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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329화 (329/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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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2부 143화

    “…….”

    만신창이가 된 혼돈의 군주를 바라보는 이안의 침묵이 길어졌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를 고르는 중이었다.

    ‘지금 내가 본 모든 것들이 사실이라면…….’

    솔직히 확신할 수 없다.

    이조차 환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실이라면.

    정말 시계탑 꼭대기의 존재가.

    그 괴물이 이안 자기 자신이라면.

    ‘책임을 져야겠지.’

    이안이 결심을 굳혔다.

    나아가 혼돈의 군주에게.

    혹은 미래의 프란에게 물었다.

    “……정리하면, 당신들 무리가 미래에서 넘어왔다는 뜻인가?”

    [정확하다. 시간을 되감은 게 아니라 그대로 넘어온 것이지.]

    그거야 못할 것도 없을 거다.

    오히려 크로노스를 되감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운 일이다.

    “그럼 그쪽 세계는?”

    [우리의 우둔하고 눈먼 아버지께서, 아니, 미래의 네가 모조리 쓸어버렸지. 물론 잘 찾아보면 살아남은 족속들이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긴 하겠다만, 글쎄,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군.]

    이들이 넘어온 미래의 세계선은 이미 멸망했다.

    돌아간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허무의 세계.

    이안이 멈추지 않고 묻고자 했던 것들을 물었다.

    “왜 이런 선택을 했지? 나에 대한 감정이 썩 좋지는 않을 텐데?”

    [그야 뭐, 흔한 변덕이지. 미친놈은 미친놈을 알아보는 법이기도 하고.]

    한때 인류를 구하고자 했던, 그리고 그 목적으로 미쳐 버렸던 프란 페이지.

    그리고 자신의 고향을 지키고자 했던, 마찬가지로 미쳐 버린 미래의 이안 페이지.

    둘은 공통점이 있다. 그렇기에 프란은 미래의 이안을 이해했다. 아마 이그드라실의 아홉 세계 내에서는 그 누구보다 미래의 이안에게 이입하고 공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너에게 보여줬던 미래의 끝은 지금 이 시점으로부터 수만 년이 흐른 뒤다. 가늠하고 싶어도 가늠할 수 없는 세월이지. 그만큼 살다 보면 예전의 감정 따위 아무것도 아닌 게 되거든. 물론 네 손에 죽으면서, 넓은 세계 앞에 놓이면서 내려놓은 부분도 꽤 많고 말이야.]

    여전히 만신창이 상태의 혼돈의 군주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어지간한 상처는 빠르게 회복하던 그였거늘, 이번에는 좀처럼 그 힘을 쓰지 못했다.

    [솔직히 가물가물하기도 해. 내 이름도, 네 녀석의 이름도 영 익숙하지가 않아. 하도 낯간지러운 별명으로 불린 세월이 길다 보니까…… 흐음, 이렇게 말해봐야 이해하긴 어렵겠지.]

    “그건 그래. 눈먼 아버지니, 혼돈의 군주니, 작명 센스가 왜 다들 그 모양이야?”

    [그러게 말이다. 하하.]

    혼돈의 군주가 작게 웃었다.

    소리 내어 웃는 건 처음이다.

    “……당신이 보여준 것들이, 그리고 말이 다 맞는다고 치자. 거짓말 한 점 섞이지 않았다고 쳐. 그렇다면 한 가지 빼먹은 게 있는 것 같은데, 전에 만났던 그 공허의 군주는 누구지? 당신처럼 미래의 누군가가 과거로 넘어왔다면 나를 모를 리가 없을 거 아니야?”

    이안이 다시금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거든.

    혼돈의 군주가 보여준 과거도, 직접 겪은 현재도.

    어느 쪽도 공허의 군주의 정체를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그럴 수밖에, 그 존재는 우리 우둔하고 눈먼…… 아, 자꾸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군. 이제는 이쪽이 익숙해서. 양해 좀 해줘. 아무튼 공허의 군주는 그분께서, 미래의 네가 창조한 인형이라고나 할까?]

    “인형……?”

    [우리는 우리 시간대의 슈페리어 차원을 무너뜨리는 데만 수백 년을 소모했다. 그 이후부터는 말할 것도 없지. 미래의 너와 나 같은 괴물들이야 사실상 불멸자에 가깝다지만, 다른 사람들은 경우가 다르지 않겠어? 특히 미래의 네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사람들, 그들은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으니까.]

    미래의 이안과 프란은 사실상 불멸자나 마찬가지다.

    엄청난 격과 권능으로 무한대의 수명을 허락받았다.

    [모두를 잃고 나서도 미래의 너는 목적을 잃지 않았지.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너의 그 목적의식이 완전한 광기로 변해버린 순간이. 물론 그전에도 충분히 광적이었다만, 그 이후부터는 어떤 선을 넘어버렸어. 그걸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 더는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버렸다고나 할까? 그걸 유지할 이유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말하자면 그런 느낌이었지.]

    하지만 다른 이들은, 이안의 소중한 사람들은 달랐다.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으니, 곧 모두를 잃어야만 했다.

    모두를 지키고자 했던 괴물은 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방황하는가 싶더니, 다짜고짜 무언가를 만들더군. 그때 봐서 알겠지만 공허의 군주, 그놈이 뒤집어쓴 투구랑 갑옷 안에 뭐가 있던가? 아무것도 없었지? 그럴 수밖에. 애초에 미래의 네가 만든 혼령이거든. 그리운 사람들의 특징들을 욱여넣은…… 솔직히 내 눈에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그런 인형 말이야. 뭐, 그 시점부터 너는 이미 맛이 간 상태라서 아주 이해 못 할 건 아니긴 한데, 그래도 막상 지켜보려니 힘들더라고.]

    결국 혼자가 된 괴물은 본인만의 특별한 ‘친구’들을 만들었다.

    자기 딴에는 부모, 형제, 아내, 딸, 친구가 될 수 있는 꼭두각시들을.

    적당히 미친 프란조차 혀를 내두를 만큼 기괴하기 짝이 없는 그런 또 다른 괴물들을.

    [워낙 애정을 많이 담아서인지 강하기는 무지막지하게 강해. 아마 지금의 너로는 그놈을 도모하기 어려울 거다. 그놈이 이끄는 군대 역시 마찬가지고. 전부 미래의 네가 만든 인형들인데, 공허의 군주와 마찬가지로 애정이 듬뿍 담겼어. 부럽게시리. 쯧……!]

    공허의 군주와 그 휘하 군대는 그런 존재였다.

    프란 페이지처럼 누군가의 미래가 아닌, 새로이 만들어진 존재.

    다만 이안이 알고 있는, 그리운 사람들의 성향을 본 떠 만든 존재.

    그런 만큼 무지막지한 힘을 나누어줬으니, 강하기는 비현실적으로 강했다.

    [아무튼 이안, 너도 여기까지 흘러오며 약간의 의심은 들었을 거라고 본다. 그렇기에 크로노스를 되감는 부작용과 눈 하나 달랑 남은 아버지의 관계에 대해서도 물었겠지.]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

    이안 역시 지금껏 많은 일을 겪어오며 조금은 추측하고 있었다.

    물론 확신할 수 없는 추측에 불과했으나, 이제는 엄연한 현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너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너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오직 너 자신뿐이라고. 이제 그 말을 증명할 차례다. 공허의 군주와 휘하 군대를 넘어 시계탑 꼭대기로 진군하란 뜻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너를…… 아니, 구원자를 기다릴 가엾은 괴물에게 영원한 안식을 선사해다오.]

    한때는 적.

    아니, 여전히 적이다.

    한데 그런 적에게 동정을 받는 신세라니.

    그것도 괴물이 되어버린 머나먼 미래의 자신이.

    “……참 질긴 인연이야. 당신하고 나.”

    [너도 그런데 나는 오죽하겠어? 네 기준으로 수만 년은 더 얽혀야만 한다고. 이젠 그냥 지겨워. 그만 좀 보고 싶어. 그러니 제발 좀 죽여 없애다오. 내 평생의 소원이다. 소원!]

    혼돈의 군주의 신신당부에 이안이 피식 웃었다.

    이거 따지고 보면 나를 죽여 달라는 말이잖아?

    어째 상황이 참 어이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럼 당신은 어쩔 건데?”

    [음? 나 뭐?]

    “다 끝나면, 내가 미래의 나…… 라는 그 괴물을 제거하면, 그때부터 당신은 무얼 할 거냐고. 미리 말하는데 이 시간대에 남아 있을 생각은 하지 마. 내가 허락하지 않을 거니까.”

    [별걱정을 다 하는군. 안심해라. 내 변덕 역시 오늘로 마지막이야.]

    “……여기까지?”

    [이제 진짜 지긋지긋하다. 너도, 네 미래의 모습도, 이 세계도.]

    “…….”

    [하고 싶었던 건 다 해봤어. 내가 오래전에 꿨던 꿈, 한때 내 고향이었던 중간계인들의 평화는 네가 알아서 지켜줄 것이고, 하찮은 중간계에서 벗어나 더 큰 세계에 합류하고 싶었던 꿈도 이 정도면 과분하게 누렸지. 합류 수준이 아니라 아예 통치하는 수준이었잖아?]

    혼돈의 군주의 목소리에서 더할 나위 없는 홀가분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홀가분함이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는 까닭이기도 했다.

    [하고 싶은 거 다 해봤고, 못 볼 꼴도 많이 봤고, 미치기도 해봤고, 무엇보다 너무 오래 살았어. 그래도 명색이 아비인데, 자식보다는 먼저 저승에 가는 것이 도리 아닐까 싶더라.]

    죽겠다는 말을 너무 편하게 한다.

    원 없는 삶을 살았다는 증거였다.

    [네 덕분이야. 솔직히 조금 더 걸릴 줄 알았거든. 한참 남았다고 여겼지. 나를 뛰어넘으려면. 그런데 아무리 이래저래 신경을 써줬다고는 해도 이렇게나 빠르게 성장할 줄이야, 역시 과거든 미래든 괴물은 괴물인가 보군. 뭐, 잘된 일이야. 길게 끌어봐야 좋을 거 없으니.]

    거기까지 읊조린 혼돈의 군주가 이안을 응시했다.

    이것으로 용건은 다 끝났다.

    이제 부탁만 남았을 뿐.

    [자, 이제 마지막이다. 나를 죽여라.]

    “……뭐? 당신을 죽이라고?”

    [죽여서 모든 걸 가져가. 내 나머지 기억들도, 비대하게 쌓여 있는 격도, 그것들을 잘 품는다면 공허의 군주를 상대로 밀리지는 않을 거다. 내 계산이 어긋난 적은 별로 없으니 믿어도 좋아.]

    그야 그렇겠지.

    혼돈의 군주라는 존재의 격은 그만큼 엄청났으니까.

    이안 역시 가능하다면 놈을 죽여서 모든 걸 빼앗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모든 진실을 알고 나니, 죽이기가 영 껄끄러워졌다.

    “이 방법뿐인가?”

    [아, 혹시 내가 명계로 떨어질까 봐 걱정하는 건가? 아서라. 이미 명계로 떨어질 수준은 예전에 넘었어. 여기서 죽으면 그냥 소멸이야. 명계가 내 영혼을 감당하지 못할 거거든.]

    “……그런 게 아니라, 당신이라면 차선책쯤은 구상해 뒀을 거 아니야?”

    [지금 이 방법으로도 가능성이 낮은데 차선책 따위를 염두에 두었겠어?]

    “하지만…….”

    [괜히 아쉬운 척하지 말고 그냥 죽여. 정 그러면 지금 이 시간대의 프란 페이지한테나 잘해주든가. 괜히 일 틀어질까 봐 그놈 파편이 네 안에 있다는 거 상기는 시켜줬는데, 그렇다고 쪼르르 달려가서 노예를 만들어버리는 건 좀 너무하지 않냐? 그래도 명색이 네 아비잖아?]

    “…….”

    이안이 가장 싫어하는 프란 페이지의 말.

    그중에서도 으뜸이 바로 ‘아비’ 타령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고려는 해볼게.”

    [그래, 잘 좀 해줘라. 그놈, 아니, 그 시점의 나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꽤 불쌍한 놈이니까.]

    거기까지 읊조린 혼돈의 군주가 바른 자세로 꿇어앉았다.

    그러고는 정말 모든 것을 포기한 존재처럼 두 눈을 감았다.

    [자, 그럼 여기까지, 고단하구나. 이제 나 좀 보내줘라. 이안.]

    고단하다.

    이제 그만 쉬고 싶다.

    그 마지막 인사로부터 얼마 후.

    “…….”

    혼돈의 군주의 육신을 이루었던 새까만 그림자가 모조리 사라졌다.

    대신 이안에게도 익숙한 얼굴이 드러난 채, 주먹만 한 결정체 한 구를 남겼다.

    한때는 프란 페이지였던 혼돈의 군주, 그 초월적인 존재가 남긴 마지막 유산이자, 처음으로 보여준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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