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2부 84화
[……저는 아홉 번째 과업의 계시자 헤스티아입니다. 사과 향이 너무 향기로워서 소개가 늦었네요.]
시작부터 새롭다.
고작 인사인데 뭐가 그리 새로우냐? 간단하다. 자신이 어떤 지배자인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이름 딱, 인사 딱, 사과 딱.
실로 정상적이잖아?
그러니 새롭지.
[아홉 번째 과업의 수행자 칼리두 와탕카 님, 맞으시지요?]
“……아, 그렇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헤스티아 님.”
[아테나의 번외 과업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그런 여흥에 취미가 없어서 직접 볼 순 없었지만, 벌써부터 시계탑에 소문이 자자하시더군요.]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드물게 겸손하시네요. 보통 아홉 번째 과업쯤 되면 다들 어깨에 힘이 들어서 오시던데.]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네?]
“드물게 온화한 성품을 가지셨네요. 보통 지배자쯤 되면 수행자를 노예쯤으로 여기시던데.”
[아……!]
헤스티아가 당혹감 섞인 감탄을 내뱉었다. 설마 자신의 말을 그대로 돌려받을 줄이야.
[……확실히, 그런 경향이 있기는 하죠. 물론 예외도 있답니다.]
“헤스티아 님처럼 말이죠.”
[그렇게 봐주시니 고맙네요.]
“제가 지배자분들 사이에서 유명한 것처럼, 헤스티아 님도 수행자들 사이에서 유명했습니다. 보기 드물게 저희를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시는 분이라고요. 솔직히 안 믿었는데, 직접 뵈니 사실이었네요.”
그런 소문 들은 적 없다.
하데스한테 처음 들었거든.
그럼에도 이렇게 말한 이유는 간단하다. 이제 생활이 되어버린 ‘첫인상 호감 작업’ 되시겠다.
[그런 소문이…… 말씀을 들으니 더더욱 후회가 되네요. 좀 더 적극적으로 막았어야 했는데…….]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아테나가 벌인 그 학살극, 번외 과업을 말이지요. 너무 소극적으로 말린 게 아니었나 싶네요.]
그걸 말렸어?
정말 남다르긴 하네.
역시 동료 지배자의 평가만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하데스였다.
“평의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라 들었습니다. 헤스티아 님 혼자서 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겠죠.”
[그렇긴 해도…….]
그렇지 않아도 꾸준하게 느끼고 있었던 죄책감이 몰려온 탓일까?
잠시 침묵했던 헤스티아가 마음을 다잡고는 계속 읊조렸다.
[……사설이 길었네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칼리두 와탕카 님. 그리고 번외 과업 우승을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더 뜸들일 필요가 없겠죠. 바로 아홉 번째 과업을 시작하실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바야흐로 아홉 번째 과업의 시작.
과연 이 온화하고 자애롭기로 소문난 헤스티아의 임무는 뭘까?
[……우리 잠깐 따로 만날까요?]
“예? 따로 만난다 하시면?”
[조금 은밀한 부탁이라서, 이렇게 석상 말고 직접 만나서 말씀드리고 싶은데, 부담스러우시면…….]
“아뇨, 부담스럽다기보다는, 그냥 이런 경우가 처음 겪어봐서요. 제가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신전 밖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지금 그쪽으로 갈 테니.]
그로부터 잠시 후.
올림포스 신전 앞으로 어떤 수수한 차림의 슈페리언 여인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녀가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허억! 헉! 저예요. 수행자 님.]
“……네, 딱 봐도 알겠습니다.”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본신하고는 많이 다를 텐데…… 아, 그러고 보니 수행자님께서는 아직 저의 본신을 만난 적이 없으시군요?]
“제 기억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래도 용케 알아보셨네요!]
그리 허겁지겁 달려오는데 못 알아보는 것이 더 이상한 것 같다만.
굳이 따져 물을 필요는 없겠지.
“그럼 이제 뭘 하면 됩니까?”
[음, 잠시 걸을까요?]
“원하신다면.”
[그럼 이쪽으로.]
그렇게 한동안 걸었다.
진짜 그냥 걷기만 했다.
올림포스 신전 일대를 넘어 흑요석 성벽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얼마나 은밀한 과업을 내어주려고 이리 질질 끄는 걸까?
[수행자 님, 저기를 좀 보세요.]
마침내 헤스티아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손은 흑요석 성벽 아래로 보이는 광활한 대지를 가리켰다.
[정말 넓죠? 아름답고.]
“그러네요. 확실히.”
인정한다.
솔직히 아름다운 땅이다.
빼앗아버리고 싶을 만큼.
[하지만 수행자 님. 저 땅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큼 마냥 아름답지가 않답니다. 그것도 아시나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정작 안으로 들어가서 보면 아버지의 선택을 받지 못한 벌레들이 여기저기 숨어 살고 있거든요.]
아버지의 선택을 받지 못한 벌레.
그것은 분명 추방자를 뜻할 터.
다른 지배자라면 모를까, 헤스티아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투였다.
[해서, 수행자 님께 그 청소를 맡길까 합니다. 저 아름다운 대지를 더럽히고 좀먹는 벌레들, 추방자들을 소탕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추방자 소탕.
역시나 어울리지 않는 과업.
헤스티아가 몇 마디 덧붙여 말했다.
[물론 그 수가 너무 많으니 전부는 어렵겠고, 제가 파악해 둔 몇몇 은신처만 청소해 주시면 아홉 번째 과업, 완수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
이래서 멀찌감치 나온 건가?
자신의 평소 온화한 이미지와 전혀 상반되는 과업을 내리고자?
‘……라고 생각하겠지. 보통은.’
하나 이안은 달랐다.
그는 이미 하데스에게 헤스티아와 관련된 몇 가지 정보를 받았다.
또한 그 정보를 따르면, 헤스티아는 절대로 이런 과업을 내릴 인물이 아니다. 그러니 이건 시험이다.
‘진짜’ 과업을 내릴 만한 수행자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를 판가름하는 그녀 나름의 시험 말이다.
‘여기에 가장 이상적인 답은…….’
이안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대충 정답을 알고 있었으니까.
“거절하겠습니다.”
첫 번째 정답은 거절.
그리고 두 번째 정답은…….
“저는 딱히 추방자들을 벌레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청소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 적도 없으니까요.”
어지간한 지배자들.
아니, 심장 안에 사는 슈페리언이 들었어도 기겁을 할 만한 발언.
그런 말을 이안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심지어 그들을 청소해 달라는 최상급 지배자 앞에서 내뱉었다.
“그러니 말씀하신 과업은 거절하겠습니다. 다른 걸로 바꿔주십시오.”
[……진심인가요?]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죠. 다른 문제도 아니고 추방자 문제인데.”
[제가 조금 인격적으로 대해줬다고 착각하신 모양인데,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따르라면 따르세요. 평생 아홉 번째 과업에서 멈추기 싫으시면 말이죠.]
“그럼 그냥 여덟 번 완수한 걸로 만족하렵니다. 아까 말씀하셨죠? 이미 역사상 최강의 수행자가 되었다고. 이 정도 격이면 저 한 몸 잘 먹고 잘살기는 충분하겠네요.”
[…….]
너무나도 확고한 대답 때문일까?
헤스티아가 순간 말문을 잃었다.
물론 길지는 않았으니, 가까스로 정신 차린 그녀가 다시금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죠? 슈페리언들에게 추방자들은 그저…….]
“죄를 지은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태어나고 보니 추방자일 뿐인데, 딱히 차별하고 싶진 않네요.”
[그, 그런…….]
정말이지 드물다.
이렇게 대답하는 수행자.
대부분 쉬운 과업이 걸려 좋아할 뿐이었으니, 그럴 때마다 헤스티아는 항상 말을 바꿔 적당히 어려운 과업으로 변경하고는 했다.
그런데 오늘, 실로 오래간만에 임자를 만났다. 그녀의 ‘진짜’ 과업의 수행자가 될 적임자를 말이다.
[……그렇다면, 만약.]
잠시 고민에 빠졌던 헤스티아.
이내 그녀가 꺼내기 시작했다.
마음에 담아놓은 본심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살리는 일이라면, 억울하게 쫓겨나서 평생 숨어 사는 그들을 돕는 일이라면 어떤가요? 그것도 거절인가요?]
죽이는 일이 아닌 살리는 일.
바로 그것이 헤스티아의 본심.
혹은 진정한 아홉 번째 과업.
‘역시.’
이번에도 하데스의 조언이 맞아떨어졌다. 새삼 정말 지배자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는 것 같다.
‘보기 드물게, 아니, 유일무이하게 추방자들을 향한 죄책감과 측은지심을 품고 있는 지배자라고 했지.’
그 덕분에 한고비 넘겼다.
적어도 과업을 수행하는 동안에는 최고의 동업자가 맞기는 했다.
“살리고 돕는 일이라, 글쎄요. 조금 더 정확한 설명 가능하십니까?”
[수락하지 않는 이상 해드릴 설명은 여기까지입니다. 표현 그대로 이해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흐음.”
다 알면서도 고민하는 척을 한다.
어째 슈페리어 차원으로 넘어와서 처세술만 늘어나는 것 같다.
“……뭐, 좋습니다. 어차피 과업이니, 추방자 좀 도왔다고 저한테 해가 될 일은 없겠죠. 하겠습니다.”
[저, 정말이신가요?]
“물론입니다.”
[와!]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본능적으로 이안의 양손을 덥석 잡을 뻔했던 걸 용케도 멈췄다.
[……고마워요. 오늘따라 유독 느낌이 좋더라니, 이렇게 좋은 수행자를 만날 거라서 그랬나 봐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번 과업을 받을 때하고는 많이 다르네요. 계시자 차이였나 봅니다.”
정상적인 지성체를 오랜만에 만나서 그럴까? 이안도 다른 지배자들을 대할 때와는 미묘하게 달랐다. 조금 더 친절하고, 말 속에 돋아나 있던 뼈와 가시가 덜했다.
“그럼 이제 말씀해 보시죠. 정확히 제가 무얼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추방자를 돕는 일이다.
어쩌면 추방자 마을 사람들.
이제는 이안의 흑요석 광산과 약초밭에서 지내는 그들한테도 좋은 소식을 들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생각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군.’
헤스티아에게 전해 들은 바.
이곳 슈페리어 차원의 추방자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암울한 상황까지 내몰려 있었다.
‘눈먼 아버지께 바칠 인신공양을 위한 대대적인 생포 작전이라…….’
무려 천 년.
인간에 불과한 이안이 느끼기에는 참으로 머나먼 그 세월에 한 번씩.
여러 지배자들은 시계탑 최상층에 군림하는 존재, ‘아버지’를 향하여 대대적인 공양을 올린다고 한다.
매번 온갖 종류의 제물과 아티펙트, 수천 년 묵은 영물과 신수 등을 바치는 슈페리어 최대의 행사라고 하는데, 이번에는 아버지란 작자께서 ‘인신공양’을 원하신단다.
그것도 무려 백만의 목숨을.
다시 말하는데, 백 명 아니고 만 명도 아니다. 백만이다. 백만!
‘천 년이란 세월도 그렇고, 백만이라는 숫자도 그렇고, 나로서는 하나같이 어질어질한 것들뿐이군. 좀 적응할 때도 되었는데…….’
돌아와서, 헤스티아의 아홉 번째 과업은 바로 그 백만 인신공양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었다.
시계탑 평의회의 합의 끝에, 백만의 인신공양은 전부 추방자의 목숨으로 충당하고자 결정되었으니까.
헤스티아는 그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대학살을 막고 싶었고, 이미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워둔 상태였다.
‘물론 추방자들을 살리는 것 말고는 대책이 전혀 없긴 하다마는.’
헤스티아의 계획을 들은 이안이 가장 먼저 건넨 질문은 그러했다.
그럼 어떻게 백만 명의 인신공양을 해낼 것이냐? 혹은 아예 인신공양 자체를 취소할 방법이 있느냐?
그 대답은 실로 간단했다.
대책이 없기도 했다.
[그 방법은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평의회에서 찾아낼 거예요.]
슈페리어 심장 안쪽에 사는 슈페리언들을 다 합쳐봐야 백만이 되지 않는다. 백만은커녕 절반도 어렵다.
그러니 추방자로 백만의 공양을 해내지 못한다면, 결국 평의회에서 인산공양 자체를 어떻게든 취소시킬 거라는 게 그녀의 계산이었다.
‘제대로 된 계산인지는…… 잘 모르겠군. 뭐…… 어떻게든 되겠지.’
고개를 휘휘 저은 이안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흑요석 광산과 약초밭이 있는 본인 소유의 토지였다.
아무래도 이 문제는 문제의 당사자 중 일부, 추방자 마을의 촌장부터 만나서 상의해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