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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285화 (285/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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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2부 99화

    전혀 예상치 못한 물음이다.

    예상하지 못할 만큼 치밀하고 은밀한 물음이라기보다, 이 타이밍에 나와서는 아니 될 물음이잖아?

    “…….”

    그래서였다.

    이번 질문만큼은 제아무리 이안이라 한들 쉬이 대답할 수 없었다.

    문제는 그 짧지 않은 침묵을 제우스가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대답이 어려운가?]

    “…….”

    [어려우면 안 될 텐데?]

    “…….”

    [그럼 죽일 수밖에 없거든.]

    제우스의 안광이 점차 붉어졌다.

    죽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시뻘겋게 불타올랐다.

    “……답을 드리기 전에, 저도 질문 한 가지만 해도 되겠습니까?”

    [질문이라, 이번에도 그 요사스러운 세 치 혀를 놀려볼 생각인가?]

    “요사스러운지는 모르겠고, 세 치보다 더 길 것 같긴 한데, 일단은 놀려보겠습니다. 듣고 판단하시죠.”

    [뭘 믿고 당당한지 모르겠군.]

    “믿는 거 없습니다. 정체고 밑천이고 다 털려서 죽을 위기 아닙니까? 이왕 궁지에 몰린 거 객기라도 부려보는 거죠. 살고 싶으니까요.”

    [글쎄, 정녕 살고 싶으면 그냥 넙죽 엎드려 비는 편이 좋을 텐데?]

    “엎드려 빌면 살려주시나요?”

    [그럴 리가, 벌레가 벌레처럼 구는 것만큼 혐오스러운 게 또 없지.]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놈이다.

    수행자 주제에, 심지어 중간계에서 올라온 벌레 주제에 너무 당당하다.

    하긴, 중간계 벌레의 몸으로 여기까지 꾸역꾸역 올라온 놈 아닌가?

    벌레 수준은 진즉 넘어섰을 터.

    [흐음.]

    잠시 고민했던 제우스가 말했다.

    붉게 물든 안광이 푸른색으로 돌아왔으니, 적어도 지금 당장 이안을 죽여 없앨 생각은 없어 보였다.

    [어디 한번 지껄여보아라.]

    “어떻게 아신 겁니까? 제가 하데스 님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거, 중간계에서 왔다는 거, 나름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요.”

    [그걸 알면, 뭐가 달라지나?]

    “죽을 때 죽더라도 궁금한 건 풀고 가야죠. 여기까지 버틴 것도 대견하지 않습니까? 제우스 님께서 그 정돈 해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또 무슨 꿍꿍이가 있나 보군.]

    “그럴 수도 있고요.”

    이안은 절대로 기를 꺾지 않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밑천 다 털렸다. 높은 확률로 살아남기는 글렀으니, 이제 남은 선택은 크로노스를 되감는 것뿐, 다만 그전에 알 수 있는 건 모조리 알고 싶었다.

    그래야 다음번에는 조금 더 완벽하게 일을 진행시키지 않겠는가?

    [하데스와 네놈의 관계는 어렵지 않다. 그 친구가 걸어놓은 잔기술이 보이거든. 하데스는 내 눈을 속였다고 착각했겠지. 애석하게도.]

    “확실히 착각하고 계시긴 합니다. 제우스 님께서 보신 그 잔기술뿐만 아니라, 그냥 시계탑 전체를 기만하고 있다 여기시죠. 애석하게도.”

    [그것참 애석한 일이로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이리 다 알고 계시는 걸 알면 얼마나 부끄러워하실지, 그건 보고 죽어야 할 텐데.”

    [……하!]

    고개를 휘휘 젓는 이안의 반응에 제우스가 어이없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이놈, 당황한 기색이 없다.

    필사적으로 숨기는 건지, 정말 포기한 건지, 꿍꿍이가 있는 건지.

    “하데스 님과 제 관계는 그렇게 간파하셨고, 제가 정체를 숨겼다는 건 어떻게 아셨죠? 사실 그거야말로 엄청 공들여서 숨기고 있었거든요. 실제로 제우스 님 말고 다른 분들은 다 속으신 것 같던데…….”

    [나 또한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알지 못하였지. 변장이 아주 감쪽같더군. 하데스가 꾸민 잔기술인가?]

    “저도 처음에는 이게 하데스 님의 잔기술인지 몰랐는데, 그렇더군요.”

    [아마 네놈이 나대지만 않았더라면 계속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나대다니요? 제가 언제…….”

    [튀폰의 격을 헤라클레스가 독식하도록 유도했지. 지배자들의 여론을 말이다. 네 패착은 그것이다.]

    이안은 당시 튀폰의 격이 담긴 결정체를 헤라클레스에게 먹였다.

    차선책이었고, 헤스티아와 하데스 덕분에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패착이라고?

    도대체 무슨 뜻일까?

    [네놈 덕에 헤라클레스는 최상급 지배자의 격을 얻었다. 좋은 일이지. 네놈한테 격의 맹약까지 맺은 지배자가 최상급 지배자라니, 아테나까지 합치면 두 명이나 되는군.]

    놀랍게도 제우스는 헤라클레스가 이안에게 격의 맹약을 맺은 것까지 알고 있었다. 이쯤 되면 정보의 출처가 헤라클레스임을 부정할 수 없으니, 설마 약속을 어긴 걸까?

    [하지만 칼리두 와탕카, 아니, 첫 번째 중간계의 변수 이안 페이지여. 혹시 그거 아는가? 처음 최상급 지배자의 격을 얻으면, 바꿔 말해 평의회의 일원이 될 자격을 얻게 되면, 그 지배자는 필연적으로 혼돈의 전당이 주관하는 사상검증을 받는다. 그리고 그 검증을 받는 과정에서 모든 기억이 들쑤셔지지.]

    역시.

    정보의 출처는 헤라클레스였다.

    [네놈의 정체를 알고도 묵인했더군. 그 행위는 시계탑의 지배자로서, 평의회의 일원으로서 매우 치명적인 결함이니, 아마 지금쯤 혼돈의 전당 어딘가에서 정신개조를 받고 있을 게다. 그게 다 끝날 때쯤에는…… 제법 쓸모 있는 하수인으로 거듭나겠지. 기대되지 않나?]

    다만 약속을 어기지는 않았다.

    불가항력적인 일이었을 뿐.

    ‘……결국 내 잘못인가.’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이안 자신의 잘못이었다. 올드 가드와의 약속을 들킨 것도 이안이 저들 앞에서 갈빗대를 썼기 때문이며, 자신의 정체가 밝혀진 것 역시 결과적으로 헤라클레스에게 튀폰의 격을 넘기면서 발생한 문제였으니까.

    ‘……제기랄.’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오직 이안 자신의 잘못이다.

    이런 변수가 일어날 거라고 전혀 예상치 못한 자신의 실책 말이다.

    [자, 이만하면 답변이 되었나?]

    “……네, 충분합니다. 어디서 정보가 샜나 했더니, 그쪽이었네요.”

    [그러게 그냥 입 다물고 가만히 있을 것이지, 그리했다면 적어도 정체가 밝혀지지는 않았을 터. 무난히 지배자의 격을 얻었을 것이고, 그대의 세계를 지킨다는 헛된 목표에 조금은, 아주 조금은 현실성이 생겼을지도 몰랐을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새삼 후회되네요. 그러지 말걸. 설마 일이 이딴 식으로 꼬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

    이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미 반쯤 포기한 말투였다.

    “아무튼 잘 들었습니다. 이제 마음 가는 대로 처분하시죠. 절 어떻게 죽이든 달게 받을 테니.”

    [호오, 이대로 포기하는 건가?]

    “그럼 어쩌겠습니까? 적진 한복판에서 밑천 다 털렸는데, 패자면 패자답게 승복할 줄도 알아야지요.”

    [의외군. 끝까지 발악하고 또 발악할 줄 알았건만, 생각보다 깔끔해.]

    “저 그렇게 질척거리는 놈 아닙니다. 진 건 진 거죠. 인정합니다.”

    물론 말만 그렇게 할 뿐.

    이안은 재빨리 마법을 준비했다.

    이 상황에서 이안이 행할 수 있는 최고의 대응책이자 유일한 탈출구.

    크로노스를 되감는 마법.

    재구축을.

    [그런데.]

    그러나 제우스는 아직 이안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 증거로 여전히 푸르른 안광만을 번뜩거렸다.

    [나는 아직 답을 듣지 못했다.]

    “……무슨 답이요?”

    [내 질문에 대한 답변 말이다.]

    “아, 그거…….”

    슈페리어의 편인지.

    아니면 여전히 고향의 편인지.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질문이다.

    그런데 그걸 굳이 또 묻는다고?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인데?

    “그야 당연히 제 고향이죠.”

    [그런가.]

    “애초에 그 재구성인지 나발인지만 하지 않았어도 저, 여기 없습니다. 고향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겠죠. 근데 다 뒤집어엎는다면서요? 그거 막으러 여기까지 왔는데 제 고향 편 아니면 뭐겠습니까?”

    이안이 어이가 없는 듯 읊조렸다.

    시간 회귀 마법의 술식이 거의 다 완성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질문을 바꾸지.]

    “하십쇼. 얼마든지.”

    [우리 슈페리어의 편이, 정확히는 내 심복이 되어야 네놈의 고향, 첫 번째 중간계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할 용의가 있는가?]

    “……?”

    ……어라?

    이건 좀 뜻밖인데?

    이안이 발동하던 마법을 잠시 멈췄다. 그러고는 제우스에게 물었다.

    “……제가 제우스 님의 심복이 된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다. 나는 네놈이 마음에 든다. 아니, 정확히는 조금 전부터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그게 끝입니까? 마음에 든 거.”

    [네놈을 내 심복으로 만든다면 네놈에게 격의 맹약을 건 헤라클레스와 아테나 역시 내 휘하로 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지. 뿐만 아니라 그 음흉한 놈, 하데스를 견제할 때도 용이하게 쓰일 것이고, 좀처럼 속내가 읽히지 않는 헤스티아의 동향도 겸사겸사 살필 수 있겠군.]

    이안을 자신의 심복으로 만든다.

    그리하면 이안에게 격의 맹약을 건 헤라클레스와 아테나까지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으며,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 하데스와 헤스티아 역시 가시권 안쪽으로 들어올 터.

    “그건 확실히…… 입장 바꿔 생각해 보니 구미가 당길 만하네요.”

    이안이 발동 직전이었던 시간 회귀 주문, 이른바 ‘재구축 마법’을 완전히 중단했다. 그리고 제우스와의 대화에 온 집중을 쏟아냈다.

    이거, 잘하면 분기점이다. 이번 시간대를 오래 유지하며 보다 많은 비밀에 닿을 수 있는 분기점 말이다.

    “심복이 된다는 건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 말이 좋아서 심복이지 꼭두각시라거나…… 그런 거면 그냥 죽을랍니다. 제 취향 아니어서.”

    [오,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나 역시 자아가 있는 심복을 더 선호한다. 그래야 의견도 묻고, 충언도 받지.]

    “현명하시네요. 근데 그러면 저를 어떻게 믿으십니까? 저는 여전히 제 고향의 편이고, 제 고향을 지킬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합니다. 언제든 배신할 수 있다는 뜻이죠.”

    [간단하다. 네놈의 고향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나다. 고향을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그럼 나에게 진심 어린 충성을 바치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

    목적을 이루고 싶다면 충성하라.

    어차피 제우스 본인 말고는 그 누구도 첫 번째 중간계의 평화를 보장해 줄 수 없으니까.

    [나는 오딘과 더불어 평의회의 둘뿐인 최종 결정권자다. 혼돈의 전당은 구성만을 관여할 뿐, 평의회가 내린 자잘한 집행에는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지. 첫 번째 중간계의 재구성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 결정을 유보하면 그만이다. 물론 완전한 취소에는 명분이 필요하겠으나, 지금 당장은 유보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상황인 것 같은데, 아닌가?]

    생존은 있되, 평화가 없다.

    하나 지금으로서는 제우스의 말마따나 그마저도 감지덕지일 뿐이다.

    [그러니 내게 충성을 바쳐라. 네놈이 바치는 그 충성의 시간만큼 네놈의 고향도 살아남을 터이니.]

    만약 제우스가 말하는 충성이 정말로 강제되지 않은 충성이라면?

    그 밑에서 경험과 정보를 쌓는 것도, 그 모든 것을 토대로 기회를 노리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닐 터.

    “……좋습니다. 제 고향을 지킬 수만 있다면야, 그깟 충성 바치지 않을 이유가 없겠죠. 어차피 그걸 위해서 여기까지 온 거니까요.”

    이안이 결단을 내렸다.

    일단 제우스의 밑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시간을 돌리든, 끝장을 보든.

    지금은 그게 최선이다.

    [좋은 판단이군.]

    이안의 선택에 만족한 듯 뇌까린 제우스가 푸른 안광을 번뜩거렸다.

    아직 할 말이 더 남아 있었거든.

    어쩌면 이쪽이 오늘의 하이라이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확실하다.

    [정말 그리 선택했다면 지금 당장 해줄 심부름이 있다. 열두 번째 과업이라고 해도 무방하겠구나.]

    다짜고짜 심부름?

    왠지 예감이 좋지 않다.

    도대체 무얼 시키려는 걸까?

    “……어떤 심부름입니까?”

    [본디 아버지께 인신공양할 오백만의 목숨을 네놈의 고향, 첫 번째 중간계에서 공수하기로 했었다. 어차피 재구성될 벌레들, 지극히 합리적인 결정이었지. 그러나 이제는 얘기가 좀 달라졌어. 그 세계를 지키려는 네놈이 내 수족으로 들어왔으니까. 나는 내 부하의 동족이 몰살당하는 걸 보고 싶지 않다.]

    “그 말씀은…….”

    [그 오백만의 목숨을 네놈에게 맡기겠다. 머릿수만 맞춰온다면 어디서 구하든 상관하지 않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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