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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280화 (28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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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2부 94화

    이안은 일상으로 돌아왔다.

    일상이라는 표현이 조금 웃기긴 하지만, 이제 그에게 일상은 과업이 되었다. 과업 완수를 위하여 움직이는 순간이 곧 일상이었으니까.

    ‘그래도 어떻게 꾸역꾸역 여기까지 왔네. 시간 한번 되감지 않고.’

    무려 열 번째 과업의 완수가 코앞이다. 이제 이 모자와 지팡이만 헤르메스한테 넘기면 끝날 터.

    [어…… 왔어?]

    다시 만난 헤르메스는 이안이 어색한 듯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확실히 태도가 예전과는 달랐다.

    튀폰과의 일전 이후 이안을 향한 시선들이 조금 바뀐 모양이리라.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글쎄, 아직 판단할 수 없을 것 같다.

    [다 가져왔네. 내 모자, 지팡이.]

    신중을 기하는 이안에게 헤르메스가 여전히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의 석상은 공양그릇에 놓인 지팡이와 모자를 가만히 지켜보는가 싶더니, 결국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이안에게 돌려줬다.

    [그…… 그냥 지팡이는 너 계속 써. 어차피 그 영감탱이가 너한테 준 거고…… 그리고 그 모자 말이야. 그것도 헤라클레스한테 다시 돌려줘. 싫다고 하면 너 갖고.]

    “……네?”

    [생각해 보니 좀 그래서, 줬다 뺏는 거잖아? 그거만큼 치사한 게 또 어디 있겠어? 그러니까 헤라클레스한테 말 좀 잘해줘. 알았지?]

    “…….”

    아하.

    왜 이러는지 알겠다.

    헤르메스는 튀폰의 격을 먹어치운 헤라클레스와 시작부터 껄끄러운 관계로 굳어지는 것이 싫었다.

    그러니 이안에게 부탁하는 거다.

    헤라클레스는 분명 여분으로 받은 목숨을 시계탑, 그리고 칼리두 와탕카에게 입은 은혜를 갚는 일에 모조리 쓰겠노라 천명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지금쯤이면 결과가 나왔을 텐데, 도대체 얼마나 강해졌으면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최상급 지배자 헤르메스다.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성격의 소유자 아니던가?

    한데 그런 존재가 헤라클레스와의 관계를 걱정하고 있다. 이는 곧 측정 결과가 엄청나다는 뜻이겠지.

    ‘모르긴 몰라도 헤르메스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군.’

    최상급 지배자 그 이상.

    제우스와 오딘, 좀 더 범위를 넓히면 각 전당의 삼황으로 손꼽히는 하데스, 포세이돈, 토르, 그리고 헬라와 비교할 수 있으리라.

    ‘정말 거기까지 갔다면…… 이거 생각보다 더 든든한 아군인데?’

    그런 존재와 격의 맹약까지 맺었다. 이는 앞으로 이안의 행보에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줄 터.

    ‘이로서 맹약을 걸어놓은 헤라클레스와 아테나, 조건부적인 아군 하데스와 헤스티아까지, 꽤 많은 옵션이 생겼다. 자의든 타의든 날 도울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니까.’

    괜찮은 옵션이 참 많아졌다.

    언젠가 요긴하게 쓸 날이 오겠지. 이미 어느 정도 쓰고 있기도 하고.

    [……저기, 칼리두 와탕카. 왜 대답이 없어? 혹시 내가 지팡이 뺏어가려고 했던 것 때문에 그래?]

    입을 꾹 다문 이안의 반응에 애가 타기라도 한 걸까? 헤르메스가 굉장히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런 거라면 사과할게. 그냥 내가 쓰던 물건이라서 억지를 부렸던 것뿐이야. 필요하면 지팡이에 다른 것도 얹어줄 테니까…….]

    “아, 그런 거 아닙니다. 잠깐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아무튼 감사히 받겠습니다. 헤라클레스 님한테도 말씀 잘 드려놓도록 하죠.”

    [오, 진짜?]

    “물론입니다.”

    [고마워. 진짜 고마워! 괜히 심술부려서 미안하고. 특히 헤라클레스한테도…… 줬다 뺏어서 미안하다고 전해줘. 꼭 좀 부탁할게. 응?]

    새삼 어이가 없다.

    이래서 힘이 필요한가 보다.

    지배자의 격이 더욱 절실해졌다.

    [아, 그리고 수행자야. 너 당분간 몸 좀 사리는 게 좋을 것 같아.]

    “네? 그게 무슨…….”

    [제우스 님께서 널 그리 달가워하지 않으시는 것 같거든. 뭐, 그분 처지에서는 그럴 만도 하지. 본인이 다 먹으려던 걸 빼앗긴 걸로 모자라서 새로운 경쟁자까지 생겼으니까. 아, 물론 난 네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잘한 일이지. 모든 걸 특정 지배자만 독식하는 거, 말도 안 되잖아?]

    비록 이안과 헤라클레스의 눈치를 보고 있다곤 하나, 헤르메스조차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평소 제우스의 독재가 얼마나 심했는지 대략적으로나마 가늠되었다.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맙기는, 그래도 그분 뒤끝이 엄청 길진 않으니까 너무 걱정하진 말고, 당분간만 사려. 알았지?]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음? 그런데?]

    “제가 알기로 헤라클레스 님은 장차 제우스 님과 헤라 님의 사위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들었는데요.”

    [아, 그 소문은 나도 들었어. 듣자하니 헤라 님께서 헤라클레스를 헤베의 반려자로 낙점했다더군.]

    “그럼 제우스 님한테는 좋은 거 아닙니까? 물론 본인이 독차지하는 것보다야 별로겠지만, 그래도 예비 사위가 강해지는 건데…….”

    [하하하하! 이런, 칼리두 와탕카. 네 녀석 보기보다 순진하구나?]

    갑자기 왜 웃지?

    그리고 뭐? 순진해?

    다짜고짜 무슨 소리일까?

    [우리 시계탑은 말이야. 음, 일종의 뭐라고 할까…… 말하자면 거대한 동물의 왕국이라고나 할까?]

    “동물의…… 왕국 말씀이십니까?”

    [다 그런 건 아닌데, 제우스 님은 뭐랄까…… 그 왕국의 일등공신? 아니, 아니지. 그냥 왕이야. 왕.]

    “…….”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본인부터 그러니 남들도 똑같아 보이겠지. 사위고 나발이고 없을걸?]

    아아, 대충 무슨 뜻인지 알겠다.

    헤라가 그토록 사생아 유무에 집착했던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비단 그녀가 가정의 평화를 중시해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간 겪어본 게 많았으리라.

    [……음, 내가 너무 입방정이 심했던 거 같네.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어디 가서 내가 이런 얘기 해줬다고는 하지 말고.]

    “기본이죠.”

    [좋아. 그럼 앞으로 남은 과업…… 몇 개지? 두 개 남았나?]

    “그렇습니다.”

    [이야,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구나? 잘해봐. 잘해서 조만간 다시 만나자고. 지배자 대 수행자 말고, 지배자 대 지배자로. 어때?]

    “좋지요.”

    [그치?]

    눈에 보이지 않는데도 보이는 것 같다. 개구쟁이처럼 씨익 웃고 있는 헤르메스의 앳된 얼굴 말이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과업 완수를 깜빡했잖아? 얼른 손등 좀 보여줘. 바로 각인시켜줄 테니까.]

    물론 손등의 각인으로 하여금 열 번째 과업 완수를 인정받는 것도 빼먹지 않았으니, 이제 정말 고지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오냐, 몸조심하고, 헤라클레스한테 얘기 잘해주는 거 잊지 말고!]

    지체할 필요 없다.

    바로 열한 번째 과업을 시작하자.

    다만 그전에 먼저 만날 지배자가 있다. 바로 헤파이스토스였다.

    [오……! 그렇지 않아도 걱정 많이 했네. 괜히 내 부탁 때문에 봉변을 당하는 건 아닐까 해서…….]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다행이구먼. 이제야 조금 마음이 놓여. 그래도 당분간은 몸조심하시게나. 제우스 님께서 자네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으신다죠?”

    [……이미 알고 있구먼. 허면 어째서 그러는 건지도 알고 있는가?]

    “네,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구먼. 내 괜한 걱정을 했어.]

    “아닙니다. 헤파이스토스 님께서 걱정을 해주셨다는 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영광입니다.”

    정중한 아부에 약한 지배자다.

    틈이 보일 때마다 공략해 놓자.

    [허허허, 자네는 정말이지…… 내 자식새끼들이 자네 반만 닮았어도 사는 게 참 즐거웠을 텐데…….]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

    물론 잠깐일 뿐이었다.

    [……헌데, 여전히 그 지팡이를 들고 있군. 케리케이온 말이야. 아직 꼬맹이한테 돌려주지 않은 건가?]

    꼬맹이란 헤르메스를 뜻할 터.

    이안이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뇨, 돌려 드리려고 했는데, 그냥 가지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일단은 챙겨뒀습니다만, 어찌할까요?”

    [오호, 그래? 그냥 줬어?]

    “네, 마음이 바뀌셨다고…….”

    [마침 잘되었군. 이왕 이렇게 된 거 둘이 합쳐 버리면 딱 좋겠어.]

    “합친다 하시면……?”

    [자네한테 만들어주려고 했던 지팡이 말일세. 그 사달이 났으니 재료는 당연히 못 구했을 테지?]

    “워낙 경황이 없었던지라.”

    [암, 그랬겠지. 다 이해하네. 그걸 뭐라 하려고 물어본 건 아니야. 다만 재료를 구하지 못했고, 하필 거기서 큰 싸움이 나는 바람에 앞으로도 영영 구할 수 없게 되었으니…… 사실 나도 난감하던 참이었거든. 근데 방법이 생겼어. 그 지팡이에서 추출하면 간단한 문제니까.]

    케리케이온에서 재료를 추출한다.

    이후 기존의 재료와 추출된 재료를 섞어 새로운 지팡이를 만든다.

    일단 듣기로는 쉬워 보인다.

    정말 쉬울지는, 모르겠다.

    [내 지금 바로 만들어주지.]

    “……그게 가능한가요?”

    [이미 준비는 다 끝내놓았거든. 그러니 잠깐이면 돼. 혹시 바쁜가?]

    “아뇨, 딱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게나.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음…… 알겠습니다.”

    [좋아. 다녀오도록 하지.]

    그로부터 얼마 후.

    케리케이온을 갖고 갔던 헤파이스토스가 처음 보는 지팡이와 함께 나타났다. 심지어 석상을 통한 것이 아닌, 본인이 직접 배달해 왔다.

    “헤파이스토스 님……?”

    [쉿, 그냥 이따금씩 마실 나갈 때 쓰는 껍데기일세. 그러니 이 지팡이나 받고 모른 척하시게나.]

    그리 말하며 지팡이를 건넨다.

    언뜻 보면 그저 평범한 나무 지팡이처럼 보이는 그런 물건이었다.

    과거 이안이 사용했던 대초원의 지팡이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할까?

    다만 차이가 있다면 손에 잡자마자 느껴지는 힘이었다. 흔히 ‘격’이라고 불리는 그 특별한 힘 말이다.

    “확실히…… 느껴지는 격부터 케리케이온하고는 차원이 다르네요.”

    [그렇지? 내 분명 그럴 거라 했잖아? 애초에 비교할 감도 아니라고.]

    아깐 아쉬움으로 가득하더니만.

    이번에는 자부심이 흘러넘친다.

    시계탑 최고의 대장장이다웠다.

    [잘 쓰라고. 내가 만든 작품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걸작이니까.]

    역대 최고 수준의 걸작!

    이것으로 지팡이는 종결이리라.

    “이름이 뭔가요?”

    [음? 이름?]

    “이 지팡이의 이름 말이죠. 원래 걸작은 이름을 갖는 법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이거, 너무 급히 가져오느라 제대로 된 이름 하나 지어주지 못했군. 이런 실수를……!]

    모름지기 걸작이라면 그 품격에 어울리는 이름이 존재하는 법이다.

    그리고 이 지팡이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친다.

    [가만있자, 어떤 이름이 좋을까?]

    고민이 길어졌다.

    지팡이를 만들 때보다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으니, 헤파이스토스에게는 이름을 짓는 것이 걸작을 만드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 같았다.

    [으으음……! 모르겠구먼. 정말 모르겠어. 내 안 그래도 작명에 소질이 없거늘, 이렇게 갑자기 지으려니 영…… 시상이 떠오르질 않아.]

    결국 기나긴 고민 끝에 내려진 결론은 ‘포기’였다. 대신 그 골칫덩이를 이안 쪽으로 휙 던져 버렸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자네 지팡이니 자네가 알아서 지어줘.]

    “……네?”

    [이제 자네 새끼잖아? 자고로 제 새끼 이름은 부모가 지어주는 법이지. 천천히 고민해서 그럴듯한 이름 하나 떡하니 지어주라고.]

    “…….”

    [그럼 이만 가 봐야겠군.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모쪼록 잘 쓰라고.]

    그리 말하며 쌩하니 가버린다.

    이름 짓는 게 저 정도로 싫을까?

    아님 정말 바쁜 일이 있는 걸까?

    “…….”

    순간 할 말을 잃어버린 이안이 새로 얻은 지팡이, 아직 이렇다 할 이름이 없는 지팡이를 바라봤다.

    “어…… 음…… 앞으로 잘 부탁해. 이름은 조만간 어울리는 걸로 지어줄 테니까 섭섭해하지 말고.”

    어색한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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