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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254화 (254/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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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2부 68화

    [헌데, 바쁘신 수행자께서 이곳 개척지까지는 또 어쩐 일이신지?]

    “근처에서 과업을 수행하다가 잠깐 들렸습니다. 얼굴도 보고, 겸사겸사 예전 약속도 상기시켜드리려고요.”

    [무슨 약속?]

    “모르는 척하는 겁니까? 아니면 정말 잊어버리기라도 한 겁니까?”

    [모르는 척하는 거다.]

    “…….”

    [솔직히 좀 후회되거든.]

    “…….”

    [설마 네놈이 꾸역꾸역 살아남을 줄은, 심지어 과업을 여섯 차례나 완수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따위 약속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텐데……!]

    새삼 느끼는 건데, 이 사내는 언제 봐도 굉장히 솔직한 편이다.

    자기 자신의 행동을 포장하거나 정당화할 생각조차 없어 보인다.

    보통 이럴 때는 진즉 이럴 줄 알고 있었다느니, 자기가 평소에도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하다느니 하면서 생색내는 것이 대부분 아닌가? 한데 그런 모습을 일절 보여주지 않는다. 애당초 남들의 시선이나 평가에 관심이 없는 거다.

    ‘하긴, 내 정체를 아직까지 함구하고 있다는 것 자체로 이미…….’

    어느 정도 검증이 되었다는 뜻이겠지.

    이 우락부락한 존재의 단순하고도 묵직한 성품 말이다.

    만약 이쪽 세계에서 ‘진짜’ 아군을 얻어야 한다면, 하데스처럼 임시적인 동맹이 아닌 진정한 동료 또는 파트너가 필요하다면, 아마 첫 번째 섭외 대상이 아닐까 싶다.

    “……후회하시는 거 보면, 약속을 지킬 생각은 있으신가 보네요.”

    [그야 당연하지.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래도 과한 부탁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이제 곧 같은 일 하는 지배자 선후배가 될지도 모르는데, 계속 얼굴 보려면 서로 불편한 점이 없어야 하지 않겠어?]

    같은 일 하는 지배자 선후배 관계.

    그렇게 표현하니 새삼 별거 아닌 것 같네.

    피식 웃은 이안이 기꺼운 표정으로 화답했다.

    “동감입니다. 오래 봐야죠. 우리.”

    [해서, 정확히 어떤 과업을 수행중이지? 설마 펜리르 사냥인가? 그건 좀 곤란할 텐데. 왜냐하면 그 늑대, 내가 얼마 전에 운동 삼아 때려잡았거든. 꼴에 신수라 곧 되살아나긴 할 테지만, 아직 한참 남았을걸?]

    “사냥 임무는 아닙니다.”

    [그래? 흐음, 그럼 뭐지? 늑대의 땅에서 할 만한 과업이 사냥 말고는 딱히…….]

    “비밀입니다. 아직은.”

    [뭐, 그러든가.]

    헤라클레스가 자신의 태평양처럼 넓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꾸했다.

    딱히 더 물어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참 한결같은 캐릭터다.

    [아, 참고로 말해두는데, 과업을 도와줄 수는 없어. 제삼자가 개입되는 즉시 실패로 처리된다는 거, 벌써 일곱 번째 과업을 수행 중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겠지?]

    “도와달라고 할 생각 추호도 없습니다. 그게 당연하고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아무래도 당신의 신상정보가 이번 과업의 조건인 것 같거든.

    물론 그 뒷말까지는 굳이 내뱉을 필요가 없을 터.

    “그리고 저랑 약속하신 거, 그것도 당장 써먹을 생각은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써먹어야 잘 써먹었다고 소문이 날지 고민 중이라서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누가 걱정 따위를 한다고? 네놈이나 신중히 생각해라. 이런 영광스러운 기회, 흔치 않을 터이니.]

    방금은 후회한다며?

    뒤늦게 여유 부리는 모습이 참으로 헤라클레스답다.

    시계탑의 지배자란 것들 중에서는 그나마 호감이 가는 존재.

    그래서일까? 이안이 대뜸 아공간 주머니부터 열었다. 헤라클레스에게 무언가를 선물하기 위함이었다.

    “그건 그렇고, 혹시 헤라클레스 님께서도…….”

    “아까부터 거슬리던 참인데, 왜 갑자기 어울리지도 않는 존댓말이냐? 처음 만났을 때는 잘도 반말을 지껄이더니?”

    “……그땐 여차하면 적이었고, 지금은 같은 일 하는 선후배 관계 아닙니까?”

    “아직은 아니지.”

    “예비 선후배라고 칩시다.”

    “흐음, 듣고 보니 맞는 얘기군.”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헤라클레스에게 이안이 다시금 하고자 했던 말을 꺼냈다.

    물론 아공간 주머니에서 꺼낸 황금 사과를 보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시 여쭙겠습니다. 혹시 헤라클레스 님께서도 이 과일, 좋아하십니까?”

    [음? 설마 그거, 황금 사과냐?]

    순간 헤라클레스의 눈빛이 변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갈망과 욕구가 서려 있는 눈빛, 그리고 표정.

    역시 헤라클레스도 여러 지배자들처럼 황금 사과를, 그 사과가 주는 젊음의 묘미를 선호하는 걸까?

    [맞네. 치워라.]

    “……예? 치우라고요?”

    [향만 맡아도 황금사과주 생각이 절로 나는군. 좋지 않아.]

    “황금사과주……?”

    [겨우 끊은 술이다. 마시고 싶어지니 치워라. 그 잘난 주술로 사과 냄새도 좀 지워주고.]

    원하면 선물로 줄까 했다.

    이는 정말 순수한 호의였다.

    일전에 그냥 순순히 보내준 것도 고맙고, 여전히 비밀을 지켜주고 있는 의리도 고맙고.

    무엇보다 헤라클레스와는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할 생각이거든.

    “……싫으시다니 별수 없죠. 선물로 드릴까 했는데.”

    [그때 일 때문이라면 이럴 필요 없다. 딱히 네놈이 예뻐서 도와준 게 아니라 그냥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니. 아마 앞으로도 쭉 그럴 것 같고. 그쪽으로는 영 취미가 없거든.]

    그 나름대로 정중한 거절에 이안 역시 황금 사과를 거두었다.

    이만큼 했으면 서로의 생각은 충분히 전달되었겠지.

    이안은 그때 일에 여전히 깊은 감사함을 느끼고 있음을.

    헤라클레스는 여전히 그때 알게 된 비밀을 지켜줄 생각임을.

    “대신 다음에는 마음에 쏙 드실 만한 선물을 준비해 오겠습니다. 혹시 뭐 좋아하십니까?”

    [흐음, 정 무언가 들고 오려거든 숫돌이나 몇 개 챙겨오든지.]

    “숫돌이요?”

    [그래, 내 무기들 벼릴 때 쓸 숫돌, 그거 몇 개면 충분하다.]

    “알겠습니다. 다음번에는 좋은 숫돌 구해서 찾아뵙도록 하죠.”

    그리 읊조린 이안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이만 물러가겠다는 제스처였다.

    [정말 얼굴만 보러 왔나 보군.]

    “네, 일단은요.”

    [일단은?]

    “조만간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니 항상 긴장하고 계십시오.”

    [긴장 같은 소리 하네.]

    역시나 한결같은 반응.

    그나저나, 역시 믿음직한 존재다.

    이안 앞에서도 이안이 중간계인이라는 사실을, 혹은 누군가 들었을 때 이안의 정체를 추측할 만한 그 어떤 단서를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이쯤 되면 정말 약속에 살고 약속에 죽는 이가 아닐까 싶다.

    “그럼.”

    [멀리 안 나간다.]

    그들의 다소 갑작스러웠던 두 번째 만남은 거기까지였다.

    북부 개척지에서 빠져나온 이안이 한동안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헤라클레스의 감각으로도 감지되지 않을 만큼 멀찌감치 이동했다.

    어째서일까? 간단하다.

    숨어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을 누군가를 위한 배려였다.

    이쯤 멀어졌으면 마음 놓고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테니까.

    “보셨죠?”

    […….]

    역시나.

    그 중얼거림에 이안보다 곱절은 더 거대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우스와 헤라의 막내딸, 그리고 헤라클레스를 짝사랑하는 여인 헤베였다.

    “헤라클레스는 딱 한 번, 제 부탁이라면 무조건 들어줄 겁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말이죠.”

    [……너, 아니, 그분의 말이 맞는다면 그대는 분명 과업의 수행자 칼리두 와탕카겠지.]

    헤라클레스는 분명 요상한 이름만 입에 담았거늘, 정확한 이름까지 알고 있다.

    시계탑의 지배자들 사이에서 많이 유명해지기는 유명해졌나 보다.

    [수행자. 갑자기 나타나서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뭔가?]

    “딱히 없습니다.”

    [……뭐? 없다고?]

    “애당초 저는 그쪽한테 용건이 없어요. 아까 보셨으니 알겠지만 저는 그저 헤라클레스 님을 뵈러 갔던 건데, 하필 거기 그쪽이 있으셨죠.”

    [그렇다고 하기에는 쥐새끼처럼 숨어서 나를…….]

    “과업을 수행하는 와중에 잠시 얼굴 보러 갔다는 말, 기억나시죠?”

    […….]

    “모습을 숨긴 건 순전히 과업 탓입니다. 그쪽을 훔쳐보려던 게 아니라요.”

    […….]

    “그러니 모든 건 오해로부터 비롯된 일입니다.”

    [하, 하지만 그대는 내가 헤라클레스 님을…….]

    “좋아하시죠. 몰래 훔쳐보는 뒷모습만 봐도 딱 알겠던데요?”

    [……!]

    반응 한번 제대로 온다.

    시퍼런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들썩거리는 것이 꽤 부끄러운 모양이리라.

    “저는 그 사실을 간파했고, 다짜고짜 죽이려 드시기에 임기응변했을 뿐입니다. 헤라클레스 님과 저 사이의 약속을 미끼로 썼고요.”

    [사, 사실대로 말했으면……!]

    “그럴 겨를이나 주셨습니까?”

    […….]

    결국 헤베가 입을 꾹 다물었다.

    확실히, 말만 대답하라 소리쳤을 뿐 곧바로 퍼부어대기는 했다.

    주먹과 발길질, 그 옛날 오빠 아레스한테서 배운 격투술을.

    [……그래, 돌이켜보니 그랬던 것 같구나. 그 부분은 사과하지.]

    생각보다 고분고분하다.

    어미조차 성격이 더럽다고 평할 만큼 호전적인 여인치고는 많이 굽혔다.

    아무래도 이안이 쥐고 있는 헤라클레스와의 약속권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리라.

    [허면 모쪼록 잘 부탁하마.]

    “예? 무얼 말씀이십니까?”

    [아까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그분께서 나에게 마음을 열게끔 해줄 수 있노라고. 그 말대로 해달라는 것이다. 가능하면 지금 당장. 그렇게만 해준다면 내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도록 하겠다.]

    아하, 그래서 고분고분해졌구나?

    물론 이안은 헤베의 바람을 들어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과업의 완수 조건은 이미 충족시켰거든.

    ‘고작 이런 일로 헤라클레스 1회 이용권을 소모할 순 없지.’

    이안과 더불어 역대 최고의 수행자 출신으로 평가받는 지배자를 딱 한 번,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강력한 이용권이다.

    그런 찬스를 허투루 쓸 순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죄송하지만,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뭐? 어렵다?]

    “사랑은 스스로 쟁취하셔야죠. 제가 강제로 맺어준다 한들 그 마음이 어디 진심이겠습니까?”

    […….]

    “전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불행해지겠죠. 두 분 모두, 그러니 그 부탁은 거절해야겠네요.”

    이만하면 알아들었겠지.

    틀린 말 하나 없지 않나?

    [……그렇다면.]

    그러나 헤베의 생각은 이안과 비슷하면서도 많이 달랐다.

    먼저 그 논리는 이해한다. 강제로 맺어봐야 좋을 거 없다는 논리.

    하지만 그 이해가 이안을 순순히 보내준다는 뜻으로 직결되지는 않는가 보다.

    [네 입부터 막아야겠다.]

    “전 딱히 어디 가서 말할 생각이…….”

    [그 생각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어떻게 아느냐?]

    “…….”

    솔직히 할 말은 없다.

    당장 헤라한테 달려가서 말할 예정이잖아?

    [그러니…….]

    그녀가 허리춤에서 채찍을 꺼냈다.

    레르니안 히드라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강력한 채찍이었다.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죽어줘야겠어. 수행자.]

    이거야 원.

    성질이 더러운 걸 떠나서, 이건 그냥 이기적이잖아?

    이따위니 좋아하는 티 팍팍 내도 헤라클레스가 이 악물고 외면하지.

    “……하아.”

    모처럼 쉽게 풀리나 했더니만.

    어째 매번 이런다.

    쉬워 보여도 쉽지가 않다.

    이번에는 무려 중급 지배자가 진심을 다해서 덤벼든단다.

    과거 상대했던 슈페리어의 분석관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일 터.

    ‘별수 없지.’

    싸울 수밖에.

    마침 궁금하던 참이기는 했다.

    최하급 지배자였던 분석관을 쓰러뜨렸던 당시의 이안 페이지.

    그리고 총 여섯 번의 과업을 완수한 작금의 이안 페이지.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지배자를 상대로 말이야.’

    이안이 손에 쥔 지팡이 케리케이온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더불어 이 모든 상황을 흥미롭게 관망 중인 크로미한테 말했다.

    “좀 도와주십시오. 싸워야겠으니.”

    (이길 수는 있고?)

    “해봐야죠.”

    (그냥 도망치는 게 어떠하냐?)

    “설마 제가 목숨까지 걸겠습니까? 필요하면 당연히 도망칠 겁니다.”

    (암, 당연히 그래야지. 내 보기에 저건 절대 못 이겨. 강한 것도 강한 건데, 눈깔이 뒤집혔거든.)

    만족한 듯 읊조린 네크로노미콘이 곧장 이안의 부탁을 들어줬다.

    마도서로부터 시꺼먼 안개가 뿜어져 나와 이안의 전신을 휘감았으니, 레르니안 히드라와 명계의 검투사 미첼 그린리버를 상대할 적 나타났던 ‘검은 이안’이 다시금 만천하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라?)

    “왜 그러십니까?”

    (일치율이 왜 이리 높아졌지?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치율?

    그게 무슨 뜻이지?

    (……아, 별거 아니니라. 내 일이니 너는 저 눈깔 뒤집힌 여자나 상대하도록.)

    크로미의 말이 옳다.

    지금은 다른 생각할 때가 아니다.

    당장 눈앞에 저 커다란 여인, 크로미의 표현을 빌리자면 ‘눈깔 뒤집힌 여자’ 헤베가 휘두르는 채찍부터 피해야 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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