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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2부 136화
‘이게 말이 돼? 제우스를 쓰러뜨릴 때보다 몇 곱절은 더 강해졌잖아?’
하데스는 눈썰미가 좋다.
이안이 제우스와 싸울 때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 대충 파악했다.
하나 거기서 아무리 더 강해졌다고 한들 제우스, 오딘, 튀폰을 감당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아니, 감당하는 건 그렇다고 치자. 워낙 비정상적인 성장세를 보여주는 중간계인이었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토록 가볍게, 자신의 주특기인 요술조차 부리지 않은 채 맨손으로 압도한다? 제우스와 오딘, 그리고 튀폰을? 이게 말이 된다고 보는가?
‘어떻게 중간계인 따위가 이런 힘을…….’
제우스를 뛰어넘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랍다.
그런데 이제는 이곳 슈페리어 차원을 통틀어 적수가 얼마 없을 만큼 강해졌다.
하데스는 더 이상 저 중간계에서 온 괴물, 이안 페이지를 꺾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명계의 모든 군대와 하데스 자신이 합류한다 해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쯤 하지. 더 해봐야 시간 낭비일 것 같으니.]
“오늘도 하데스 님의 동업자 정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싱긋 웃은 이안이 하데스에게 접근했다.
정확히는 하데스가 앉아 있는 명계의 왕좌 앞으로 다가왔다.
그저 걷기만 하였으나 그 걸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하데스는 금방 알아차렸다.
‘비키라는 것이군.’
어디에서?
바로 이 왕좌에서.
왜? 자신이 앉을 거니까.
쉽게 말해 ‘상석’을 내놓으라는 거다.
‘이래서 서열 정리라고 표현한 건가?’
차라리 덤비지나 말걸.
그랬으면 이런 굴욕을 입지는 않았을 텐데.
‘……제기랄.’
결국 하데스가 왕좌에서 물러나려는 그때였다.
“저는 이쯤이 좋겠군요.”
[……뭐?]
“의자가 없어서요. 잠깐 계단에 좀 앉겠습니다.”
거의 코앞까지 다가온 이안이 왕좌 옆 단상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데스가 비키려는 것만 확인했을 뿐, 정말 자리까지 빼앗아 앉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랬다간 하데스의 자존심에 큰 상처가 생길 것이고, 이 전략적 동맹의 끈끈함이 매우 옅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안은 아직 하데스와의 동맹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제우스와 오딘은 그렇다고 칩시다. 튀폰은 언제 빼돌린 겁니까?”
[흐음, 이제 와서 거짓말을 해봐야 좋을 거 없겠지?]
“아무래도 그렇죠. 아직 갈 길이 멀었는데.”
갈 길이 멀다.
동맹 관계가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는 뜻.
고개를 끄덕인 하데스가 천천히 말문을 이어갔다.
[그대가 튀폰을 상대로 고생한 게 생각나서 좀 미안하기는 한데, 사실 저 괴물 부활시킨 게 나야. 정확히는 그대의 생물학적 아비인 프란 페이지가 되살렸지. 나는 허락만 해줬고.]
“…….”
솔직히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튀폰이 명계에 있는 걸 본 순간부터 쭉.
다만 여기서 또 프란의 이름이 나올 줄이야.
언제쯤 그 이름을 완전히 떨쳐낼 수 있을까?
“튀폰을 되살린 목적은 당연히 명계의 하수인으로 빼돌리기 위함이었을 테고.”
[그렇지. 솔직히 저만한 괴물을 타르타로스에 처박아놓는 거, 낭비 아닐까 싶었거든. 겸사겸사 지배자도 몇 놈 죽여주면 고맙고, 그런데 다짜고짜 눈깔 괴물이 나타나지 뭐야? 내 계획을 알고 방해하러 온 건지, 아니면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일이 싱겁게 끝나버렸지. 나야 뭐 튀폰 한 마리 빼돌린 것으로도 충분하긴 했다만.]
하데스가 이안에게 제압당하고 쓰러져 있는 튀폰을 측은히 바라봤다.
애써 빼돌린 최정예 하수인이건만, 저리 맥없이 패배할 줄이야.
역시 어떻게든 이안부터 하수인으로 만들었어야 했나 싶다.
“…….”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입을 꾹 다문 이안이 신경 쓰인 걸까?
조금은 움츠러든 하데스가 이안에게 물었다.
[혹시 화난 건 아니지?]
“……아, 그런 거 아닙니다. 잠시 확인 좀 하느라고.”
[확인? 무슨 확인을 말하는 게지?]
“잠깐 얼굴들 좀 봤습니다. 오딘이랑 제우스 말이죠.”
[그 노인네들 얼굴은 갑자기 왜?]
“얼굴색도 그대로고, 눈이랑 머리카락도…… 그대로네요.”
애당초 명계에 무슨 용건으로 내려왔던가?
죽어서도 아버지의 축복이 남아 있는지, 아닌지.
그 여부를 직접 확인하려고 여기까지 온 것 아닌가?
“하데스 님, 뭐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무엇이지?]
“아버지의 축복을 아실 겁니다. 하데스 님께서도 받으셨죠. 피부가 시퍼렇게 변하고, 멀쩡한 눈알 대신 안광이 생기고, 머리카락이 뱀처럼 꿈틀거리는, 슈페리언과 추방자를 구분 짓는 차이점 말입니다.”
[그건 갑자기 왜?]
“그 축복이라는 이름의 족쇄를 없앨 방법이 필요합니다. 혹시 죽으면 사라질까 싶어서 확인차 들렀는데, 이 양반들 얼굴 확인하니 죽어서도 쭉 유지되는 것 같네요, 아닙니까?”
이안의 물음에 하데스가 눈을 번뜩거렸다.
물론 잠깐일 뿐, 계속 번뜩거리지는 않았다.
뭐라도 아는 바가 있는 걸까?
[네 말이 맞아. 죽어서도 벗어날 수 없지. 그러니 축복이라기보다는 저주라고 할까?]
“저주라기보다는 족쇄에 가까운 것 같네요. 제가 느끼기에는 말입니다.”
[오, 그 표현이 적절하군. 족쇄, 맞아. 노예한테 채우는 족쇄와 같지.]
축복이라기보다 저주, 저주라기보다 족쇄.
하데스도 프로메테우스와 똑같은 말을 한다.
대다수 지배자들이 비슷하게 여긴다는 증거였다.
[보아하니 그 족쇄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는가 보군.]
“그렇습니다. 뒤통수 맞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동감이야. 나 역시 그 부분에 관해서는 꽤 오랫동안 고민해왔지. 기껏 명계로 떨어져서 내 하수인이 된 줄 알았는데 뒤통수를 쳐봐. 그것만큼 짜증 나는 경우가 또 어디 있겠어?]
그것은 마침 하데스에게도 민감한 사안이었다.
명계로 떨어진 망자들은 모두 하데스의 하수인이 되는 것이 기본인데, 그 기본에 눈먼 아버지의 축복이라는 족쇄가 섞여 있다면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흥이 깨질 만한 일이기는 하다.
“그래서, 그 고민을 해결하셨습니까?”
[해결? 아, 족쇄 푸는 방법을 알아냈느냐고?]
이안의 물음에 이번에는 하데스가 싱긋 웃었다.
아까 이안이 다가오며 지었던 미소의 작은 복수였다.
[내가 왜 변장 주술을 창시했는지 알아? 다 나를 위해서야.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족쇄를 풀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시계탑 꼭대기의 괴물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그 말씀은…….”
[설마 내가 그깟 족쇄 문제 하나 해결하지 않고 명계의 군대를 키웠을까 봐? 시계탑 꼭대기의 침략자 놈을 몰아내고 싶어서 안달이 난, 그 자리에 앉고 싶어서 장장 수만 년을 준비하고 또 준비해온 내가? 이봐, 이안 페이지. 그대는 그대의 동업자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
한껏 머금었던 미소가 희미해질 때쯤.
말문을 이어가는 하데스의 외형에 어떤 변화가 찾아왔다.
푸른 피부는 본연의 살 색을 찾았고, 푸른 안광을 뿜어대던 두 눈 역시 평범한 흰자위와 푸른 동공으로 돌아왔으며, 뱀처럼 꿈틀거리던 머리카락 역시 보통의 찰랑거림을 되찾았다.
더는 ‘슈페리언 하데스’가 아닌, ‘올림포스 일족 하데스’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때, 이만하면 대답이 되었나?]
족쇄 푸는 방법을 알아냈느냐는 질문.
그 물음의 대답을 행동으로 보여줬다.
이안 역시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동업자 운 하나는 타고났나 봅니다.”
[그렇지? 그걸 알면 나를 더 귀하게 여겨달라고. 다짜고짜 찾아와서 서열 정리니 뭐니 그런 소리나 하고 말이야. 어? 그래서야 어디 불안해서 마음 놓고 동업하겠나? 서로 뒤통수칠 생각만 하다가 지리멸렬하면 이득 보는 건 저 망할 눈깔 괴물뿐이라고! 내 말이 틀린가?]
내심 속에 쌓아둔 걸까?
버럭 소리치는 하데스였다.
“하데스 님 말씀이 옳습니다.”
[아하, 이제야 좀 말이 통하는군.]
“그런 의미에서 전수해 주시죠.”
[뭘?]
“알면서 괜히 그러시네요.”
[음, 글쎄올시다. 그걸 알려면 일단 내 궁금증부터 풀어야겠는데.]
“뭡니까? 하데스 님의 궁금증이.”
[제우스를 쓰러뜨릴 때보다 훨씬 더 강해졌어. 그대 말이야. 도대체 어디서 뭘 어떻게 한 건지 알려줘. 그럼 뭘 전수해 달라는지 생각날 것도 같군. 싫으면 말고. 아쉬울 거 없으니.]
“아, 그거요?”
말해주지 못할 것도 없다.
딱히 비밀도 아니거니와, 다 끝났잖아?
“별거 아닙니다. 왜 예전에 프로메테우스 님의 보물창고에서 꺼내온 마도서 한 권 있지 않습니까? 제우스가 저더러 그냥 가지라고 했던, 그 마도서의 고향으로 사냥을 다녀왔습니다. 마계라는 곳인데, 제법 강한 괴물들이 많더군요. 격의 노다지였다고나 할까요?”
[마계라, 듣던 중 흥미가 좀 생기는데? 나도 여행 한번 가 볼 수 있을까?]
“아마 어려우실 겁니다.”
[왜지?]
“행성의 수명이 다했더군요. 저희도 막바지에 겨우 탈출했습니다.”
[…….]
뭐 어쩔 거야?
행성이 박살 났는데.
믿지 못하겠으면 확인해 보든가.
[……이거 정말 너무하는군. 그런 노다지를 나만 쏙 빼놓고 다녀와? 헤라클레스 놈이야 이제 사실상 그대의 수족이나 마찬가지이니 그렇다고 쳐. 토르라니? 올림포스 일족도 아닌 놈을 나 대신 데려갔다? 그래놓고 뭐? 내가 수만 년간 겨우 터득한 걸 전수해 달라고? 이거야 원, 도둑도 이런 도둑이 없겠군. 우리 올림포스의 새로운 왕께서는 양심이란 게 있으신가?]
삐쳤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삐쳤다.
지금까지와는 말에 섞인 진심의 농도가 다르다.
“우리가 원래 그런 사이 아닙니까?”
물론 이안은 하데스가 삐치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당당하게 맞대응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뭐라……?]
“표현 그대로 전략적인 동맹일 뿐, 좋은 거 나누어 먹고 나쁜 거 미리 상의할 만큼 신뢰가 쌓인 관계는 아니잖아요? 당장 하데스 님께서도 튀폰을 되살려서 명계의 하수인으로 만드는 계획, 저한테 미리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전 튀폰이랑 싸우다가 죽을 뻔했고요.”
[그, 그것은…….]
“그래놓고 양심을 운운하십니까? 우리 명계의 왕께서야말로 양심이란 게 있으신지요?”
[크흠……!]
맞불 작전은 효과적이었다.
하데스의 헛기침이 그 증거였다.
이제 이쯤에서 쐐기를 박아볼까?
“먼저 신뢰를 저버린 건 하데스 님이십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하데스 님께서 그 땅에 처박힌 신뢰를 회복해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앞으로는 더 협력적인 관계, 좋은 거 나눠 먹고 나쁜 거 상의하는 관계, 매번 말씀하시는 동업자 정신, 발휘할 생각이 있으니까요.”
[…….]
이안의 쐐기를 박는 말에 하데스가 고민했다.
이거, 괜히 징징거렸다가 되로 돌려받은 꼴이다.
매번 느끼지만 이 중간계인의 혀가 예사롭지 않다.
어째 언쟁을 벌일 때마다 두들겨 맞는 기분이 든다.
‘기분 탓이겠지…….’
고개를 저은 하데스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직전까지보다 한층 누그러진 말투, 목소리였다.
[……그대의 말을 전부 수긍할 순 없겠으나, 일정부분은 받아들이도록 하지. 아마 나더러 먼저 신뢰를 회복하란 말은 족쇄 푸는 방법부터 알려달라는 뜻 같은데, 내 짐작이 옳은가?]
“그것도 무너진 신뢰를 회복할 좋은 방법이긴 할 겁니다.”
[결국 원하는 걸 얻어내겠다는 심보로군. 뭐, 좋다. 그 대신 방금 전에 했던 말, 앞으로는 좋은 거 나눠 먹겠다는 그 약속, 반드시 지켜야 할 거야. 또 나만 쏙 빼놓고 혼자 노다지 밭에 뒹군다? 그때는 동맹이고 나발이고 없을 테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물론입니다.”
[믿어보겠어.]
가볍게 대꾸한 하데스가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황금빛 액체가 출렁거리는 길쭉한 약병이었다.
[받아. 그 약이 열쇠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