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마리오네트-3화 (3/162)
  • 3화

    “……맞는 말이야, 네가 도움이 될 때의 얘기겠지만.”

    미뉴엣이 다소 신경질적으로 내 손을 쳐 냈다.

    하지만 눈빛은 외려 좀 부드러워졌다.

    그녀가 내게 웬 봉투를 내밀었다.

    나는 지체 없이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안에 든 것은.

    “인형극 티켓?”

    “취향이 참 고상하신 공작전하께서 전하시길, 혼담을 승낙할 거면 그 자리에 나오라더라.”

    “아하.”

    “불똥 튈 일 없도록 네가 설득해.”

    입양아로 상대가 바뀌어도 괜찮은지 확실히 하란 말이지.

    좋아, 기회는 생겼다.

    티켓을 전달한 미뉴엣은 곧바로 몸을 돌려 걸어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침실로 돌아왔다.

    ***

    극장은 캄캄했다.

    마냥 크지도 작지도 않은 공간으로 사람은 절반쯤 차 있다.

    귀족인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 제법 보였고 나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귀족이 평민의 취미를 즐기는 건 책잡힐 일이라나 뭐라나.

    나는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파묻은 채 생각에 잠겼다.

    그 주제는 당연히,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이었다.

    세계를 멸망시킬 예정인 악당.

    이 거창한 수식어의 주인 때문에 나는 세 개의 몸을 거쳤다.

    10살~12살, 에이미.

    15살~17살, 비가.

    그리고 지금, 20살의 시오라.

    공교롭게도 꽤 규칙적이다. 이니셜이 A, B, C일 건 뭐람.

    공통점은 하나 더 있다.

    “다 금발이지.”

    나는 내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이쯤에서 나는 내 신의 취향을 의심해 본다.

    규칙에 강박증이 있을 것이며 금발을 좋아할 것이다.

    아무튼.

    [곧 공연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자리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 몸을 거치며 느낀 건, 아이는 금방금방 자란다는 것이다.

    같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엔 변화가 더디게 느껴지나, 죽고 다음 몸으로 넘어가면 시간의 격차만큼이나 가파른 변화가 있었다.

    에이미 때 만난 악당은 순진무구했다.

    비가 때 만난 악당은 어긋나 있었다.

    그러면 시오라로 만나는 그는 어떨까.

    별로 기대되진 않지만, 일단 만나고 나서 판단할 문제다.

    아니, 그런데 이만큼이나 생각했는데 왜 아직도 안 와?

    “초대장을 보냈으면 미리 와야 정상 아냐?”

    “와 있는데.”

    돌연 목소리가 들렸다.

    무대에서 난 게 아니다.

    좀 전까지 비어 있던 옆자리.

    나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 자리에서.

    “안 본 새 보네티 소백작의 얼굴이 달라졌기에 감상 중이에요.”

    컴컴한 어둠에 어렴풋한 형체가 묻혀 있다.

    장신의 사내는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그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려 둔 채였다.

    얼굴의 반을 가리는 은색 가면에는 눈구멍만 뚫려 있다.

    틈새로 보이는 눈이 익숙한 모양새로 휘었다.

    “안녕. 가짜 소백작, 날 만나러 왔겠죠?”

    그는 얼굴조차 드러내지 않았고 공간은 캄캄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나는 그 모습 위로 여러 잔상을 겹쳐 보았다.

    10대 후반의, 중반의, 초반의.

    청소년의, 소년의, 아이의.

    흐린 하늘색 머리칼의 청년이 시간을 역행하는 듯한 환영.

    “너 대체 누구야.”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린다.

    나는 멈췄던 숨을 토했고 환영은 자취를 감췄다.

    그러자 드러난 건 더 자란 체격과 더 깊어진 눈과 애티가 다 사라진 목소리였다.

    나는 신음처럼 그의 이름을 내뱉었다.

    “……크루엘로.”

    크루엘로 화이트데저트.

    수년 만에 다시 보는 악당이었다.

    “초면인데 이름을 부르다니 화끈하셔라.”

    “아. 뭐, 미안해요. 이름을 워낙 많이 들어서.”

    저절로 입에서 변명이 흘러나왔다. 그러며 나는 고민했다.

    어떻게 말할지 머릿속에 정리되었던 이야기가 다 엎어진 기분이다.

    뭐부터 이야기해야 하지.

    크루엘로가 턱 끝으로 무대를 가리켰다.

    “인형극은 마음에 안 들어요? 쳐다도 안 보네.”

    그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무대를 쳐다봤다.

    관절마다 실이 매달린 인형들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커튼이 꽤 깊게까지 내려와 있어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인형들이 무언가 노래하고 있는데…… 통,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와, 심장 소리가 엄청나네요.”

    지금 많이 당황했으니까.

    왤까, 누굴 만날지 모르고 온 것도 아닌데 마음이 이상하다.

    전쟁터에서 헤어졌던 사람을 다시 만나면 이럴까.

    그런 나를 크루엘로는 빤히 바라봤다.

    “설레서? 하기야 나도 그래요. 청혼 자리에 사람이 바뀌었다니 엄청난 서프라이즈잖아요.”

    “음, 실망한 건 이해해요.”

    “실망일 리가. 난 괜찮아요, 금발이랑 잘 맞거든요.”

    괜히 찔리게 하네.

    “극을 보기 싫으면 이야기나 해요. 하고 싶은 말 있죠?”

    “여기서요?”

    “조용히 말하면 아무도 모를 거예요.”

    세상에 혼담 상대를 바꿀지 말지 결정하는 협상을 극장에서 하라니 미친 사람처럼 과감하다.

    그런데 그 말대로긴 했다. 아무도 이쪽을 쳐다보지 않는다.

    작게 말하긴 했지만, 장소의 특성상 어떻게든 들렸을 텐데.

    뭘까.

    나는 잠시 숨조차 죽이고 감각에 집중했다가 돌연 크루엘로의 겉옷을 열어젖혔다.

    안쪽에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마도구?”

    “……맞아요. 근방의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하는 용도죠.”

    그러면 그렇지.

    소소한 승리감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나는 다시 준비해 온 이야기를 정리할 수 있었다.

    강아지야, 소리를 빌려 줘!

    “전하께서는 가족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전하란 호칭 참 입에 안 붙네.

    안 본 새 작위를 계승한 크루엘로가 잘못했다.

    “저는 가족이란 마음으로 이어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결론만.”

    “제가 미뉴엣 대신 전하랑 약혼하고 싶어요.”

    크루엘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아 참.

    “소개가 늦었네요, 제 이름은─.”

    “시오라 벨벳.”

    “이에요, 나이는─.”

    “스물.”

    “이고 제 부모님께서─.”

    “백작의 동생 부부.”

    “예요. 성이 ‘보네티’는 아니지만, 전하께서 승낙하시면─.”

    “입양해 준다고 했고요.”

    “와, 다 아시는구나!”

    역시 내 뒷조사도 이미 마쳤구나. 여우 같긴.

    부연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어 편하긴 했다.

    나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꼭 미뉴엣이어야 하는 건 아니죠?”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나는 안다.

    미뉴엣이 〈운명〉에서 뭘 했는지 낱낱이 기억하고 있으니, 그 두 배는 더 해 줄 수 있다.

    크루엘로가 샐쭉 눈을 휘었다.

    “나랑 결혼하면 보네티에서 뭘 준다고 하던가요.”

    “네?”

    “돈? 권력? 아, 보네티니까 정령 소환진이라도 준다든가?”

    “전하를 준다던데요.”

    회심의 플러팅인데 그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아니, 들은 척도 안 했다.

    “뭐가 됐든 거래가 될 만하니까 응했겠죠.”

    “제 말 못 들으셨어요?”

    “저도 레이디가 싫다는 건 아니에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뭔데요?”

    “지금은 말할 수 없어요.”

    나 혹시 놀림당하고 있는 건가.

    “들어주시겠다면 상대가 바뀌어도 상관없어요.”

    “무슨 조건인지도 모르고 그냥 들어주겠다고 약속하라고요?”

    “어차피 구두 계약인데 어때요.”

    안 내키면 깨 버리라는 거군.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은 내가 아쉬운 처지기도 하고.

    나는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루엘로가 웃었다.

    “좋아요, 달링.”

    “콜록!”

    호칭이 왜 저래? 크루엘로도 바꿔치기 당했나?

    “좀 아쉽긴 하네요. 소백작에겐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었는데.”

    “뭔데요?”

    “공연이요.”

    크루엘로가 다시 무대를 가리키곤 몸을 기울여 가깝게 붙었다.

    햇빛 아래서는 보석처럼 반짝이는 빛이 지금은 피가 뭉친 듯 어둡다.

    자라며 눈 색이 더 짙어진 건지도 모르겠다.

    “달링은 어떤 인형이 제일 마음에 들어요?”

    나는 무대 위의 인형을 아무거나 가리켰다.

    흑발을 늘어뜨린 제일 예쁜 인형.

    크루엘로는 보는 체도 안 했다. 나쁜 자식.

    대신 정갈한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는 저 인형이 마음에 들어요.”

    그의 검지 끝에 갈색 머리칼이 보였다.

    그 형체는 가면을 썼고 검은 코트를 입었다.

    한 손에는 큰 가방을, 다른 손에는 케인을 들고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인간이었다.

    고도의 플러팅?

    아까 내걸었던 조건이 혹시 다른 사람을 꼬셔도 내버려 두란 건가?

    나는 혼란스러웠고 크루엘로는 속삭였다.

    “보네티 백작의 부하예요.”

    “네?”

    “오늘은 밀거래를 하러 온 모양이에요. 꽤 괜찮은 상품을 들여왔거든요.”

    휴. 다행히 주제는 로맨스가 아니었다.

    안도하는 차에 크루엘로의 검지 끝에서 움직임이 일었다.

    ‘보네티 백작의 부하’가 슬금슬금 손을 움직인다.

    시선을 무대에 고정한 채, 그는 은밀하게 옆자리로 가방을 넘겼다.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 꾸벅꾸벅 조는 체하며 물건을 받았다.

    주변에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베아티투도. 황실과 신전에서 이중으로 반입을 금지하는 물품이에요.”

    “…….”

    “마정석보다 수준 높은 에너지원인데 불법적인 용도로 굉장히 매력적이거든요.”

    그는 한 음절 한 음절 나지막이 이어 갔다.

    퍽 뱀 같은 목소리로.

    “백작쯤 되는 고위 귀족이 골로 가진 않겠지만 들키면 꽤 골치 아플 텐데 왜 그랬을까요.”

    “지금 무슨 말씀을─.”

    “그리고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달링.”

    크루엘로가 느릿하게 내 머리칼의 끝부분을 만지작거렸다.

    어둠에 잠겨 드는 것처럼 그의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부친의 부정을 고발하는 게 좋을까요?”

    눈빛에도 색이 담길 수 있다면 이건 분명 재색이다.

    “아니면 눈감기를 바라시나요.”

    나는 눈가를 찡그리고 그의 손을 쳐 냈다.

    “아직은 아버지가 아니고 남인데요.”

    “나도 알아요. 준비해 온 대사가 아까워 읊어 봤을 뿐이지.”

    “미뉴엣한테 하려던 말이었어요?”

    “재밌잖아요.”

    혼담을 승낙하러 온 자리에서 부친의 비리를 고발하려 했다고?

    세상 다시없을 악취미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크루엘로를 쳐다봤고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만 재밌나 보네. 그러면 지루한 부분은 넘어가죠.”

    “또 뭘 하시려고─.”

    “부디 즐거운 시간 되시길.”

    말을 내뱉은 즉시, 크루엘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 시원스럽게 가면을 벗어 던졌다.

    어둠 속에 아름다운 얼굴 윤곽이 드러났고 나는 입을 벌렸다.

    불쑥 솟아난 인영에 몇몇이 이쪽을 쳐다봤다.

    크루엘로는 말릴 새도 없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 이게 누군가.”

    그는 단박에 극장 내 모든 사람의 관심을 빨아들였다.

    나는 당황했지만 크루엘로는 뻔뻔했다.

    그의 눈이 집요하게 ‘보네티 백작의 부하’를 좇았다.

    “게늄 자작 아니신가!”

    ……페불라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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