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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273화 (273/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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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2부 87화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보통은 그렇다.

    목청을 조금만 높여도 어련히 알아서 넙죽 엎드린다. 지배자 앞에 선 수행자란 놈들은 항상 그랬다.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온 극소수의 몇 놈만 빼면, 사실상 전부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그런데…….’

    이놈.

    칼리두 와탕카.

    이미 시계탑에 소문이 자자한, 얼마 전에는 아테나를 필두로 거행된 번외 과업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뽐내며 우승까지 거머쥔 저 수행자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저쯤 되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수준이 아니다. 그냥 태어날 때부터 이미 튀어나와 있었으리라.

    ‘문제는 할 말이 없단 건데…….’

    당신 도둑의 지배자라며?

    근데 왜 도둑질했다고 뭐라 해?

    오히려 칭찬을 해줘도 모자라지.

    그 논리를 파훼할 방법이 없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거든.’

    흐음.

    이를 어쩐다?

    헤르메스가 고민했다.

    앳된 얼굴이 슬쩍 일그러졌다.

    그는 이곳 시계탑에서 유일무이하게 황금 사과를 먹지 않고도 젊음이 계속 유지되는 지배자였다.

    [……그런 건 모르겠고, 그냥 돌려줘! 내 지팡이! 내 케리케이온!]

    그 지배자의 결론은 떼쓰기.

    무려 최상급 지배자의 격을 갖춘 존재치고는 참 하찮은 대응이었다.

    “거절하겠습니다.”

    [왜!]

    “헤파이스토스 님께서 저에게 친히 내려주신 선물이니까요.”

    [그러니까! 그 지팡이가 원래!]

    “헤르메스 님의 지팡이였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제 물건이니, 돌려받고 싶으시면 헤파이스토스 님께 문의해 보십시오. 그분께서 돌려주라 하시면 군말 없이 돌려 드리겠습니다.”

    [이익……!]

    무슨 헤파이스토스한테 문의해?

    애당초 그 괴팍한 늙은이랑 싸워서 지팡이까지 빼앗겨 버린 건데.

    [그 영감탱이하고 얘기할 일 절대 없으니까 그냥 내놔!]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선 헤파이스토스 님과 상의해 보시고…….”

    [네놈,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먹어? 이제 평생 그 영감탱이랑 말 한마디 섞을 일 없다니까?!]

    “그럼 어쩔 수 없죠.”

    [이이이익……!]

    어쩔 줄을 모르는 헤르메스.

    이안이 그런 그를 가만히 지켜보며 생각했다. 하데스의 조언으로는, 아니, 사실 조언까지 갈 필요도 없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인데, 이 헤르메스란 지배자는 굉장히 아이 같은 성격을 가졌다.

    착한 아이들 말고, 제 성질을 못 이겨 박박 우기고 떼쓰는 어린애.

    인간으로 치면 사춘기 꼬맹이 같다고나 할까? 이안보다 수천 배는 더 산 자가 사춘기라니, 심각하다.

    ‘그래도 잘만 이용하면…….’

    단순한 놈 같다.

    아레스보다 훨씬 더.

    이용해먹기 쉽다는 거다.

    “헤르메스 님, 우리 그러지 말고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잠시 생각을 정리한 이안이 속삭이듯 읊조렸다.

    [……뭐?]

    그러자 헤르메스도 덩달아 속삭인다. 석상만 아니었다면 자세까지 낮춰 귀를 기울였을지도 모르겠다.

    “제가 조금 급해서 그러는데, 과업 난이도 좀 줄여주시겠습니까?”

    [뭔…….]

    “그냥 이대로 과업을 완수 처리해 달라고 하진 않겠습니다. 그건 너무 양심이 없고, 과업이라는 취지에 맞지도 않으니까요. 괜히 나중에 문제가 될 가능성도 있고요.”

    [그러니까 지금 뭐 하자는……!]

    “그럼 이 지팡이, 드리겠습니다.”

    [……준다고?]

    “네.”

    [진짜?]

    “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선물 받은 거라 안 된다며? 알아서 그 괴팍한 영감하고 상의해 보라며?]

    “그건 아무런 대가도 없을 때 얘기고, 지금은 제가 원하는 바를 말씀드린 상황 아닙니까?”

    […….]

    “그러니 이건 일종의 거래인 셈이죠. 한쪽의 일방적인 강탈이 아니라요. 이게 그림이 더 좋습니다.”

    이안의 말을 끝까지 다 들은 헤르메스가 아직 수염 한 톨 자란 적 없는 턱을 천천히 매만졌다.

    ‘처음에는 뭔 개소리를 하는가 싶었는데…… 듣고 보니 괜찮잖아?’

    처음에는 웬 미친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다. 한데 계속 듣다 보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 되었다.

    ‘그 영감탱이랑 말 한마디 섞지 않고 지팡이만 쏙 되찾을 수 있다면야…… 솔직히 아무래도 좋아.’

    정말 아끼는, 마음에 드는 지팡이였다. 그 이후 여러 장인한테 비슷한 성능의 지팡이를 의뢰해 봤지만 어느 것 하나 케리케이온의 발끝 떼만도 따라가지 못했으니까.

    ‘과업을 그냥 끝내달라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쉽게 내달라잖아?’

    이 정도면 딱히 시계탑 평의회에서 꼬투리 잡을 건수도 없겠고.

    ……이거, 생각보다 괜찮은데?

    [……네놈,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정말 그 지팡이를 주겠다고?]

    “물론입니다.”

    [자칫 그 영감탱이의 분노를 살 수도 있어. 헤파이스토스 말이다.]

    “그 분노 달래는 게 진짜 과업이라 생각하고 어떻게든 해봐야죠.”

    [……어쭈?]

    이놈 봐라?

    그게 진짜 과업이니까, 지금은 과업 같지도 않은 과업을 내놓아라.

    뭐 그런 뜻인가?

    [재밌는 놈이구나 너?]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 맞아. 난 재밌는 놈들을 좋아하거든. 괜히 무게 잡고 따분한 놈들보다 훨씬 낫잖아? 안 그래?]

    이안의 제안이 마음에 들어서.

    혹은 지팡이를 되찾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져서일까?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로 돌변한 헤르메스였다.

    [아무튼 좋아. 그 영감탱이랑 말 섞지 않고 지팡이를 찾을 수만 있다면야 무슨 짓인들 못 할까. 네놈의 그 제안, 받아들이도록 하지.]

    마치 꼬맹이가 어른 흉내를 내는 것처럼 보이는 말투와 몸짓이다.

    도대체 어딜 봐서 수천, 수만 년 이상 묵은 존재인지 모르겠다.

    [근데 말이다.]

    “말씀하십시오.”

    [네놈이 급한 거랑 과업의 난이도가 무슨 상관이지? 빨리 과업을 끝내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

    “아, 그거요. 별거 아닙니다. 그냥 지배자의 격이 급해서요.”

    [지배자의 격이 급해……?]

    “쓸 데가 좀 있어서.”

    […….]

    ‘좀’ 쓸 데가 있다?

    무려 지배자의 격이?

    ‘이거 완전 미친놈이잖아?’

    웬만하면 건들지 말아야겠다.

    그냥 조용히 지팡이나 찾아야지.

    [……뭐, 아무튼 네놈, 운 좋은 줄 알아라. 원래 이 바닥에서 나만큼 정신 나간 과업을 주는 지배자가 없거든. 근데 네놈은 쉬운 걸 받게 되었으니…… 완전 꿀이잖아?]

    사실이다.

    이안도 하데스한테 들어서 안다.

    헤르메스의 장난 같으면서도 잔혹한 과업에 죽어 나간 수행자가 많다고, 조심하는 게 좋을 거라고.

    해서 이안은 지팡이로 하여금 그 위협 자체를 사전에 지워 버렸다.

    현명한 판단일지 아닐지는, 이제 전적으로 헤르메스에게 달렸을 터.

    [아무튼, 내가 네놈한테 맡길 과업, 그 쉬워빠진 임무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이거다. 이거!]

    그 순간.

    이안의 눈앞에 아주 자그마한 별빛 같은 것이 수놓아져 어떤 형태를 이루어냈다.

    ‘……모자?’

    마치 양쪽에 날개가 달린 모자와도 같은 형상이었는데, 갑자기 웬 모자일까? 그 까닭은 곧 밝혀졌다.

    [내 결점 없는 인생에 유일한 실수가 있다면, 바로 그 모자를 수행자한테 줘버렸다는 거야. 홧김에 말이지. 도통 왜 그랬는지 원…….]

    동시에 프로메테우스로부터 전해 받은 기억 중 일부가 되살아났다.

    그 기억을 따르면 저 날개 달린 모자의 이름은 ‘페타소스Petasus’.

    한때 헤르메스의 상징과도 같은 모자로서, 착용하는 이에게 엄청난 격과 권능을 선사한다는 모자였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 모자를 네놈이 찾아다 줬으면 좋겠군. 이제 슬슬 되찾을 때가 된 것 같아.]

    줬다가 다시 빼앗아?

    이런 치사한 놈을 봤나.

    헤르메스의 기상천외한 사고방식에 속으로 혀를 차는 이안이었다.

    “수행자에게 줬다고 하셨는데, 아시다시피 번외 과업으로…….”

    [아아,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놈은 이제 수행자가 아니거든. 지배자의 격을 허락받았지.]

    가만, 그러니까 지금 지배자한테서 모자를 훔쳐오라고? 장난해?

    [어때, 쉽지?]

    “……그게 어떻게 쉽습니까?”

    [내가 평소 수행자들한테 주는 과업에 비하면 진짜 쉬운 거야.]

    “…….”

    [믿지 못하겠으면 한번 물어보든가. 과업 완수하고 지배자가 된 놈들한테. 이번에 모자 훔치면서 만날 그놈한테 물어봐도 되겠네.]

    이안의 반응에 헤르메스가 피식 웃었다. 굉장히 의기양양한 미소였다. 최상급 지배자씩이나 돼서 한 방 먹은 채로 물러날 순 없잖아?

    “……일단 알겠습니다. 그럼 정확히 누구한테서 모자를 훔쳐오면 됩니까? 간단한 정보와 거주지 정도는 알려주셨으면 하는데.”

    [아마 너도 들어는 봤을 거다. 이쪽에서는 워낙 유명한 놈이니까.]

    심지어 유명하단다.

    그만큼 강할 확률이 높다.

    이거 정말 쉬운 과업 맞나?

    “그러니까 그게 누구…….”

    [헤라클레스.]

    “……헤라클레스 말인가요?”

    [항상 평의회의 새로운 일원으로 거론되는 놈이지. 그만큼 유망한 녀석이거든. 그러니 내가 홧김에 모자까지 준 거 아니겠어?]

    헤라클레스.

    이런 전개는 예상치 못했다. 설마 여기서 그 이름이 나올 줄이야.

    아, 물론 싫지는 않다.

    오히려 좋지.

    ‘이번에야말로…….’

    약속을 발동할 때가 온 것 같았다. 무엇이든 딱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던 헤라클레스의 맹세 말이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이안이 피식 웃었다.

    그것은 헤르메스가 조금 전에 보여줬던 미소만큼, 아니, 그보다 곱절은 더 의기양양한 미소였다.

    ‘……이놈, 왜 실실 쪼개지?’

    그 미소의 까닭을 전혀 알 도리가 없는 헤르메스였으니, 그는 그저 이안이 당혹감에 그만 헛웃음이 나오는 거라고 여길 뿐이었다.

    * * *

    [오랜만이구나. 예의 바른 수행자여. 아테나가 꾸민 번외 과업에서 그대의 활약상은 잘 보았도다.]

    물론 이안은 어지간해서 케리케이온을 돌려줄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헤라클레스보다 먼저 만나 이야기 나눌 존재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바로 헤파이스토스.

    이안에게 지팡이를 선물한 제작자이며, 불과 망치의 지배자인 그를 본떠 조각한 석상이었다.

    “저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헤파이스토스 님.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무탈했지. 더할 나위 없이. 나보다는 수행자가 무탈해 보여서 다행이로군. 이제 열 번째 과업인가?]

    “네, 그렇습니다.”

    [보통 거기까지 올라간 수행자들을 보면 팔이든, 눈 한쪽이든, 꼭 어디 한 곳이 사라져 있게 마련이던데, 그대는 열 번째 과업의 수행자답지 않게 아주 깔끔하구먼.]

    “이게 다 헤파이스토스 님께서 살펴주신 덕분 아니겠습니까?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안이 오른손에 쥔 헤파이스토스의 선물, 케리케이온을 슬쩍 흔들어주며 대꾸했다. 헤파이스토스 역시 그런 이안의 아부가 싫지만은 않은 듯 조용히 듣기만 했다.

    [그래, 무슨 용건으로 나를 부른 게냐? 나는 그대가 수행 중인 과업의 계시자도 아닐 터인데.]

    “전에 말씀드렸듯, 꼭 용건이 있어야 찾아뵙는 건 아니죠. 한 번씩 들러서 인사도 올리고, 이야기도 나누고, 그게 예의 아니겠습니까?”

    헤파이스토스는 예의를 중시한다.

    그 특징을 잊지 않은 이안이었다.

    [알지. 아는데, 그냥 인사차 왔다고 보기에는 그대의 표정이 어두워서 말이다. 그러니 물어볼 수밖에 없더군. 혹 무슨 일이 있나?]

    표정 연기 성공이다.

    미끼를 던지니 확 문다.

    이미 헤파이스토스와의 친밀도가 상당히 높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 정도면…… 한번 찔러봐도 괜찮겠군. 쉽게 꺾일 호감이 아니야.’

    그리 결론을 내린 이안이 무척이나 힘든 척하며 천천히 읊조렸다.

    “……실은, 헤파이스토스 님께서 선물해 주신 이 귀한 지팡이, 케리케이온에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음? 문제라니, 정확히 어떤 문제를 말하는 게지? 그게 고장이 나거나 파손될 물건은 아닐 텐데.]

    “아뇨, 그런 문제가 아니고, 사실 이번 열 번째 과업의 계시자가 헤르메스 님이십니다. 그래서…….”

    [아, 무슨 뜻인지 알겠군. 보나 마나 자기 지팡이라고, 당장 내놓으라고 발광을 했겠지. 아닌가?]

    “…….”

    이안이 대답 대신 고개를 슬며시 끄덕거렸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그래서, 어찌했느냐?]

    “수행자에 불과한 저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지라, 이번 과업만 끝내고 돌려 드리겠다 약속은 해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닌 것 같더군요.”

    [무엇이?]

    “헤파이스토스 님께서 선물로 주신 지팡이 아닙니까? 집안의 가보로 삼아 대대손손 물려줘도 손색이 없는 보물을 그깟 과업 때문에 포기한다는 게…… 제가 이러려고 수행자가 됐나 회의감이 들고 그러네요.”

    [으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눈앞에 그려진다.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들썩이는 헤파이스토스의 입가와 어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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