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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7화 (7/162)
  • 7화

    처음의 소득에 즐거웠던 건 잠깐뿐.

    다른 길드들을 돌면서 점점 기분이 가라앉았다.

    ‘시오라 벨벳’에 대한 조사 결과는 거의 비등비등했다.

    “말도 안 하고 저택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단순히 내향적인 정도를 넘어섰다.

    실은, 나는 이런 평가를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날짜상으로 12년 전, 에이미로 살던 시절에.

    “기억 상실이라니! 저택에만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으니 그 꼴이 나지!”

    “정말 기억이 안 나는 거니? 응? 말을 안 해서 잊어버린 게 아니고?”

    “젠장! 기껏 화이트데저트의 약혼 상대가 되었다고 기뻐했더니!”

    이 주옥같은 어록들은 전부 로열샌드 경의 명언이다.

    저 이후로는 기억 상실을 치료해 보겠다고 몇 달간 나를 온갖 신전에 처박았었지.

    그 말에 힌트가 있었다.

    내가 되기 전의 에이미는 영혼이 없는 것처럼 조용한 아이였다.

    그리고 시오라 역시도.

    “내가 남의 몸을 쓰기 위해선 다른 조건이 더 필요한 걸까.”

    생각하자니 찝찝해 나는 휙휙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미뉴엣이 줬던 추천 리스트를 내려다봤다.

    다음으로 갈 곳이…….

    “어라, 다 돌았네.”

    짧은 리스트가 벌써 동이 났다.

    “진짜 알고 싶은 건 전혀 못 들었는데.”

    시오라 벨벳의 과거 정도야 단순히 참고 삼아 의뢰한 거고 중요한 건 크루엘로의 행적이었다.

    〈운명〉과 얼마나 겹치는지 알아야 맞춰서 대응할 테니까.

    하지만 길드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단호했다.

    그 질문을 입에 꺼내자마자 하나같이 사색이 되어선.

    “1급 기밀 사항입니다!”

    “히이익! 저희 길드 문 닫게 할 일 있어요? 나가요, 나가세요!”

    “저는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신이시여, 시간을 하루 전으로 되돌려 주시옵소서.”

    생각하니 왠지 열받는데.

    이놈이 엮이면 어째 쉬운 일이 하나도 없어.

    나는 돈주머니가 크루엘로인 양 쥐어짜며 마차로 향했다.

    “…….”

    우뚝, 걸음이 멈췄다.

    마차의 근처에 왠지 본 적 있는 듯한 뒷모습이 보였다.

    거의 190cm에 달할 듯한 장신의 사내.

    긴 프록코트를 입었음에도 그 아래로 드러난 다리는 길고 곧았다.

    검은 코트가 쫙 펴질 만큼 등이 넓고 어깨가 벌어졌다.

    그리고 거기서 더 시선을 올리면 보기 드문 하늘빛 머리칼이 있다.

    나는 숨을 참으며 발소리를 죽였다.

    후드를 더 깊이 눌러쓰고 사내를 빙글 돌아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지나쳤을 때 멈췄던 이가 걸음을 옮겼다.

    내 옆에서 함께 걷는 모습이 짜증 날 만큼 자연스럽다.

    “가면 좀 바꾸는 게 어때요.”

    그걸로 알아본 건가.

    진작 버릴걸.

    “극장에서도 생각했는데 영 안 어울려서요.”

    나는 걸음을 더 빨리했지만, 애석하게도 다리 길이에서 이미 진 싸움이었다.

    자리에서 우뚝 멈추어 나는 고개를 들었다.

    햇빛 아래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가 보인다.

    크루엘로 화이트데저트.

    그가 빙그레 웃었고, 나는 와락 얼굴을 찡그렸다.

    “전하께서 왜 여기에 계세요?”

    “글쎄, 뭘까요. 우연? 운명? 인연?”

    “제가 오늘 운이 나빴나 보네요.”

    “야박해라.”

    야박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나 봐.

    “뭐, 나도 그런 인과 없는 건 안 믿어요. 세상일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잖아요.”

    크루엘로가 묘하게 웃었다.

    아무튼 있는 척하는 저 말버릇을 고쳐 놔야 한다.

    할 수만 있으면 에이미 때로 돌아가서 매를 들련만.

    아니지, 로이는 때릴 수 없으니 비가 때가 좋겠다.

    비가 때 크루엘로는…… 어땠더라. 일만 너무 많이 해서 기억이 안 난다.

    노동법 개선이 필요해.

    내가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 있는 새, 크루엘로도 시간을 게을리 쓰지 않고 이상한 짓을 했다.

    그가 낀 검은 장갑 위로 불꽃이 피어났다.

    크루엘로가 마법을 쓰는 건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뭐 하세요?”

    진짜 뭐 해? 내가 나온 정보 길드 건물에 왜 불을 질러?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나는 말리지도 못했다.

    크루엘로는 이제 청량해 보일 만큼이나 맑게 웃었다.

    “퇴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네?”

    “지금 나쁜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거든요.”

    너잖아.

    나쁜 사람이 붙인 불은 삽시간에 사람 키만큼 자라났다.

    여기가 인적 없는 길이기에 사람들의 주목을 끌진 않았지만, 그래서 현실감이 없었다.

    이어 크루엘로는 저와 함께 있던 시종을 시켜 불이 났다고 소리를 치게 했다.

    극장에서 보던 것보다 더 연극 같았다.

    안에 있던 직원이 서둘러 뛰쳐나오는 모습까지도.

    “이게 대체……!”

    그녀는 누가 봐도 인위적인 불길에 화를 내려다가 크루엘로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직원의 얼굴은 이미 죽은 사람 같았다.

    왠지 내가 미안해지는데, 크루엘로는 태연히 어깨를 으쓱였다.

    “미안하네. 실수로 불을 질러 버렸어.”

    “네……? 아니, 예?”

    “너무 가슴 설렐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지.”

    방화범의 핑계가 조악하다.

    “3기사단엔 내가 신고할 테니 자네는 그만 귀가하게. 아 참.”

    크루엘로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직원에게 던졌다.

    대충, 보석 상자처럼 보였다.

    그녀는 그걸 열어 볼 생각도 못 하고, 심지어는 입도 벙긋거리지 못하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서둘러 사라지는 모습을 보니 나는 문득 직원이 부러워졌다.

    나도 도망치고 싶다.

    크루엘로의 뒷조사를 하려다가 딱 걸릴 줄이야.

    성과는 얻지도 못했는데 억울하다!

    직원이 사라진 뒤, 크루엘로가 손을 까딱했다.

    벽면 전체에서 넘실대던 불길이 단번에 사라지고 까만 흔적만 남았다.

    그걸 배경 삼아 선 사내는 한층 더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걸까.

    마음의 거리가 그에게서 한층 더 멀어졌다.

    “자기, 어디 가요?”

    실제 거리도 같이 멀어졌나 보다.

    크루엘로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내 다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오죽 도망치고 싶었으면.

    나 자신이 안타까워서 나는 굳이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크루엘로는 태연히 또 따라붙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

    “여긴 왜 왔어요?”

    “전하는 왜 오셨는데요. 조건 말씀하러 오셨어요?”

    “그건 좀 이르죠. 이름 뒤에 ‘보네티’를 붙이고 나서 이야기해요.”

    “유감이네요. 그럼 전 이만─.”

    “혹시 내 뒷조사하러 오셨나?”

    움찔 놀라 걸음을 멈추자 그가 사르르 눈을 휘었다.

    붉은 눈동자가 태양 빛 아래 선명히 빛났다.

    “맞혔구나.”

    “아니요, 방화 신고하러 왔는데요.”

    “아하.”

    “알았으면 비켜 주실래요? 범인이 도망가기 전에 서둘러야 해서.”

    “좋아요. 그런데 그 촌스러운 가면은 벗고 가는 게 어떨까요?”

    이번엔 크루엘로가 내 속에 불을 질렀다.

    연쇄방화범을 거세게 노려보자 그는 미안한 척 눈썹을 늘어뜨렸다.

    “미안해요. 혹시 자기의 취향이었나요?”

    “아니요!”

    있는 걸 쓰고 나왔을 뿐, 나도 개인적으로 이 가면은 별로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할게요. 저 가을 타요. 그래서 오늘은 전하를 만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에요.”

    “저런, 뒷조사하다 걸려서 많이 놀랐군요.”

    “아닌데요? 증거 있어요?”

    “증거는…….”

    말끝을 흐린 크루엘로가 직원이 사라진 방향을 쳐다봤다.

    쳇.

    “아, 그래요, 했어요. 뭐, 이상해요? 전하와 결혼하고 싶어서 이상형 좀 캐 보려고 갔는데 한마디도 안 해 주던데. 그럼 조사를 안 한 거나 마찬가지 아니에요?”

    “그럼요, 마찬가지요.”

    “어……. 그렇…… 죠?”

    “기쁘네요. 서로 생각이 통했다는 점에서.”

    “네? 통하다니 뭐가…….”

    “실은 저도 달링을 더 알고 싶어서 뒷조사를 했거든요.”

    그래, 물론 안 했을 리는 없겠지.

    그런데 그게 당당하게 할 말이야?

    나도 좀 더 어깨를 펴고 대할걸, 괜히 억울해졌다.

    “별 내용은 없었지만요.”

    “저는 한 마디도 못 들었는데 전하께서는 다 알아내셨다고요?”

    “안타깝게도 무능력한 길드 위주로 다니셨나 봐요. 제 정보는 넘치도록 많아요, 달링.”

    “아, 그래요?”

    될 대로 되라지.

    “좋아요, 그러면.”

    나는 가면을 벗으며 말했다.

    “우리 서로를 알아 갈 시간이 필요하겠네요.”

    정전기가 잔뜩 인 머리를 손가락으로 대충 빗고 발돋움을 해 크루엘로의 옷깃을 잡았다.

    콱 잡아당기자 그가 어정쩡하게 허리를 낮추었다.

    가까워진 얼굴에 나는 내가 썼던 가면을 씌웠다.

    “……레이디?”

    자기가 촌스럽다고 비하한 가면을 쓴 모습이 퍽 보기 좋다.

    “전하께서도 정보 길드 하나, 둘, 셋쯤은 알고 계시겠죠?”

    “글쎄요, 하나둘셋이란 이름의 길드는 처음 듣네요.”

    “아시는 곳이 있다니 다행이네요.”

    “제가 방금 그렇게 말했던가요?”

    “상대방을 궁금해하는 게 그토록 자연스러운 일이라면 마땅히 해야죠.”

    나는 크루엘로의 시종에게 물었다.

    “데이트 좀 하려는데 전하의 마차는 어디 있나?”

    ***

    외진 골목길을 돌아돌아 들어가야 하는 곳.

    마법으로 가려 놔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구석에 낡은 문이 있다.

    삐그덕 소리 나게 생긴 그것이 조그만 소음조차 없이 매끄럽게 열렸다.

    그 안으로는 동굴처럼 긴 통로와 고양이의 눈처럼 빛나는 마법 등 몇 개가 떠 있다.

    그야말로 내가 상상하던 정보 길드의 모습이었다.

    미뉴엣이 소개해 준 곳과는 달랐다.

    나는 깊이 눌러쓴 후드를 한 번 더 끌어당겼다.

    크루엘로에게 가면을 줘 버려서 얼굴을 가릴 수단이 이것뿐이었으니.

    “마음에 들어요?”

    크루엘로의 말을 못 들은 체하고 나는 좀 더 주변을 구경했다.

    머잖아 검은 가면을 쓴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이 필요해 오셨습니까?”

    성별 모를 사람은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어린아이 같기도 하고 노인 같기도 한 목소리였다.

    마도구로 목소리를 분간할 수 없게 한 모양이다.

    세상에, 직원마저 완벽해.

    순간적으로 감동이 치솟았지만, 크루엘로의 모습을 보니 이성이 돌아왔다.

    팔짱을 끼고 의자 등받이에 여유롭게 기댄 모양새가 꼴 보기 싫다.

    이 상황을 즐기고 있나 보지?

    그래서.

    “화이트데저트 공작의 정보를 내 주세요.”

    손가락으로 크루엘로를 가리켰다.

    “대가는 이분이 치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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