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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2부 101화
그러고 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고작 한 번, 그것도 매우 혼란스러운 와중에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 어째서 이 목소리가 익숙할까?
[지배자조차 날 한 번 마주하면 다시 만나길 꺼리는데, 확실히 배가 간 밖으로 나온 친구로군.]
뭔가 좀 뒤바뀐 것 같다만.
그걸 지적할 여유 따윈 없었다.
사실 버틸 만하다 뿐이지, 이 존재의 격 앞에서는 이안도 정신이 아득했으니까. 새삼 왜 하데스가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 설마 오늘도 길을 잘못 든 건 아닐 테고, 용건이 무엇이지?]
이안의 육신이 순식간에 문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고, 바닥으로부터 웬 시꺼먼 그림자 같은 것이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있었으니, 그것은 곧 일전에 봤던 초월적인 존재, 그림자 군주의 형상을 이루어냈다.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쪽 말고는 답이 보이지 않아서요.”
[그쪽이라, 뭔가 부탁하러 온 손님치고는 호칭이 영 불손하구먼. 조금 더 공손한 호칭은 없나?]
“죄송합니다. 어떻게 불러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알려주신다면 특별히 그 호칭으로 불러드리지요.”
[나는 군주님 소리가 참 좋더라.]
“군주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래서 내 이명도 혼돈의 군주로 지은 거야. 보통 그렇게 지어놓으면 군주님이라고 부르더란 말이지. 아, 참고로 ‘그쪽’이란 호칭은 살면서 처음 들어본다.]
……이상하다.
이 존재, 분명 무시무시한 존재다.
따지고 보면 제우스보다 높은 곳에 군림하는, 슈페리어 차원의 이인자 아닌가? 한데 왜 이렇게…….
‘……만만하지?’
격의 차이에서 오는 압박감만 느껴질 뿐, 혼돈의 군주라는 존재 자첸 어딘가 모르게 만만히 느껴졌다.
‘이유를 모르겠네.’
이안에게 적의가 없어서 그럴까?
적의가 없다면 이유는 또 뭘까?
아니, 애초에 적의 좀 없다고 만만하게 느껴지는 것이 정상인가?
아무리 생각을 해도 모르겠다.
일단 현재의 일에 집중하자.
“그럼 앞으로 군주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지. 그쪽 소리 더 들었다간 아무리 너여도 반으로 갈라 죽여 버릴 것 같아서 말이야.]
“……주의하겠습니다.”
[좋아.]
이안의 대꾸에 피식 웃은 혼돈의 군주가 손가락을 탁, 하고 튕겼다.
그러자 칙칙하기만 했던 문 안쪽 연구실의 풍경이 순식간에 화려한 응접실로 변해 버렸으니, 이안은 곧 푹신 거리는 소파에 앉아 눈앞으로 대령 된 찻잔을 받아들 수 있었다.
[손님 응대가 소홀하면 쓰나, 차부터 한잔하고 마음 편히 얘기해 보라고. 나한테 부탁할 게 무엇인지.]
이안은 그의 권유에도 차를 슬쩍 바라보기만 할 뿐, 마시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누가 권하는 액체를 마시는 거, 아직 좀 그렇거든.
세월이 꽤 흘렀건만 여전히 싫다.
“다름이 아니라, 군주님의 직속 상관이신 그분께 제 말씀을 전해주셨으면 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설마 나를 심부름꾼 나부랭이로 쓰려는 건가? 으으음……! 이런 대우…… 그쪽만큼이나 신선한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지 군주님께서 유일하게 그분의 결정을 바꿀 수 있는 실권자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이건 엄밀히 따져서 군주님께 드리는 부탁이지요. 청탁을 받는 건 언제나 실세 쪽이니까요.”
[실세라, 그거 틀린 말은 아니군.]
‘실세’라는 표현이 마음에 든 걸까?
혼돈의 군주가 제 가시 같은 이빨을 한껏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들어나 볼까? 어떤 부탁인지.]
“이번에 예정된 인신 공양, 중단시켜 주십시오. 공양 방식을 바꿔주신다면 더더욱 감사드리겠습니다.”
[그걸 왜 네가 신경 쓰지? 지배자 놈들이 신경 쓸 문제 아닌가?]
“저한테 맡겨졌습니다. 과업으로 말이죠. 하지만 군주님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저는…….”
[중간계에서 왔지. 그렇기 때문에 같은 중간계인을 산 제물로 바치기 영 껄끄러울 것이고.]
“네, 그렇습니다.”
[그럼 중간계인 말고 추방자들은 어때? 여기저기 숨어있는 놈들 싹 다 긁어모으면 오백만 명, 충분히 맞추고도 남을 텐데 말이야.]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요.”
[왜, 그것도 영 내키지 않나 봐?]
이안이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솔직히 물러터진 대답이라는 거, 안다. 수없이 많은 목숨을 빼앗아본 놈이 위선 떤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닌 건 아니다. 이 선마저 넘는다면, 그때는 정말 걷잡을 수 없어질 것 같거든.
‘내가 괴물이 되어가는 것을.’
다시 마음을 다잡은 이안이 혼돈의 군주에게 하던 말을 이어갔다.
“군주께서는 제 정체를 알고, 저에게 어떤 기대를 걸고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처음 뵈었을 때, 저를 지상으로 보내며 하셨던 말씀, 비록 제대로 들리진 않았지만, 그런 뉘앙스였던 걸로 기억하거든요.”
[뭐, 너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긴 있지. 물론 지금은 말해줘도 모를 거고.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이해하지 못할 거란 뜻이다. 그때 내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했지?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일걸?]
“그렇군요.”
확실히.
첫 만남 말미에 혼돈의 군주가 했던 말들은 모두 검열이라도 당한 것처럼 뚝뚝 끊겨서 들려왔었잖아?
추측건대 지금보다 높은 격에 도달해야만 들을 수 있는 전언일 터.
“어차피 듣지 못할 말, 지금은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건 군주님께서 저한테 원하시는 것이 있고, 저는 언젠가 그 바람을 반드시 들어 드릴 의향이 있다는 겁니다.”
[오호,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다?]
“당연하지요.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주십시오. 그럼 저희 간의 거래 장부가 깔끔해지지 않겠습니까?”
[뭐? 거래 장부? 하하하, 그것도 참 오랜만에 듣는 표현이로구먼.]
처음이 아니라 오랜만?
그 반쯤 혼잣말에 의구심을 느끼는 이안이었으나, 지금은 그 의구심에 오래 묶여있을 수 없었다.
[장부가 깔끔할수록 앞으로의 거래 역시 깔끔해지는 법, 사실 나도 생각을 하고 있긴 있었거든.]
“어떤 생각 말씀이십니까?”
[산 재물을 바치라고 하는 우리 우둔하신 아버지나, 하란다고 진짜 하려는 지배자들이나, 다 너무 뭐랄까, 야만적이라고나 할까? 같이 어울리기 불쾌한…… 뭐 그런 거?]
“…….”
[아무튼 좀 그랬었는데, 말 나온 김에 말씀이나 함 드려봐야겠네.]
묘하게 이질적인 말투와 사상.
물론 이쪽이 맞긴 하는데, 그럼에도 느껴지는 이 이질감은 무엇일까?
[물론 우리 우둔하신 아버지께 거절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 알아두라고. 나도 제안만 드릴 뿐이지, 그분의 생각을 바꿀 수는 없으니까.]
“알고 있습니다.”
[흐음, 그나저나 이거, 받아들이셔도 한동안 땡깡 엄청 피울 것 같은데, 또 지배자들만 고생하겠군.]
“……땡깡이요?”
[아, 그런 게 있다. 우리 아버지께서 워낙…… 뭐랄까…… 음…… 성격이 좀 아기 같으시거든. 그것도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갓난아기.]
갓난아기의 성격을 가진 절대자.
새삼 그보다 무서운 게 또 있을까 싶다. 아무런 악의 없이 울부짖기만 해도 세상이 무너질 거 아닌가?
[그거 달래려면 나도 고생 좀 해야 하니, 이 거래는 좀 무겁게 달아놔야겠어. 거래 장부에 말이지.]
혼돈의 군주가 손가락을 한 번 더 튕기자 이번에는 주위가 응접실이 아닌, 깔끔한 집무실로 변해 버렸다.
집무실에는 정말 수많은 서책이 사방을 가득 채운 원형의 책장 안에 빼곡히 진열되어 있었는데, 그중 시뻘건 서책 한 권이 뽑혀 나와 혼돈의 군주 앞에 펼쳐졌다.
[가만 있자, 우리 우둔하신 아버지 설득 1회, 뒷감당까지 전부…….]
그러고는 자신의 앙상하고 창백한 손가락에 피를 내어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으니, 정말 표현 그대로 거래 장부를 작성 중인 모양새였다.
탁!
그로부터 잠시 후.
필기를 끝낸 혼돈의 군주가 시뻘건 서책을 경쾌하게 덮었다.
[장부 작성 끝!]
역시나 시계탑의 이인자답지 않은 말투를 뽐내면서, 혼돈의 군주가 시뻘건 책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용건이 더 남았나?]
“……이건 부탁은 아니고, 개인적인 질문인데, 올려도 될까요?”
[해봐. 내 원래는 이렇게 한가롭지 않다는 점만 알아두도록.]
“군주님께서는 제 정체를 알고 계셨습니다. 중간계에서 왔단 사실 말이죠. 그걸 어떻게 아신 건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만약 이것도 당장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면…….”
[아, 그거?]
이안이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쩌면 생각보다 쉬이 큰 비밀에 접근할지도 모르는 순간 아닌가?
[비밀이다.]
“……예?”
[아직 말해주고 싶지 않아. 그걸 아는 순간 내 계획이 어그러질지도 모르거든. 아니, 확실하겠지.]
“…….”
[지금은 그냥 모르는 게 약이거니 해. 그보다는 당장 눈앞에 도사리고 있는 문제들이나 살피라고. 아직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에 벌써부터 너무 많은 걸 알려고 하면 못써.]
“……그렇습니까.”
아쉽다.
하지만 별수 없다.
지금은 인신공양을 막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큰 성과였으니까.
당장 혼돈의 군주와 접촉하는 것부터 엄청난 도박 아니었던가?
도박에 한 번 성공했다고 계속 이어나가다가는 패가망신하는 법이다. 끊을 때 끊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것만 명심하고 실행에 옮길 줄 안다면 제아무리 도박이라 할지언정 꽤 높은 승률을 기록하리라.
[말귀를 알아먹어서 다행이로군.]
“제가 좀 그런 편입니다.”
[까불기는.]
피식 웃은 혼돈의 군주가 손가락을 한 번 더 탁, 하고 튕겼다.
그러자 이번에는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칙칙한 연구실로 주변 풍경이 변해버렸으니, 이쯤에서 슬슬 두 번째 만남을 정리하려는 눈치였다.
[이안 페이지.]
“예, 군주님.”
[나도 부탁 아닌 부탁 하나만 하지. 별거 아니니 쫄지 말고.]
“하명하십시오.”
[어허, 하명이라니? 이거 명령 아니야. 진짜 그냥 부탁, 아니면 뭐 권유쯤으로 해두지. 그게 편해.]
명령보단 부탁이나 권유가 좋다.
역시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묘한 이질감이 사라지지 않는 존재.
그가 말문을 이어갔다.
[웬만하면 그거, 하지 마.]
“……그거, 라고 하시면?”
[왜 그거 있잖아? 너 수틀릴 때마다 속으로 만지작거리는 그거.]
“……!”
이안이 궁지에 몰렸거나, 몰릴 것 같을 때마다 몰래 준비하는 수단.
그런 거라면 딱 하나밖에 없다.
절대적인 시간, 크로노스를 되돌리는 이안 페이지의 마지막 밑천.
‘……재구축.’
물론 혼돈의 군주는 끝까지 ‘그거’라는 단어를 고집했으나, 정황상 재구축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안의 정체에 이어 크로노스를 되감을 수 있단 사실까지, 하데스와 더불어 두 번째로 이안의 모든 걸 아는 시계탑의 일원 되시겠다.
[정 어쩔 수 없으면 해도 말리지는 않겠는데, 그래도 어지간하면 써먹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이유는 묻지 말고, 그냥 알아만 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