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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4화 (4/162)
  • 4화

    관객들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수군거렸다.

    그러나 가면을 쓴 귀족들은 돌처럼 굳었다. 숨은 쉬고 있나?

    그 가면을 열어 보지 않고도 파리하게 질린 낯이 보이는 듯했다.

    “저, 저 사람은……!”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쉿, 조용히 하세요!”

    당혹스러운 속삭임이 개미처럼 바닥을 기어 다닌다.

    인형사들도 당황했는지 힘을 잃은 마리오네트가 기이한 모양으로 쓰러졌다.

    크루엘로는 소란을 즐기듯 성큼성큼 걸었고 발걸음 소리가 정적을 울렸다.

    그리고 그 속에는 어딘가 서늘한 울림도 섞여 있었다.

    스릉, 날붙이가 밖으로 나왔다.

    “으아악!”

    누군가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놀라 굳어 있던 크루엘로의 타깃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게늄 자작과 그에게 가방을 건네받은 이가 다급히 달아나려 했다.

    그 등을 놓치지 않고 크루엘로가 팔을 휘둘렀다.

    허공으로 번지는 붉은색.

    “저 미친놈…….”

    나는 한탄스레 중얼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아슬아슬하던 정적은 단번에 조각나고 사방에서 요란한 비명이 터졌다.

    사람들이 서로를 밀치며 극장을 빠져나갔다.

    군중의 발소리가 비명처럼 울렸다.

    그 와중에 홀로 여유로운 사내 하나.

    “갑자기 도망치면 어떡하나. 놀라서 검까지 휘둘러 버렸군.”

    “제,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공작전하.”

    “왜? 그런 게 중요할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자작의 말을 무시하고 크루엘로가 바닥을 내려다봤다.

    그는 근처에 떨어진 가방을 솜씨 좋게 차올려 손에 쥐었다.

    “극을 보는데 뭐 이런 거추장스러운 걸 들고 왔어.”

    “그건……!”

    “그러고 보니 자네가 이걸 친구에게 건네주려고 하던데 말이야.”

    “돌려주십시오!”

    자작이 크루엘로에게 달려들었으나, 발길질 한 번에 나동그라졌다.

    그가 신음하는 동안 크루엘로는 가방을 열고 내용물을 쏟았다.

    와르르, 새하얀 보석 같은 알갱이들이 바닥을 대굴대굴 굴렀다.

    달아나지 못한 사람들의 정적이 더 깊어졌다.

    비죽, 크루엘로가 입꼬리를 틀었다.

    “우애가 아주 깊어?”

    “이익!”

    게늄 자작은 이판사판이라는 듯 케인을 분리해 휘둘렀다.

    지팡이에 숨겨졌던 검날이 서슴없이 크루엘로에게 향했으나…….

    “크아악!”

    자작의 공세는 한 합 만에 끝이 났다.

    내 쪽에선 거의 뒷모습만 보였으나, 그것만으로도 고양이 앞의 쥐 꼴이었다.

    저러라고 가르쳐 준 검이 아닌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면서 모르고 싶었던 정보까지 얻었다.

    크루엘로 화이트데저트는 엇나갔다는 말이 귀여울 정도로 막 나가고 있었다.

    그는 정확히 〈운명〉에서 묘사된 그대로 자라났다.

    페불라시여.

    “보네티 백작의 부하로 얼굴까지 알려진 사람이 이 꼴이라니, 쯧.”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일단은 성취에 만족하며 돌아가자.

    저 꼴을 더 보고 싶지도 않아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마침 여기, 보네티 백작 영애까지 계신데 자넬 무어라 생각하겠느냔 말이야.”

    크루엘로가 폭탄을 돌렸다.

    그는 내게로 고개를 돌렸고 사내를 따라 시선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나 또한 극장에 들어올 때 가면을 썼으나, 이름이 까발려지면 하등 의미 없다.

    나는 혀 밑으로 욕설을 중얼거렸지만, 미치광이는 멈추는 법을 몰랐다.

    “이리 와 주시지 않겠습니까, 레이디. 부친의 부하를 계도하셔야지요.”

    이쯤 되면 차라리 웃음이 날 지경이다.

    “소백작님께서…… 여기 와 계시다고?”

    철철 피를 흘리던 게늄 자작이 당황하여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나를 발견한 순간, 당혹감은 다른 의미로 변질하였다.

    머리 색만 봐도 미뉴엣이 아니란 티가 났겠지.

    “시오라 벨벳?”

    황당함과 경멸이 섞인 그 중얼거림을 크루엘로가 들었다.

    그는 곧바로 미끼를 물었다.

    “보네티에서는 원래 주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가?”

    “아니, 저분은 보네티 백작 영애가─.”

    “뭐, 생각해 보면 그렇군. 자네가 주인을 홀대하는 건 자네 마음이니. 그런데.”

    듣는 시늉도 않고 크루엘로가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돌연 검을 든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잠깐, 진짜로?

    “내 약혼녀가 홀대받는 걸 못 참는 건 내 마음이거든.”

    “저, 전하, 그게 아니라, 살려!”

    “신이시여, 사랑에 눈먼 사내를 용서하소서.”

    “잠!”

    “아아악!”

    차마 만류하기도 전에 검날이 아래로 향했다.

    검날이 여러 파편으로 쪼개져 사방을 날았다.

    개중 하나가 무대의 조명을 건드렸는지 무대의 불빛이 느리게 깜박였다.

    억눌린 사람들의 숨소리가 허공을 아슬아슬하게 떠다녔다.

    검이 내리꽂혔던 바로 앞, 몸을 둥글게 만 자작은 머리를 감싸고 벌벌 떨었다.

    살아 있는 채다.

    “풉.”

    돌연 웃음소리가 났다.

    공간이 숨 막힐 듯 조용해졌던 터라 발원지를 찾기란 쉬웠다.

    크루엘로.

    크루엘로 화이트데저트가 등을 둥글게 구부린 채 웃었다.

    처음에는 작게, 그러다가 점점 커져 종내 무대가 다 울리도록 큰 소리로.

    극장에 남은 모든 이들이 아연하게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게늄 자작의 얼굴은 거의 죽은 사람 같았다.

    크루엘로가 툭, 그의 등을 두드렸다.

    “농이었네.”

    그는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다음 순간 바깥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백색 갑옷에 태양 문양, 황실 기사단이었다.

    그들은 차마 제 발로 서지도 못하는 게늄 자작과 그에게 가방을 건네받은 이에게 향했다.

    “여기가 극장이라 나 또한 연극을 해 본 것뿐이네. 자네를 처단하는 건 황제폐하의 몫이지.”

    크루엘로는 자작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두 눈을 감았다.

    양팔을 벌리기도 했다.

    그러고는.

    “위대하신 황제폐하를 위하여.”

    그 뒤통수를 후려 패고 싶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으리라고 믿는다.

    ***

    「지식은 축적되고 돈은 쌓이며 역사는 나아간다.

    그런데 어찌하여 힘만큼은 인간의 짧은 일생 안에서 모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가.

    고대의 누군가는 생각했다.

    ‘티끌만 한 힘이라도 수백 년을 모으면 신에 닿을 수 있을 텐데.’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게 모리온이다.

    본디 유한하던 인간의 마법이 쌓여 막대해졌다.

    그러며 상당한 양의 불순물이 섞여 들었고 에너지는 부정해졌다.

    힘을 다룰 수 있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누군가는 다시 생각했다.

    ‘모리온을 다룰 그릇을 만들자.’

    부정한 힘에 친숙한 핏줄을 찾아 맺고 깁고 연결했다.

    수백 년의 노력 끝에 마침내 적임자가 태어났다.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크루엘로였다.」

    “그리고 세계는 멸망했다.”

    그 결과를 바꾸기 위해 신전 밖으로 나왔고 몇 년을 노력했다.

    하지만 모든 게 〈운명〉 그대로 같다. 노력한 보람도 없이.

    침대에 앉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세 가지다.

    1. 도구 = 모리온

    2. 제작대 = 화이트데저트 원로회

    3. 사용자 = 크루엘로

    당장의 멸망을 막더라도, 이 세 가지를 없애지 않으면 언제든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그래서 에이미가 되었을 때, 나는 크루엘로를 교화시키려는 한편으로 모리온을 찾아다녔다.

    그 부정한 덩어리를 없앤 뒤 원로회마저 제거하면 깔끔할 테니까.

    물론.

    “화이트데저트 공작저엔 없었지.”

    아무리 뒤져 봐도 나오지 않았다.

    추측건대 모리온은 화이트데저트 공작령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 결혼은 해야 해.”

    의심받지 않고 공작령을 뒤적거리려면 마땅한 신분이 필요하니까.

    결국, 결론은 같고 경로도 그대로다.

    공연히 크루엘로의 행태에 화내지 말자.

    나는 심호흡을 하며 극장에서 봤던 걸 잊어버리려 노력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기척을 이미 느낀 터라 나는 놀라지 않고 인사했다.

    “안녕, 미뉴엣.”

    미뉴엣 보네티였다.

    “방금 황실 기사들이 아버지를 모셔 갔어. 극장에서 무슨 일이 있던 거야?”

    “글쎄, 백작님 부하의 일탈? 밀수품을 들여왔다던데.”

    미뉴엣이 옅게 눈가를 찡그렸다.

    “게늄 자작도 너무하더라. 하필이면 공작과 만나는 장소에서 거래할 건 뭐람.”

    “혼담을 받아들일 거면 극장에 나오란 말은 나만 알고 있었어.”

    “음?”

    “제대로 안 봤구나? 초대장 말미에 적혀 있었는데.”

    “애당초 공작이 밀거래 장소로 불러낸 거구나.”

    미뉴엣 속을 뒤집어 놓으려고 아주 작정했네.

    나는 감탄하여 입을 벌렸다.

    “그거라면 됐어, 종종 밀수품을 다루시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대수롭지 않게 말하네.”

    “고생 좀 하시겠지만, 가문이 망하기야 하겠어? 꼬리만 자르면 그뿐인데.”

    그 대상이 제 부친인데도 미뉴엣의 말씨는 냉랭했다.

    문득 식사 자리에서 가보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떳떳하게 살지 그러셨어요! 하다못해 약점이라도 잡히지 마셨어야죠! 왜 아버지의 비리 때문에 보네티가 공작의 장난감이 돼야 합니까!”

    밀수 정도로 동요하지 않는 걸 보면 백작의 비리는 더 규모가 큰가 보다.

    하여튼 세상에 나쁜 놈이 너무 많아.

    돌아갈 때 죄목을 싹싹 긁어 고발하고 가야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잖아.”

    “중요……. 아, 혼담 상대를 바꾸는 데 성공했냐고?”

    “말해.”

    “반가워, 언니.”

    아무렴 달링 소리까지 들었는데 말을 바꾸진 않겠지.

    조건을 아직 안 들었다는 건 비밀로 하기로 했다.

    놀랄 줄 알았으나 미뉴엣은 웃었다.

    “실은 그것도 알아.”

    “어?”

    “조금 전에 이런 게 왔거든.”

    그녀가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화이트데저트의 인장이 박힌 서신.

    좋은 관계를 맺게 되어 기쁘단 내용이 적혀 있었다.

    결정적으로 서신을 마무리한 인사말이 이랬다.

    「친애하는 레이디, 시오라 보네티께 안부를 전해 주시길 바랍니다.

    Chruello D. Whitedesert.」

    확인 사살이네.

    그 자체야 예상하던 일이니 놀랍지 않았지만, 미뉴엣의 표정은 놀라웠다.

    아예 다른 사람처럼 웃고 있는데.

    “화도 안 나? 극장으로 불러 놓고 너희 아버질 고발했는데.”

    “아무렴 보네티를 개한테 주는 것보다야 낫겠지.”

    결혼하면 백 퍼센트 가문을 빼앗길 거라고 생각했나?

    크루엘로의 평판이란.

    미뉴엣은 태도마저 사근사근해졌다.

    “이왕 아버지께서 입궁하셨으니 입적 서류를 처리하기도 쉬울 테고 말이야.”

    “오. 너 되게 친절해졌다.”

    “스쳐 지나갈 식객과 가족의 취급이 같아서야 되겠어?”

    그녀가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보네티가 된 걸 축하해.”

    그 말을 들으니 한 발자국을 떼었다는 게 실감 났다.

    길거리에서 동사하진 않겠군.

    “교육은 내일부터 진행하자.”

    “……교육?”

    “아무렴 보네티 백작의 차녀인데 이름에 누가 되진 말아야지.”

    “어…….”

    “걱정하지 마, 제대로 된 사람을 붙여 줄 테니까.”

    내 손을 붙드는 미뉴엣의 손길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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