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마리오네트-5화 (5/162)
  • 5화

    ‘교육’이라는 단어에는 거부감이 든다.

    내가 받은 교육이란 게 다 강압적이어서 그렇다.

    마지막이 에이미 때였던가, 나는 조금 긴장하며 교사들을 만났다.

    그리고.

    “백 점입니다. 지엽적인 부분까지 전부 아시는군요.”

    “수업을 더 진행할 필요가 없겠네요.”

    “문학적 소양은 충분하십니다.”

    “예법도 흠잡을 곳 하나 없습니다.”

    괜히 걱정했네.

    이미 다 아는 내용인데, 한 번 배운 걸 잊어버릴 리가 있나.

    콧대가 하늘까지 솟았다.

    내가 페불라의 신도다!

    “역사, 정치, 문학, 사교 다 합격점이네.”

    미뉴엣이 의아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춤 점수는 왜 이래? 너무 차이 나는데.”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다.

    이 몸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인지, 아니면 시오라의 운동 신경이 원래 별로였는지, 몸을 완벽히 움직일 수 없었으니까.

    “어디서 배웠어?”

    “어릴 때 다 배웠지. 내가 기억력이 좋거든.”

    “기억 상실이라며?”

    “그러게?”

    왜 이건 기억나지?

    나는 서둘러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뉴엣이 의심스럽게 쳐다봤지만, 모르는 척하면 해결된다.

    그녀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면 기본 교육은 다 뺄게.”

    “응!”

    힘차게 긍정!

    “그리고 말 나온 김에, 기억 없는 거 어디에다 말하지 마. 정신 질환은 평판에 마이너스야.”

    “음. 백작님께도?”

    “기껏 해놓은 협상이 휴짓조각이 되겠지. 아버지는 위험을 감수할 분이 아니야.”

    “베─.”

    “베티도 당연히 입단속했어. 너만 조심하면 돼.”

    그러고 보니 크루엘로도 ‘기억 상실’은 모르는 듯했지.

    베티의 입이 꽤나 무거운 모양이다.

    “문제가 더 있어.”

    “뭐.”

    “미뉴엣, 전에 내 뒷조사를 했댔지? 뭐, 보네티 내부의 정보 조직이라도 쓴 거야?”

    “그쪽은 가주 직속이라 내가 못 건드려. 정보 길드를 썼는데 그건 왜.”

    그렇지, 정보 길드!

    전부터 길드에는 꽤 흥미가 있었다.

    하나 첫 번째 몸은 어린애였고 두 번째 몸은 돈 없는 하녀라 손님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나는 내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기억을 채워야 해.”

    “전에도 말했지. 털 것도 없었어.”

    “내가 들으면 다를 수도 있잖아. 뭔가 기억날 수도 있고.”

    “그래서?”

    나는 기쁘게 손을 내밀었다.

    “돈 줘.”

    ***

    구름처럼 새하얀 장발과 긴 수염.

    마치 현자 같은 외관의 노인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헤오림, 화이트데저트의 대원로였다.

    “격이 떨어지오.”

    두 걸음쯤 뒤에서 크루엘로는 잠자코 대원로의 말을 들었다.

    노인이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해할 수가 없구려. 원로회에서 추진한 상대는 보네티 소백작이었는데 갑자기 그걸 바꾸시겠다?”

    “상관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같은 보네티인데요.”

    “허허, 같은 보네티라니. 피도 섞이지 않은 백작의 양조카가 그 후계와 어찌 같단 말이요?”

    대원로가 고개를 돌려 짐짓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나 수염을 쓸어내리는 손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열화 같은 분노를 티 내듯이.

    기껏 완벽한 혈통까지 만들어 놨는데 오물을 흩뿌려도 유분수지.

    화이트데저트 공작이 뭣 때문에 출신도 모를 버러지와 맺어진단 말인가.

    거사가 성사된 후로도 두고두고 조롱거리로 남을 약점이다.

    대원로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분께서도 용서치 않으실 것이다.

    “그래서 뭘 바라시는 겁니까, 대원로님.”

    “혼담을 깨시오. 이번 밀수 건으로 난리가 났으니 그걸 빌미 삼으면 그만이겠지.”

    “모르셨나 보군요. 제가 좋은 관계를 맺어 보자 서신을 쓴 건, 밀수 건을 알고 난 후입니다.”

    “그러면 불미스러운 일을 새로 만들면 될 일이야.”

    “대원로님.”

    “모든 건 이 늙은이에게 맡기시면 잘 해결될 것이오, 가주.”

    “가주……. 제가 가주가 맞긴 합니까?”

    크루엘로가 차갑게 반문했다.

    그는 눈가를 일그러뜨린 채 노인을 노려보았다.

    “가문에서 제 뜻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는데요. 이럴 거면 대원로께서─.”

    “그만.”

    대원로의 묵직한 목소리가 짧은 반항을 짓밟았다.

    노인이 손에 쥔 케인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케인의 머리에서 청람색 연기가 피어났다.

    “모든 건 화이트데저트를 위해서라오, 가주.”

    크루엘로의 눈빛이 몽롱하게 풀렸다.

    화이트데저트의 젊은 공작이 순종적으로 대답했다.

    “맡기겠습니다, 대원로님.”

    꼭 이렇게 무력을 쓰게 만들지.

    대원로는 소리 나게 혀를 차고는 공작의 집무실을 떠났다.

    케인이 바닥을 짚는 소리와 느릿한 발걸음 소리가 번갈아 멀어진다.

    남겨진 크루엘로는 멍한 눈을 한 채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그러다 대원로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을 무렵.

    “푸흡!”

    푸하하, 참아 왔던 웃음을 터뜨렸다.

    시원스러운 웃음소리가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세뇌당한 척하느라 어떻게든 참았지만, 얼마나 우스운가.

    품위를 지키려 애쓰며, 수염까지 파르르 떨리는 꼴이란.

    “그래, 열받을 만도 하지.”

    기껏 이거저거 재 가며 보석을 골랐는데 은근슬쩍 모조품으로 바뀌었으니, 저 지독한 혈통주의자가 얼마나 화가 났을까.

    덕분에 정말로 시오라 벨벳과 결혼하고 싶어졌다.

    크루엘로의 시선이 책상 위로 향한다.

    그곳엔 대원로가 두고 간 서류가 있었다.

    「1) 시오라 웬디 벨벳. 20.

    ─웬디 벨벳과 멜로스 벨벳이 454년, 대상을 입양. 당시 10세.

    ─친부모의 신원은 파악 불가.

    ─대상의 부모는 작월(464년 8월) 방화 사건으로 사망.

    ─범인은 벨벳 저택에서 일하던 사용인, 한스. 6일 전 사형이 확정되어 집행 대기 중.

    특이점 1. 대상은 침실에서만 생활한다. 부모 생전에도 동일.

    특이점 2. 개별적으로 맺은 인간관계 전무.

    특이점 3. 웬디 부부는 대상을 방치했다.

    부부의 저택에서 일하던 사용인이 대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함.

    1. 표정이 없고 말을 하지 않는다.

    2. 저택을 나오지 않지만, 저택에서도 거의 마주치지 않는다.

    3. 사용인들끼리는 대상을 인형, 유령이라고 지칭했다.

    2) 벨벳 저택 방화 사건.

    …….」

    대원로가 ‘온건하게’ 저를 설득하기 위해 가져온 서류였다.

    결국에는 실패했으나 제 마음에 의혹을 심는 데는 성공했다.

    “저는 가족이란 마음으로 이어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미뉴엣 대신 전하랑 약혼하고 싶어요.”

    크루엘로가 입매를 늘였다.

    그 모습은 유쾌해 보이기도 불쾌해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인형이나 유령처럼 보이지는 않던걸.”

    어느 쪽일까.

    저를 설득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커서 대원로가 소설을 쓴 걸까.

    대원로의 부하가 목이 달아나고 싶어 안달을 낸 걸까.

    그도 아니면.

    “시오라 벨벳이 달라진 걸까.”

    유령처럼 생기가 없다가 돌변한 사람은 그의 인생에도 둘이나 있었다.

    그리고 그 둘은 크루엘로의 마음을 한 움큼씩 뜯어 갔다.

    그들과 연관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관심이 생겼다.

    다만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

    이제 누군가에게 영혼을 내줬다가 그만큼 도려지는 경험은 내키지 않았으니까.

    설사 상대가 죽을 만큼 다정하더라도.

    죽일 만큼 매력적이더라도 더는.

    어차피 호의로 다가온 것도 아닐 테니 마음을 다잡기도 쉬울 것이다.

    “또 금발이라.”

    서류 뭉치가 그의 손아귀에서 뭉개졌다.

    “지겨워 죽겠네.”

    ***

    12년 전의 어느 날.

    “너 대체 누구야.”

    9살, 크루엘로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앞에는 익숙하면서 낯선 이가 앉아 있다.

    슈가 파우더처럼 콧등에 주근깨를 흩뿌린, 유독 동그란 눈의 여자아이.

    아이의 이름은 에이미 로열샌드, 크루엘로의 약혼자였다.

    약혼은 불현듯, 크루엘로의 의사를 무시하고 진행됐다.

    그럼에도 외로웠던 아이는 에이미와 만나길 고대했지만, 기대는 짓물렀다.

    에이미는 크루엘로와 만나며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부풀었던 기대가 터지자 실망감이 빈자리를 차지했다.

    크루엘로는 에이미가 싫었다.

    그래도 약혼녀랍시고 계속 얼굴을 봐야 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한동안 만날 수 없다고 전해 와 기뻤지만, 또다시 그 애를 만나는 날이 됐다.

    크루엘로는 발을 질질 끌며 겨우겨우 응접실로 들어섰다.

    벽과 대화할 생각에 문을 열면서부터 치가 떨린다. 그랬는데.

    “와……. 네가 크루엘로야? 뭐야? 왜 귀여워?”

    에이미 로열샌드가 이상하다.

    마치 자신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했고 태도도 전과 달랐다.

    “왜 반말을 쓰냐고? 어……. 맞아, 우리 존댓말 썼지.”

    “친해지려면 반말을 쓰는 게 좋대. 아이들끼리는 그렇댔어.”

    “오늘 하늘이 참 파랗더라. 응. 원래 파랗지. 나도 알고는 있었어.”

    “소르베 먹어봤어? 정말 맛있더라. 그렇게 달고 시원한 게 세상에 있을 줄 몰랐어.”

    “근데 아까부터 나만 말하는 것 같아. 너는 할 이야기가 없니?”

    좋게 말하면 참새처럼 조잘거렸고 나쁘게 말하면 수다스럽게 퍼부어 댔다.

    이 자리에 다른 누가 있었더라도 의심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크루엘로의 애독서는 몬스터 백과사전이었다.

    그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도플갱어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그 사람으로 모습을 바꾼다.」

    그런 이야기도 쓰여 있었다.

    「밴시로 대표되는 유령형 언데드는 이따금 사람의 몸을 빼앗아 차지한다.」

    이런 이야기든 그런 이야기든 해결책은 같았다.

    「의심 가는 상대에게 정체를 물어보라. 그러면 반드시 수상한 징조를 드러낼 것이다.」

    그래서 크루엘로는 용기를 내 물었다.

    “너 대체 누구야. 에이미가 아니잖아.”

    “어……?”

    에이미는 누가 봐도 당황했다.

    사람의 눈이 그렇게 격렬하게 흔들릴 수 있는지 크루엘로는 처음 알았다.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저잖아요, 에이미.”

    낯빛은 하얘지고 목소리는 스타카토 리듬을 넣은 듯 떨렸다.

    말투도 다시 존댓말이다.

    “거짓말하지 마. 에이미는 절대 응접실에서 세 번 넘게 말하지 않아.”

    사색이 된 에이미, 아니지 에이미의 흉내를 내는 무언가는 도망쳤다.

    크루엘로는 기뻤다.

    괴물을 무찔렀다는 승리감이 하늘을 찔렀다.

    ‘에덴에게 말해 줘야지!’

    하지만 괴물은 퇴치된 게 아니었다.

    이튿날 괴물은 다시 화이트데저트 공작저의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머리를 말총처럼 묶은 여자아이는 크루엘로가 들어오기 무섭게 말했다.

    “난 에이미야.”

    표정도 무섭도록 찡그린 채였다.

    크루엘로는 내심 겁에 질렸지만, 겉으로는 안 그런 척했다.

    “거짓말하지 마.”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 겨우 다섯 번 봐 놓고.”

    “에이미는 응접실에서 입을 열지 않았어!”

    “그냥 말하기 싫었을 수도 있잖아.”

    “그러면 어제는 왜 그렇게 떠들어 댔는데!”

    “너랑 친해지고 싶었어.”

    “어……?”

    “그런데 네가 날 상처 줬어.”

    에이미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슬퍼했다.

    동그란 눈동자가 젖어 드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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