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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308화 (308/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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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2부 122화

    “무슨 일입니까? 연락도 없이.”

    솔직히 다 안다.

    절대 모르지 않는다.

    저들이 어째서 이안 앞에 나타나 무릎을 꿇고 있는지.

    다시 말하지만, 저들은 끝까지 제우스 편에 섰다.

    그럼에도 대세는 이안 쪽으로 굳혀졌다.

    ‘자신들의 입지가 걱정되었겠지.’

    표정과 목소리만 봐도 안다.

    충격과 공포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나뿐인 아버지를, 남편을 잃은 충격일까?

    아니, 아니다. 그보다는 지배자로서의 입지가 흔들리는 것.

    그것을 더욱 두려워하고 있음이 적나라하게 보이지 않던가?

    [그, 그게 있잖아. 칼리두 와탕…….]

    [아레스! 이안 페이지 님이시다!]

    [……아! 이, 이안 페이지 님!]

    새삼 놀랍다.

    저들의 입에서 칼리두 와탕카가 아닌, 이안 페이지라는 이름을 듣는 날이 올 줄이야.

    하물며 정체를 들켜서가 아닌, 스스로 밝히고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황이 올 줄이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미래는 아니지만, 그래도 감회가 새로운 건 어쩔 도리가 없으리라.

    “편히 말씀하세요.”

    [그, 그것이…… 그러니까…….]

    우물쭈물하는 아레스가 답답했을까?

    결국 참다못한 헤라가 직접 나섰다.

    [결례인 것을 알면서도 이리 불쑥 찾아온 까닭은 올림포스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신 이안 페이지 님께 저희 모자가 저질렀던 과오를 사죄드리고, 또 용서를 구하기 위함이옵니다.]

    역시.

    사죄의 말씀이란다.

    어지간히도 두려웠나 보구먼.

    “사죄와 용서라고 하시면?”

    물론 시치미를 뚝 떼는 이안이었다.

    아는 건 아는 거고, 사과받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단순한 개인 만족이 아닌, 서열 정리 차원에서 말이다.

    [이미 아시겠지만, 제우스는 저의 남편이자 이 아이, 아레스의 아비였습니다. 비록 지배자들 사이에서 혈연이 갖는 의미가 많이 약해지기는 했어도, 저는 이 땅의 모든 가정과 풍요의 지배자로서, 최소한 저희 셋만큼이라도 그 애틋함을 유지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답니다.]

    애틋한 가족이라.

    딱히 그럴 것 같진 않다만.

    그리 주장하니 뭐 어쩌겠는가?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수밖에.

    “그러셨군요.”

    이안이 대충 공감해 줬다.

    무슨 말을 할지는 빤하다.

    어서 듣고 대답이나 해주자.

    [저희로서는 어쩔 수 없이…… 정말 어쩔 수 없이 그를 옹호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가족이니까요. 왕께서 부디 저희 모자에게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헤아려주신다면…….]

    “네, 그 부분 충분히 헤아려 드리겠습니다.”

    [……저, 정말이신가요?]

    “물론입니다.”

    이렇게 간단하다고?

    순간 당혹감을 느낀 헤라와 아레스가 서로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두 지배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가, 감사합니다! 저희 모자를 이해 해주셔서 정말 진심으로……!]

    “다만, 조건이 한 가지 있습니다.”

    아, 그럼 그렇지.

    쉽게 넘어갈 리 없지.

    하지만 괜찮다. 이미 무얼 요구하든 수락하기로 결의를 다졌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계속 살아서 오랫동안 쌓아 올린 기득권을 지킬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설령 첩실과 양아들이 되라 요구할지언정 못할 것도 없을 터.

    [말씀하셔요. 저희는 어떤 조건을 내거시든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럼 편하게 말씀드리죠. 조건은 간단합니다. 격의 맹약이면 됩니다.”

    [격의 맹약…… 말씀이신가요……?]

    “쉽게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이지요.”

    격의 맹약.

    이 또한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다.

    단지 예상했던 모든 것 중 최악에 속할 뿐.

    ‘이를 어쩐다……?’

    어지간하면 다 받아들이려고 했다.

    격의 맹약 역시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막상 눈앞에 닥치니, 정말 격의 맹약이라는 구속으로 중간계 출신 왕의 노예가 될 생각을 하니,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솔직히 싫다. 누가 그러고 싶겠는가?

    [겨, 격의 맹약은…….]

    “역시 어려우신가요?”

    [아뇨, 어렵다기보다는…….]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안이 말했다.

    약간의 냉랭함이 추가된 말투와 목소리는 덤이었다.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생각 바뀌시면 다시 뵙죠.”

    그리 읊조리며 들어왔던 차원 문을 슥 가리켰다.

    격의 맹약을 맺지 않을 거면 그냥 나가라는 뜻.

    헤라의 마음속 조바심이 강하게 꿈틀거렸다.

    [아, 아닙니다! 솔직히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해두기는 했어요. 격의 맹약 정도는 걸어야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아레스 님께서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아? 아, 저, 저요?]

    헤라는 되었다.

    다음 차례는 아레스.

    그 혈기왕성한 지배자가 화들짝 놀랐다.

    [저, 저, 저는…… 그러니까…….]

    싫다.

    격의 맹약은 죽어도 싫다.

    조각 같은 얼굴에 그리 쓰여 있다.

    [아레스, 어서 그리하겠다고 말씀을 드려야지!]

    [하, 하지만 어머니, 아무리 그래도 노예가 되는 건…….]

    [노예라니! 언행을 신중히 하려무나. 설마 우리를 노예처럼 대하실까!]

    [아무래 그래도 맹약은…… 격의 맹약은 진짜 아니잖아요. 어머니!]

    [이 녀석이 근데……!]

    이것 참.

    상업지구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떼쓰는 아이와 엄마도 아니고.

    오랜 세월을 살아온 두 초월적인 존재의 대화 수준이 이렇다니.

    “아레스 님.”

    고개가 저어지는 것을 꾹 참아낸 이안이 읊조렸다.

    어차피 이들에게 격의 맹약을 받아낼 생각은 없었다.

    특수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격의 맹약까지 해가며 충성을 바칠 지배자, 이안이 판단하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게 가능했다면 제우스가 이미 모두에게 맹약을 받아놓았겠지.

    애당초 격의 맹약을 맺은 헤라클레스와 아테나의 경우가 엄청난 특이 케이스다.

    아마 헤라 역시 당장 말은 저리 해도 이런저런 핑계를 찾고 있을 거다.

    ‘그저 반응이 좀 궁금했을 뿐인데, 이 정도면 대충 다 본 것 같군.’

    결심한 이안이 계속해서 말문을 이어갔다.

    “아레스 님께서는 제 두 번째 과업의 계시자였습니다. 몇 번째 중간계였던가요? 아무튼 지구라는 중간계로 함께 내려가 이런저런 일들을 했죠. 꽤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그, 그때는 아무래도 계시자와 수행자의 입장이다 보니…….]

    “당시 아레스 님께서는 일개 수행자에 불과한 저와의 약속을 잘 지켜주셨습니다. 간단한 심부름 한 가지를 해주는 대신 아주 쉬운 과업을 내려주겠다, 아마 그런 약속이었죠?”

    [아…… 하하, 그랬죠. 아직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수행자 시절부터 워낙 남다르셔서…….]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막연한 두려움도 많이 사라졌고요. 어찌 보면 아레스 님 덕분에 제가 여기까지 왔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긴장 풀고 제대로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 그게 그렇게 되나요? 하하…….]

    이안의 1차적인 목적은 어디까지나 올림포스 전당의 완전 장악이다.

    제우스처럼 타협이 불가능한 지배자 말고는 아군으로 만드는 것이 옳다.

    매사에 단순한 아레스야말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딱 좋은 유형이리라.

    “헤라 님의 과업도 기억이 납니다. 따님의 뒷조사를 맡기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무난했습니다. 따님 성격이 굉장히…… 괄괄했던 점만 제외한다면 말이지요.”

    다음 차례는 헤라다.

    이안의 말에 헤라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그녀의 딸 헤베는 솔직한 말로 괄괄함을 초월했으니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안에게 엄청난 무례를 저지르고도 남았을 터.

    [마, 만약 제 딸이 무례를 저질렀다면, 어미인 제가 대신 사죄를…….]

    “아,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지나간 추억 이야기니까요. 무엇보다 헤라 님께서는 사죄의 뜻으로 격의 맹약까지 맺으려고 하셨으니, 그 진정성만큼은 확실히 느꼈습니다.”

    진정성을 확실하게 느꼈다.

    그 말에 당혹감으로 물들었던 헤라의 얼굴에 다시금 화색이 돌았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오늘 하루 천당과 지옥을 여러 번 오고 가는 그녀였다.

    “좋아요. 두 분께서 처한 상황의 특수성, 저와 맺었던 인연들, 지금 제 앞에서 보여주시는 진정성을 고려해서 격의 맹약까지는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앞으로 또 제 뜻에 반하는 모습을 보이신다면…… 그때는 간단하게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제 말 명심하시겠습니까?”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올림포스 전당의 새로운 왕이시여!]

    [저희 모자에게 베풀어주신 아량과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명심하고 말고 고민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 즉시 머리를 조아리는 헤라와 아레스였다.

    격의 맹약을 거두어주겠다는데 그깟 머리야 백만 번도 조아릴 수 있다.

    “앞으로 잘해봅시다. 그럼 저는 할 일이 좀 남아 있어서,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돌아들 가셔서 쉬셔도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두 분께는 그 어떤 불이익도 없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럼 편히 업무 보십시오. 왕이시여.]

    이안 고유의 영역을 빠져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헤라와 아레스는 연신 허리를 숙이며 올림포스의 새로운 왕에게 인사했다.

    그 비굴한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이안은 새삼스레 오묘함을 느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를 벌레처럼 죽일 수 있는 초월자들이었는데.’

    어느새 그들보다 더 높은 곳까지 올라왔다.

    그들의 우두머리였던 자를 손쉽게 제거했다.

    그럼에도 목표한 바는 여전히 멀게만 느껴졌다.

    ‘……이렇게만 하면 되겠지?’

    처음에는 그랬다.

    최상급 지배자들조차 아득한 존재였다.

    하나 이제는 그들의 머리 위에 올라서 혼돈의 전당을 바라보고 있다.

    과거 최상급 지배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멀게만 느껴지는 혼동의 전당을 말이다.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으니까.’

    중요한 건 명백히 가까워졌다는 거다.

    이대로 가다 보면 언젠가 반드시 닿을 터.

    나아가 오롯이 쟁취할 수 있으리라.

    모든 문제의 종말을.

    고향 땅의 평화를.

    ‘자, 그럼 이제…….’

    혼돈의 군주를 만나러 가보실까?

    쿵……!

    이안이 다음 행보를 정하는 그때였다.

    무언가 서재처럼 꾸며놓은 이안의 영역에 쿵, 하고 떨어졌다.

    그 육중한 무언가의 정체는 비석.

    슈페리어의 언어가 빼곡히 새겨진 비석이었다.

    [올림포스 전당의 새로운 우두머리, 칼리두 와탕카는 보아라.]

    [전대 올림포스의 수장, 번개의 지배자 제우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달받았다.]

    [제우스는 비록 오랜 세월 큰 공을 쌓으며 아버지께 충성을 바쳤던 충신이었으나, 이번 죽음이 정당한 결투로부터 비롯된 결말임을 확인한 바, 우리 혼돈의 전당은 올림포스의 새로운 수장이자 충신이 될 지배자 칼리두 와탕카를 ‘대군주들의 만찬’에 초대하고자 한다.]

    [새로운 왕의 탄생을, 새로운 충신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마련된 자리이니만큼, 나아가 혼돈의 전당이 내리는 첫 번째 명령이니만큼 반드시 참석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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