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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화 (1/162)

12시의 마리오네트(연재)

1화

반짝,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시야에 들어오는 건 영락없이 낯선 천장.

여긴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설마 하며 손을 들어 보았다.

굳은살은 온데간데없고 뼈에 살가죽만 발라 놓은 손이 날 맞았다.

“또!”

목소리도 낯설기 짝이 없다.

미성이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아질 리 없지.

나는 괴로워하며 머리를 수그렸다.

그러자 부스스한 머리칼이 흘러내려 시야를 가렸다.

한 움큼 쥐어 보고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번에도 금발이라니.”

이건 좀 웃겼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휙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폈다.

침실은 넓지만 가구는 적다.

좋게 말하면 깔끔하고 나쁘게 말하면 휑한 공간.

뒤질 곳이 많진 않겠군.

나는 벌떡 일어나 캐노피를 젖히고 침대에서 나왔다.

서랍을 전부 열고 소파의 쿠션을 치우고 카펫을 들추고 커튼을 젖혔다.

침실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이라는 침대 밑도 들여다봤다.

깨끗하다, 먼지 하나 없이.

“법으로 일기 쓰는 걸 의무화해야 해.”

어떻게 아무도 일기를 안 쓴대.

실망하며 머리를 쓸어 넘기자 빗자루처럼 헝클어진 머리칼이 덫처럼 손가락을 얽었다.

불길한 징조였을까, 곧이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겠습니다, 시오라 아가씨.”

“잠시만!”

나는 허둥지둥 거울 앞으로 뛰어갔다.

거울에 비친 형상을 확인했다.

“괜찮네.”

좋은 건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머리칼이 가늘어 부스스했지만, 햇빛처럼 예쁜 색이다.

이마는 동그랗고 볼록. 코끝으로 내려오는 곡선은 미끈하고…….

“시오라 아가씨?”

재촉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나는 거울에 비친 정보를 요약했다.

금발. 자안. 미인. 비쩍 말랐고 안색은 나쁨.

웃어도 찡그려도 얼굴 근육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무뚝뚝한 성격.

“들어와.”

10대 후반의 소녀가 들어왔다.

붉은 단발에 주근깨. 차림새로 보아 시녀다.

나는 표정 없는 얼굴로 그녀를 맞았다.

“무슨 일?”

내가 잘못 파악한 게 아닌지 시녀는 내 언행에 크게 의아해하지 않았다.

세숫물을 가져와 내 세안을 도왔을 뿐이다.

사람이 앞에 있으니 입이 끊임없이 달싹거렸으나 무뚝뚝한 성격이란 그 자체만으로 페널티다.

의심받지 않고 물어볼 만한 질문은 끽해야 이 정도?

“너, 이름이 뭐였지?”

“베티입니다, 시오라 아가씨.”

그렇군.

대화는 그대로 단절됐다.

수다스러운 친구였으면 좋았을 텐데, 나만 애가 타서 손끝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는 동안 세안은 끝났고 베티는 내 머리를 빗기기 시작했다.

이러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나가 버리면 나만 곤란하다.

그래도 다른 주변 인물보다는 상대하기 편할 테니까 뭐라도 물어보자.

“어머님은…….”

말끝을 불분명하게 흐리며 나는 미끼를 던졌다.

물고기는 곧장 찌를 물었다.

“두 분은 별관 근처에 안치되셨대요. 아무래도 사시던 곳이 그렇게 되었으니까요.”

“아.”

‘시오라’의 부모님은 아무래도 최근 돌아가신 모양이다.

“힘드시죠? 저도 어릴 적 아버지를 잃어서 조금은 그 마음을 알아요.”

“…….”

“그래도 좋아지셔서 다행이에요. 말도 전혀 안 하시고 침실에서만 지내셔서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어쩐지 말 몇 마디 했다고 목이 까끌거리더라.

자연스럽게 다른 것도 물어보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입이 풀렸는지 베티가 말을 이어 갔다.

“내일이 마지막이란 게 아쉽네요.”

“응……?”

“밖에서도 아가씬 잘 해내실 거예요.”

“어?”

“자, 다 됐네요. 예뻐요, 아가씨.”

타이밍 나쁘게도 내 머리를 다 빗은 베티가 엷게 웃었다.

웃고는 있지만 눈앞의 사람을 가여워하는 듯한 표정.

그 얼굴이 조금 전 들은 말과 겹치며, 급격히 불길함이 치솟았다.

밖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면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식사는 로저스가─.”

“베티!”

나는 덥석 베티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무뚝뚝이니 뭐니 다 집어치워.

지금은 이 몸의 성격에나 맞추고 있을 때가 아니다.

새 몸에서 눈을 뜬 지 30분 만에 직감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위기일발, 위기일발!

그리고 내 감은 아주 좋은 편이다.

그래서.

“아가씨?”

“도와줘, 나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필패의 선택지를 골라 버렸다.

기억 상실은 좋은 패가 아니다.

병에 걸렸다 하면 내가 모르는 정보만 맛있게 떠먹여 줄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

있는 집 자식이면 온갖 신관과 의사를 만나느라 몇 달을 허비해야 한다.

없는 집 자식이면? 미친 사람 취급받고 쫓겨날 각오를 해야 하지.

참고로 둘 다 경험담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번엔 괜찮은 결과가 나왔다.

“세상에! 오늘 좀 느낌이 다르더라니. 어떡해요, 아가씨!”

베티는 제가 다 아픈 사람처럼 발을 동동거리며 기꺼이 내게 협조해 주었다.

주위에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의견도 존중해 주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이야 얼마든 있으니 이것도 지켜봐야겠지만, 선택했으면 일단 직진!

그렇게 해서 얻어 낸 결과를 나는 수첩에 적었다.

「이름 : 시오라 벨벳. 20세. 입양아.

부모는 화재로 사망.

범인은 저택의 사용인.」

돈도 못 받고 노예처럼 부려지던 사용인이 악덕 고용주에게 복수한 사건이었다.

아마 그때 시오라도 함께 죽었을 것이다.

나는 살아 있는 몸에 못 들어오니까.

자업자득이라 할 만했지만, 문제는.

「남은 재산 : 0g.」

시오라가 받을 유산도 깔끔히 불타 버렸단 말이지.

장례식은커녕 길거리에 나앉을 신세가 되었을 때, 숙부인 백작이 손을 내밀어 주었다.

내가 눈을 뜬 곳은 백작저였다.

숙부는 내 부모님과 사이가 나빴지만 다른 연고지도 없어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러 줬다.

그게 벌써 2주 전의 이야기다.

여기서 문제!

그러면 숙부와 사이 나쁜 부모를 둔 성인 시오라, 심지어 혈육도 아닌 입양아는 이제 어떻게 될까요?

「3일 뒤 쫓겨날 예정.」

“진짜냐고.”

나는 침대 매트에 철퍼덕 엎어졌다.

어쩐지 침실이 넓은 것치곤 휑하더라니, 손님용 침실일 줄이야.

일기가 없는 게 당연했네.

나는 허허 웃고 말았다.

“어쩌지.”

이 짓을 세 번이나 했지만, 살 곳도 없이 쫓겨나긴 처음이다.

너무 납득이 안 되는 상황이라 베티를 붙잡고 물어보기도 했다.

“베티, 나 혹시 누구랑 약혼했어?”

“아니요, 제가 알기론 약혼하신 분은 없으세요.”

“그럼 나 공작가 같은 데에 시녀로 차출됐어?”

“그럴…… 리가요?”

이상한 질문에 베티가 의아해했지만, 나는 이 상황이 더 이상했다.

그러면 뭐야? 왜 이 몸에서 눈을 뜬 거야?

맥락이란 게 없잖아!

울분이 치밀어 난 베개를 팡팡 두드렸다.

어쩌면 내 마음에 누군가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좋은 환경을 맡겨 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억울해하느냐고.

그러면 나는 당당히 대답할 수 있다.

“날 여기 보낸 게 누군데!”

시간을 거슬러 정확히 특정할 수 없는 몇 년 전.

내가 살던 곳에 웬 책이 떨어졌다.

황금빛 문양으로 장식된 갈색 가죽 양장.

겉면에는 〈운명〉이라는 신어가 적혀 있었다.

「그날은 미뉴엣 보네티의 결혼식 날이었다.」

생생하게 떠오르는 첫 구절은 그랬다.

책은 ‘미뉴엣’이란 인물의 시점으로 진행되었으며 내용은 간단했다.

미뉴엣의 남편이 세상을 멸망시켰습니다!

솔직히 재미없었다.

들어온 경로가 신기해 완독했지만, 별점을 주자면 단 한 개.

문제는 그게 그저 재미없는 책이 아니란 것이었다.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이것은 바깥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고대 신 페불라시여, 부디 기적을 일으켜 주소서.」

「당신을 잊어버린 오만한 인류를 불민히 여기시고 구원하소서.」

「인류를 저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피로 쓴 글자가 나를 반겼다.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고 뒤늦게 이 책이 페불라 신에게 바쳐진 제물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걸 알아차린 즉시 내게는 의무가 지워졌다.

왜냐하면 나는 신전에 남은 하나뿐인 신도였으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면, 페불라가 사람들에게 다 잊혀 가는 고대 신이라 가능했다.

사제, 성기사, 교황, 성녀.

모든 직책이 내 몫이었고 그런 만큼 다양한 능력을 펼칠 수 있었으나 신전을 나갈 수는 없었다.

하나뿐인 신도마저 사라지면 신은 소멸해 버릴 테니.

그걸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 페불라께서는 어째서 내게 이런 걸 보여 주셨을까?

의문을 느끼자마자 길이 열렸다.

시야에 황금빛이 쏟아졌고, 다시 눈을 뜬 순간 나는 웬 꼬맹이의 몸에 들어가 있었다.

“어라, 뭐야. 눈높이 왜 이래. 손은 왜 이렇게 작아. 어? 페불라시여?”

“뭘 멍하니 있니, 에이미. 공자님께서 기다리실 텐데 얼른─.”

“……아저씨는 누구세요?”

그게 에이미 로열샌드.

세계를 멸망시킬 악당의 어린 시절 약혼녀였다.

내 신은 내 의견도 묻지 않고 나를 남의 몸에 처박은 것이다.

좋은 점은 하나도 없고 페널티만 덕지덕지 붙인 채로!

어쨌거나 신을 거스를 수는 없어서 나는 악당을 교화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그다음에는 악당의 하녀가 되었다. 또 실패했다.

세 번째로 나는 이 몸에서 눈을 뜬 것이다.

악당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는 데다가.

“곧 길거리에서 동냥이나 해야 할, 이 몸에 말이지.”

흐흐흐, 말이 돼?

너무 황당하니 웃음이 나왔지만, 그러면서도 머리는 빠릿빠릿 돌아갔다.

돈을 벌어야 한다.

하녀 일은 경력직이니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다.

문제는 하녀가 돼서 어떻게 그 악당과 접점을 만드냐는 건데, 가능한가?

또 일만 하다 죽는 게 아닌가?

어디 돈 나올 구석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있다, 돈 나올 구석!”

나는 퍼뜩 고개를 들고 침대 옆의 종을 미친 듯이 흔들었다.

곧 누군가 침실로 들어왔다.

베티가 올 줄 알았는데 떨떠름해 보이는 다른 이였다.

아무려면 어때.

“나 잠깐 나갔다 올게.”

***

온갖 불쌍한 척을 다 해서 나는 겨우 마차를 빌려 타고 나왔다.

내가 향한 곳은 수도 외곽에 있는 콜티쉬 뱅크였다.

고객의 신상을 전부 비밀에 부치는 이 은행은 놀랍게도 천 년이 넘게 명맥을 이어 왔다.

고대 신전이 세우고 지금 신전이 인계했는데, 나라에서 금기시하는 민간 활동을 은밀히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페불라 교단의 재산도 전부 이 은행에 있다!

나는 당당히 계좌명을 말했고 직원은 대답했다.

“그런 이름으로 개설된 계좌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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