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계좌가…… 없어?
“없습니다?”
“예, 설사 있었다고 하더라도 남아 있을 리가 없지요.”
“없지요?”
“말씀대로라면 마지막으로 은행을 이용하신 지 수백 년도 더 되었으니까요. 관리하는 사람마저 없었으니 그렇죠.”
“없었으니 그렇죠?”
“……손님. 죄송하지만 정확히 알아보고 나중에 다시 찾아와 주십시오.”
직원은 재수 옴 붙었다는 얼굴로 나를 쫓아냈다.
나는 어어, 하며 쫓겨났다.
그럴 리 없다며 깽판을 치고 싶어도 아는 게 없으니 그럴 수도 없다.
마차 의자에 주저앉아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 돈…….”
동화 한 냥도 없다고?
분명히 콜티쉬 뱅크에 교단의 재산이 있다고 했다.
못해도 당시에 성 몇 개는 살 만큼 큰돈이었다고.
바깥에 나올 일이 있을까 봐, 계좌와 비밀번호를 혀가 닳도록 외워 뒀는데 없어?
언젠가 부자 놀이를 즐기겠다고 남의 몸에 들어가는 것도 꿋꿋이 참고 견뎌 왔는데 없다고?
“내 돈!”
선배 신도들이 날 속였어!
나는 무릎에 엎어져 울었다.
덜컹거리는 마차의 진동마저 속상했다.
다 지옥에나 가 버려라.
아니지, 이미 죽었으니 지옥으로 이사가 버려라.
***
열악하다.
텅 빈 침실로 올라가는 내 마음은 텅 비어 버렸다.
남은 시간은 3일, 아니지 뱅크에 다녀온답시고 하루를 허비했으니 이제 2일뿐이다.
“하녀든 시녀든 추천장을 써 달라고 부탁하자.”
남은 수는 그것밖에 없다.
내 양부모와 백작 간의 사이가 나빴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는 해 주겠지.
눈앞에 악당의 대저택이 아른거렸다.
“백작이면 그 정도 힘은 있겠지?”
그러고 보니 아직 이 집이 어느 가문인지도 모른다.
베티도 ‘백작님’이라고만 불렀는데 내가 어떻게 안담.
그래도 집 크기를 보면 그럭저럭 위세 있는 가문이겠지.
추천장을 구걸하기에 앞서, 이 집 사람들이 뭘 좋아하는지나 물어봐야겠다.
나는 종을 울리려다가 그냥 문으로 향했다.
어차피 침실에 오는 사람은 무작위일 텐데, 베티가 올 때까지 계속 울려 댈 수도 없고.
저택 내 분위기도 살필 겸 직접 베티를 찾으러 가야지.
그런 계산을 하며 문을 연 순간.
“와우.”
은발의 미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훌쩍 큰 키에 분위기는 청량했고 눈매는 날카롭다.
나름의 이유로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졌건만, 내 준엄한 미의식을 충족시키는 얼굴이다.
“야.”
목소리도 맑네.
무심코 대답하려다 나는 멈칫했다.
존대해야 할까, 하대해야 할까.
확률은 50%.
“응, 말해.”
“아버지께서 식사하러 내려오래. 마지막으로 같이 하시자고.”
“아, 아직 이삼 일 남았는데?”
“바쁘셔서 오늘 아니면 시간 못 내셔.”
휴, 당장 내일 쫓겨나는 줄 알았네.
베티가 날짜를 잘못 알려 준 건 아닌 모양이다.
나는 놀란 심장을 쓸어내리며 쫄래쫄래 그를 따라갔다.
뒤늦게 배가 고파졌다.
생각해 보면 시오라가 되고서 한 끼도 안 먹었지.
식탁 위에 차려져 있을 음식들을 생각하며 나는 다이닝룸에 도착했다.
그리고.
“앉거라.”
싸늘한 공기에 얻어맞았다.
정말 날 식사 자리에 초대한 게 맞나?
백작 일가는 날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니, 그뿐 아니라 자기들끼리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솔직히 추천장만 아니면 나도 눈앞의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어서, 열심히 음식이나 삼켰다.
어느 정도 배가 찬 뒤에야 주변을 살필 여력이 생겼다.
구성원은 셋, 나를 포함하면 넷.
나이 대가 좀 있는 남자와 남매였다.
아마도 중년 남성 쪽이 백작이겠지.
조금 전, 날 데리러 온 남자애와 똑 닮은 여자애도 있었다.
일가의 외모가 다 출중했다.
그 외에 특이한 건.
‘이거 뭐지?’
그들 전원에게서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성력과 비슷한데 좀 더 자연에 가깝다.
이게 기록으로만 보던 정령인가?
“이젠 결정을 미룰 수가 없다.”
백작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시선이 식탁에 향해 있는 채라 정확히 분간할 수가 없었다.
저거, 혹시 나한테 하는 말이야? 자정이 되자마자 나가라는 건 아니지?
페불라시여?
“미뉴엣.”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의미로 놀라 나는 포크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덜그럭.
내 출중한 예절 덕에 백작이 잠깐 멈칫했다.
“너도 알겠지만, 이 혼담은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덜커덕.
이번엔 스푼.
두 번 연속은 좀 짜증이 났는지, 백작이 내게 눈치를 줬다.
“화이트데저트 공작과 혼인하거라.”
쨍그랑.
와인잔이 깨졌지만, 이번엔 내 잘못이 아니다.
백작이 나를 노려봤다가 다급히 범인을 찾아 시선을 옮겼다.
그의 시선 끝에 선 청년은 나를 데리러 왔던 이였다.
“말도 안 됩니다!”
이쯤 되면 이름을 알아야 서술하기 편할 것 같은데.
“무슨 짓이냐, 가보트.”
아들 소개 감사.
별개로 나는 확인 사살에 당해 버렸다.
은발의 여자애가 미뉴엣, 그녀의 남매가 가보트.
정령의 기운 같은 게 느껴지며 화이트데저트에서 혼담이 들어온 상태라고 한다.
〈운명〉의 첫 구절을 다시 떠올려 보자.
「그날은 미뉴엣 보네티의 결혼식 날이었다.」
참고로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던 악당의 가문은 ‘화이트데저트 공작가’였다.
그렇다.
나는 지금 주인공의 저택에 와 있었다.
어쩐지 너무 접점이 없더라니, 악당에서 주인공으로 시점이 바뀌었을 뿐이군.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페불라시여.
내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가족 싸움은 계속되었다.
“아버지께서도 그러시면 안 되죠, 공작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시는 것도 아니면서!”
“아니까 거절할 수 없는 거다! 어떤 보복이 올지 아니까!”
“승낙하면 뭐가 달라지기라도 합니까?”
“최소한 보네티가 무너질 정도로 터뜨리진 않겠지, 이번 혼담은 그쪽 원로회에서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고 하니.”
“보네티를 통째로 들어 바치느니 무너지는 게 낫습니다.”
“이놈이 감히!”
“떳떳하게 살지 그러셨어요! 하다못해 약점이라도 잡히지 마셨어야죠! 왜 아버지의 비리 때문에 보네티가 공작의 장난감이 돼야 합니까!”
“시끄러우니 그만해, 가보트.”
“지금 입 다물게 생겼어? 미뉴엣!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결혼이고 소백작의 결혼인데!”
“그러면 달리 해결책이 있니? 뭐, 나 대신 결혼해 줄 보네티라도 있어?”
“미뉴엣!”
저 시끄러운 난장판을 요약해 보자.
화이트데저트 공작이 미뉴엣에게 혼담을 넣었고 거절하면 보복당할 예정이란다.
분위기상 승낙해도 좋은 꼴은 못 보는 듯했지만.
제삼자가 껴 있는 건 잊은 듯 소란스럽다.
나는 번쩍 손을 들었고 단번에 시선이 모였다.
“제게 좋은 생각이 있는데요.”
누구라 할 거 없이 그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그들이 내 입을 틀어막기 전에 얼른 본론을 꺼냈다.
“그 결혼, 제가 하면 어떨까요?”
이 난제의 해결책, 제가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백작은 내 의견의 가치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낄 데 안 낄 데를 구분해라.”
“음, 제가 엿들은 것도 아니고 식사에 초대도 받았는데 낄 자리가 아니에요?”
“그건 그저 도의상……. 됐다, 혼담에 방계를 들이밀었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
“그러면 저를 입양하시면 되죠.”
“뭐?”
“숙부님, 아니 아버지!”
어쨌거나 성씨가 ‘보네티’이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상석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무릎을 꿇으며 비장하게 소리쳤다.
“전부터 아버지로 모시고 싶었습니다!”
***
백작은 덥석 승낙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으니 어느 정도는 선방인가.
마음에 걸리는 건 저택에 없는 백작부인이었다.
몸이 안 좋아 영지에서 요양 중이라는데 〈운명〉에서도 거의 언급된 적이 없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백작령으로 내려가서 치료해 주고 꾀어낼까?
침대에서 굴러다니며 다음 계획을 짜는데 미뉴엣이 침실로 들어왔다.
나는 느리게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와 마주 보았다.
“무슨 꿍꿍이야?”
차고 서늘한 목소리가 나를 의심한다.
나는 앞에 선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은발과 섬세하고 신비로운 이목구비.
악당 쪽은 질리도록 많이 봤지만, 주인공은 처음이다.
신기했고 새삼스럽게 현실감이 느껴졌다.
〈운명〉에 쓰인 일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피부로 와닿는다.
지금은 생각이나 할 때가 아니었지만.
“미뉴엣.”
이라고 불러도 되겠지.
나는 슬쩍 눈치를 살폈다.
“내내 침실에 틀어박혀 있다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뭔지, 어디 들어나 보자.”
“간단해. 너는 결혼하기 싫고 나는 갈 데가 없잖아?”
“그래서 지옥으로 가시겠다?”
과장이 심하네.
지옥은 내 선배 신도들이 머무르고 있는 곳이고, 화이트데저트 공작저는 그럭저럭 지낼 만한데 말이지.
그래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서 적당한 말을 혀에 올렸다.
“돈 없고 연고 없는 귀족이 어딜 간들 천국이겠어?”
“화이트데저트에 비하면야 그렇겠지.”
“뭘, 그렇게까지─.”
“네가 거슬려.”
미뉴엣이 대뜸 내 말을 잘랐다.
맥락 없는 말에 나는 멀뚱히 눈을 깜박였다.
“장례식에서부터 그랬어. 말도 안 하고 표정도 없고, 내내 그래서 무슨 인형인 줄 알았거든.”
“음.”
“그래서 너한테 사람을 붙였어.”
“……누굴?”
“베티, 내 사람이야. 기억을 잃었다고?”
세상에, 벌써 뒤통수를 맞았군.
순진무구한 얼굴로 온갖 걸 다 털어놓길래 손톱만큼은 믿었더니 바로 이 모양이다.
사람이란 게 이렇다니까.
“낮에는 콜티쉬 뱅크에 다녀왔고. 아, 안심해. 안에서 하는 말은 보안 때문에 못 들었어.”
이어서 나온 말은 놀랍지도 않았다.
그래, 감시할 의지만 있으면 뭔들 어려우랴.
내가 쓴 사람들은 다 보네티의 사람들인데.
“네 뒷조사도 해봤는데 나오는 게 없더라고.”
“저런.”
“다시 물을게, 시오라. 뭘 바라고 이래?”
뭘 바라냐고?
그 답을 구구절절 늘어놓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본질은 간단하다.
“세계 평화?”
“하.”
“꼬아 생각하지 마, 있는 그대로야. 나는 기억이 없고 혹시나 해서 뱅크에 갔는데 돈도 없었고.”
나는 한 걸음을 걸어 미뉴엣의 개체 공간을 침범했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짚고 속삭였다.
“너한텐 내가 필요하고.”
아니라고 할 순 없겠지.
가보트를 말리는 척해도 혼담을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이 뚜렷했으니.
〈운명〉에서도 미뉴엣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내가 주인공, 실질적으로는 관찰자 자리를 대신해 주면 서로에게 좋지 않은가.
나는 입매를 당겨 웃었다.
“틀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