까!”
그 말의 의미가 이젠 정말로 이해가 됐다.
“그래도 무려 화이트데저트씩인데 그렇게까지 혼담을 거부할 이유가 있나?”
“이쪽은 사견입니다만, 득 될 게 없다는 판단이었겠지요.”
“득 될 게 없다?”
“범상한 인사가 아니니까요. 약혼 후에도 이권은 한 점 내어 주지 않고 심심하면 상대 가문의 비리를 터뜨렸습니다. 가주가 정체불명의 자객에게 암살당한 케이스도 있습니다.”
“…….”
“평상시 행적도 화려하고요. 대표적으로는 사형 집행 대행 사건이나 무도회의 암살자 도살 사건이 있습니다.”
사건명만 들어도 정말 알고 싶지 않은 정보다.
이쯤 되면 거의 파혼해 달라고 비는 수준이다.
양아친가?
“그럴 거면 혼담은 왜 넣었대. 혹시 색을 밝히기라도 한다든가?”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바로 옆에 크루엘로가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본인에게 직접 묻고 싶었지만, 장소가 장소니만큼 직원에게 묻는 척해야 했다.
당사자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소리까지 내며 웃고 있었다.
“성적으로는 오히려 결벽적입니다. 춤을 출 때 외에는 손도 잡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게 잦게 혼담을 넣은 이유는, 이것도 제 추측입니다만.”
근거 없는 추측은 아닐 테니, 나는 말해 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은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공작의 첫 번째 약혼녀가 죽은 이후─.”
그 순간, 파삭 하는 소리가 그의 말을 삼켰다.
돌연 천장에 매달려 있던 등이 산산이 조각나고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사람이 다치진 않았으나 희미한 불빛마저 사라지니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나는 어둠을 더듬으며 크루엘로를 돌아보았다.
그의 붉은색 눈동자가 등불처럼 빛난다.
그 안에서 희미하게 마법의 기운이 느껴졌다.
크루엘로가 느리게 말했다.
“길드 건물이 엉망이로군.”
“……죄송합니다, 고객님. 정비를 마친 이후 다시 찾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다네요. 갈까요?”
시야는 어두웠으나 웃음기가 섞여 든 목소리는 선명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에서 나왔지만, 주변은 여전히 어둑하다.
언제 해가 저물어 버린 걸까, 검푸른 저녁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공기도 제법 차가워져서 몸이 으슬으슬했다.
크루엘로의 코트를 뺏고 싶다.
“실망했어요?”
대뜸 크루엘로가 물었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줄 알았는데, 정말 처음 듣는 것처럼 굴기에 놀랐어요.”
“음. 저는 거의 집 밖으로 안 나가고 살았거든요. 아시죠?”
“그렇다고 보고받긴 했지만…….”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의심하는 듯했지만 지금 심문할 사람은 나였다.
실망했냐고?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대답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요.”
“죽었다던 전하의 전 약혼자…… 들, 병에 걸린 사람까지 포함해서요.”
“…….”
“전하 때문에 그렇게 된 건가요?”
사망자 중 한 명의 행방은 내가 제일 잘 알았지만, 다른 케이스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니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지.
크루엘로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차 싶어 나는 질문을 조금 정정했다.
“전하의 손으로 죽였다거나?”
“……아니요.”
크루엘로가 마른세수를 했다.
“내가 안 했어요.”
“그러면 실망 안 해요.”
여러모로 놀라긴 했지만, 사실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던 거니까.
오늘 들은 내용은 〈운명〉에 서술된 그대로였다.
희대의 개망나니, 걸어 다니는 폭탄이라고 했던가.
그나마 개판인 가문만 골라 괴롭혔으니 아슬아슬하게 명분은 챙겼다고 해야 할까.
물론 허망하기는 했다.
크루엘로가 이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랐고, 그러기 위해 애써 왔으니.
하지만 내가 개입해 상황이 더 나빠진 것만 아니라면 어떻게든 괜찮았다.
“여전히 나랑 결혼하고 싶단 말이죠?”
“네.”
“거짓말을 하는 건지 욕망에 충실해서 모른 체하는 건지 알 수가 없네요.”
“둘 다라고 해 둬요.”
“약혼한다고 내가 보네티를 안 건드린다는 보장도 없는데 정말 괜찮아요?”
“그거야 죄지은 사람이 감당할 일이지, 제가 알 반가요.”
“다른 보네티도 같은 생각인가요?”
“적어도 미뉴엣은 좋아하던데. 득 볼 자신이 있나 보죠.”
그러고 보면 걔는 〈운명〉에서도 그런 마음가짐이었다.
크루엘로와 정말 결혼하기 싫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어떻게든 뽑아 먹어 주겠다는.
크루엘로를 암살해서 화이트데저트를 통째로 집어삼킬 생각까지 했으니 여러모로 대단했다.
“진짜 이유가 뭐예요?”
진짜 이유?
나는 크루엘로를 빤히 보다가 웃고 말았다.
“세계 평화?”
이거, 크루엘로 못지않게 미친 답변인데.
혼자서 킬킬거리자 그가 이상한 사람 보듯 쳐다봤다.
진짠데.
“그래서 전하께서는 오늘 왜 오셨던 건데요. 마차 앞에서 기다리신 걸 보면 절 찾아오신 듯한데.”
“글쎄요, 거리의 평화를 지키러?”
아, 진짜.
크루엘로의 재미없는 농담 때문에 내 진심마저 묻혔다.
주위 공기도 서늘하게 느껴져서 팔을 쓰니 크루엘로가 코트를 벗었다.
“실은 거리에 뱀이 하나 돌아다니고 있거든요. 그 뱀이…….”
내 어깨에 코트를 덮어 주며 사내는 묘한 얼굴로 웃었다.
“달링을 잡아먹을까 봐 와 봤어요.”
***
크루엘로와 마주쳤던 날이 지나고 정보 길드를 다시 찾았지만, 문도 열려 있지 않았다.
이후로 달리 할 것이 없는, 한가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어쩌면 ‘한가한’ 대신 ‘호사스러운’을 붙여도 괜찮겠다.
품위 유지비란 명목하에 매달 돈이 나왔고 식탁은 풍요로웠으며 베티에게도 정보를 흘린 걸 사과받았다.
사실도 생겨서 드디어 침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제대로 귀족 자제 취급받기는 처음인지라 마음껏 게으름을 부렸다.
그리고 오늘부로!
“축하해, 시오라. 입양 처리를 마치셨대.”
나는 시오라 보네티가 되었다.
우와!
싱거워.
이렇게 미뉴엣의 말 한 마디로 덜렁 끝날 줄은 몰랐다.
백작부인의 얼굴은 보지도 못했다. 입양에 동의한다는 서류만 받았을 뿐.
백작은 아직도 황궁에서 조사받는 중이라 저택에도 없다.
법적으로나마 가족이 되었는데도 이렇게 차가울 줄이야.
“조만간 대신관 한 분이 오셔서 축복해 주실 거야.”
싱겁다는 말 취소.
남의 신도에게 축복을 받으라니 불경하다!
“아니야, 대신관님도 바쁘실 텐데 굳이 오실 필요 있나.”
“대놓고 실망한 표정이네. 하기야 입적된 날 바로 받지 않으면 축복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렇지? 그러면 차라리 안 받는 게 낫겠지?”
“그러니 파티나 열어 줄게.”
“갑자기?”
“말은 안 했는데 준비도 다 해 놨어. 적당한 사람들한테 초대장도 보내 놨고. 아.”
미뉴엣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서류 뭉치였는데 그 두께가 어지간한 책만 해서 괜히 불길해졌다.
이게 뭔데? 슬쩍 살펴보니 사람 이름이 쓰여 있다.
어, 이거 설마…….
“기억력 좋다고 했지?”
“사실 나 금붕어보다 조금 위야.”
“저런, 파티 열리기 직전까지 계속 애써야겠네.”
“진짜 이걸 다 외우라고?”
“파티장에서 실수하지 않으려면 해야지.”
미뉴엣이 선량한 얼굴로 웃었다.
“내일이 네 데뷔탕트 볼이나 마찬가지인데 실수할 생각은 아니지?”
“처음인데 실수 좀─.”
“뭐? 보네티가 되자마자 가문의 명예에 누가 되겠다고?”
할 말 없게 하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미뉴엣을 노려봤다.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방을 나섰다.
쳇.
***
이튿날, 아침.
나는 보네티의 모든 기술자를 만나 볼 수 있었다.
머리, 화장, 드레스에 장신구까지, 전문가가 어찌나 많은지.
기진맥진할 지경이 되어서야 베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완벽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