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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2부 65화
[필멸자여, 힘을 원하는가?]
어둠 속에서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도 그럴 게 여성의 것도 남성의 것도 아닌 독특한 목소리였으니까.
[다시 묻겠다. 힘을…….]
“원하오.”
[…….]
“아주 많이.”
[…….]
힘.
지금보다 더 강한 힘.
원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원한다.
[욕망에 충실한 필멸자로군.]
올리버의 대꾸에 정체를 가늠키 어려운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고작해야 환청이면서 굉장히 실감 났다.
[그 욕망을 들어주마. 그토록 바라는 힘을 주겠단 뜻이다. 힘이 담길 그릇만 증명해 낸다면 말이지.]
“그전에.”
올리버가 신원미상 목소리의 말문을 끊어버렸다. 동시에 허리춤 칼자루를 뽑아 들며 낮게 읊조렸다.
“그대는 누구요?”
생각해 보면 웃기는 일이다.
무작정 나타나서 힘을 주겠단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도, 어떤 힘을 준다는 건지도 모르는데, 그걸 덥석 챙길 이가 얼마나 될까?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오.”
[절박하지 않은 게로군.]
“신중한 거요.”
[글쎄, 과연 그럴까?]
이윽고 어둠만이 가득한 공간에 어떤 형태가 나타났다. 그것은 눈이었다. 크고 섬뜩한 붉은 눈알.
그것이 올리버를 응시했다.
[내기하지.]
“갑자기 무슨……?”
[네놈이 살려달라며, 힘을 달라며 울며불며 애원한다, 혹은 하지 않는다. 제한 시간은 한 시간.]
다짜고짜 나타나서 힘을 준다더니, 이제는 또 다짜고짜 내기라니.
참으로 제멋대로인 존재다.
“내기를 거절한다면?”
[그 즉시 네놈은 죽는다.]
“…….”
[내 여흥을 방해한 대가로.]
“…….”
[네놈 세계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다. 죽어도 그 운명에 대항하다가 죽어야지, 고작 내기 따위를 거절하고 죽을 순 없지 않겠느냐?]
쉽게 말해, 선택권이 없다.
놈의 말을 그저 허언으로 치부하기에는 저 붉은 눈에서 느껴지는 힘이 너무나도 거대했다. 원한다면 올리버 자신쯤이야 언제든 죽일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 말이다.
“…….”
올리버가 두 눈을 감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이나, 어차피 모든 일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당장 이 세계가 처한 위기 역시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온 불행 아닌가?
“……내기를 받아들이지.”
[옳은 판단이다. 필멸자여.]
내기를 받아들이는 순간.
사방으로부터 기척이 느껴졌다.
지축을 뒤흔드는 거인의 기척.
심지어 한두 마리가 아니다.
수십 단위야 가볍게 뛰어넘은 것 같고, 분명 그 이상인데, 좀처럼 가늠이 되지를 않는다.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내기의 내용은 간단하다.]
어느새 하늘 높은 곳으로 올라간 붉은 눈이 말했다. 나아가 모든 것을 감추고 있던 어둠이 걷어졌으니, 그곳에는 올리버가 예상했던 것처럼 수없이 많은 거인들이 올리버를 향해서 진군하고 있었다.
[살아남아라. 죽지 않고, 살려 달라, 힘을 달라 애원하지 않고 끝까지 버틴다면 네놈의 승리다.]
크기, 생김새, 하다못해 걸음걸이마저 제각각인 수천 마리 거인이 군침을 질질 흘리며 다가오고 있었으니, 올리버에게는 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싸움을 시작할 뿐.
우우우우우웅……!
기사의 검에 마나가 깃들었다.
인류 최초의 소드 마스터 올리버 레이우드가 탄생시킨 결전비기.
오러 블레이드(Aura blade)였다.
* * *
“스승님!”
“…….”
“스승님, 스승님……!”
“…….”
“정신이 좀 드셔요? 스승님……!”
“……아직 귀 멀쩡하다.”
“흐아앙……!”
와락 안기는 조그마한 꼬마 숙녀.
요하나의 눈물에 정신을 차린 올리버가 당황한 듯 굳어버렸다.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는 녀석이건만,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쓰러져 있었으면 이러는 걸까?
“제가 진짜 얼마나 걱정한 줄 아세요? 이러다 잘못되시는 줄 알았다고요! 다른 사람들 다 깨어나는데 혼자서만 벌써 한 달째……!”
“……잠깐, 요하나, 그게 무슨 뜻이지? 다른 사람들이 다 깨어나?”
그러고 보니 낯선 천장이다.
주위 풍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단 수련장 숙소는 절대 아니다.
“말도 마셔요. 쓰러진 스승님 들쳐 업고 산에서 내려왔을 때…….”
“들쳐 업어? 네가 나를?”
“……마법으로 들고 산에서 내려왔을 때는 이미 온 세상이 아수라장이었어요. 스승님처럼 각혈하면서 쓰러진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거든요. 그것도 거의 동시에요.”
올리버만 겪은 현상이 아니다.
제국이 파악한바 대륙인 중 약 10퍼센트에 해당하는 인류가 똑같은 현상을 겪었으니, 세계는 그야말로 대공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근데 폐하께서는 이미 예상하고 계신 것 같더라고요. 국가적인 대처가 엄청 빠르고 정확한데, 아마 우리 아버지께서 언질을 주신 거 아닐까 싶어요. 그게 아니고서는 솔직히 단기간에 이만한 체계를 갖추는 거…… 불가능하거든요.”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게, 올리버는 그저 싸우고 왔을 뿐이다. 검 한 자루로 수천 마리의 거인을 베었고, 내기에서 승리하자마자 눈이 떠졌다.
이러니 감을 못 잡을 수밖에.
“아직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죠?”
“……솔직히 그렇구나. 나는 그저 꿈을 꿨을 뿐이거든. 내 생애 가장 치열했던, 악몽에 가까운 꿈을.”
“맞아요. 다들 그 꿈이란 걸 꿨다 하더라고요. 문제는 다 하루아침에 깨어나는데 유독 스승님만 한 달이 넘게 쓰러져 계셔서…… 솔직히 엄청 걱정했어요. 저도, 폐하께서도, 다른 기사분들도 그렇고요.”
남들은 하루아침에 깨어났다.
근데 유독 올리버만 오래 걸렸다.
어째서인지 알 것 같다. 아마도 그 내기에서 끝까지 버텨낸 이가 올리버 자신밖에 없다는 뜻이겠지.
“아무튼, 이해가 되지 않으셔도 조금만 참으세요. 어차피 다 알게 되실 거니까. 제가 말씀드린 체계가 무얼 뜻하는지, 스승님께서 겪으신 현상이 무엇인지, 전부 다요.”
요하나의 말 그대로였다.
곧 올리버가 누워 있던 막사 안으로 웬 하급관료 한 명이 들어왔다.
그는 이제 막 관직 시험에 붙고 첫 근무지를 배정받은 초짜의 복색이었는데,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첫째로 배정받은 근무지다. 사상 초유의 사태를 관리하는 신생기관, 임시로 지어진 이름 ‘각성자 관리청’으로 배정받은 것부터 미칠 지경인데, 하물며 눈앞에 저 특별한 각성자의 관리감독을 전적으로 맡으란다.
“가, 각성자 오, 올리버 레이우드 경…… 보, 본인 성함이 맞습니까?”
무려 그 올리버 레이우드다.
황제의 호위기사, 대륙 제일의 검, 소드 마스터, 드래곤 슬레이어, 검공 올리버 레이우드 말이다.
“그렇소만.”
“그, 그, 그것이…… 저…….”
대마법사 이안 페이지와 함께 수많은 위기로부터 제국과 세계를 지킨 영웅, 검공 올리버 레이우드.
사실관계야 어찌 되었든 세상 사람들에게 올리버는 영웅 그 자체였다. 특히 과거 죽은 자들과의 전쟁에서 혈혈단신으로 본 드래곤을 물리친 활약은 책과 연극으로 수없이 되풀이될 만큼 전설적인 영웅담이었으니, 신입 관료의 눈에 올리버 레이우드란 살아 있는 전설이요, 신화 그 자체나 마찬가지였다.
“편히 하시오. 그대는 황명을 받잡은 관료가 아니시오? 상대가 누구든 당당히 호령하시오. 그럴 만한 권한은 충분히 갖고 있으시니.”
올리버의 충고에 힘을 입었을까?
덜덜 떨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신입 관료가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가, 각성자 올리버 레이우드는 들으십시오. 경께서는 범 대륙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괴현상의 증상자로, 지금 이 순간부터 제국이 그대를 특별 관리할 것입니다.”
범 대륙적으로 유행하는 괴현상.
임시로 명명하길 ‘각성’의 증상자.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경께서 어떠한 힘을 각성하였는지, 어떤 연유로 한 달이 넘는 시간을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는지, 기타 몇 가지 사안들을 면밀히 검사할 예정이니, 여기 비치해놓은 의복으로 환복한 뒤 바깥으로 나와 주십시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힘을 각성한다?
그러고 보니 그 어둠 속 붉은 눈도 분명 힘을 원하느냐 물었잖아?
이제야 대충 알 것 같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소. 내 금방 환복하고 나갈 터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아, 예. 그, 그럼……!”
극도의 긴장감이 풀려서일까?
휘청거리며 나가는 신입 관료를 뒤로한 채 요하나가 냉큼 말했다.
“대충 아시겠지요?”
“글쎄, 가 봐야 알겠지.”
“그럼 이제 황제 폐하께서 따로 남겨두신 전언을 말씀드릴게요.”
“……폐하께서?”
그러고 보니 참 오래되었다.
폐관수련에 나선 이후 단 한 번도 뵌 적이 없다. 폐하를 말이다.
평소 같았으면 가장 먼저 달려오셨을 텐데, 설마 폐하의 신변에도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겠지?
“우선 황제 폐하께서는 일이 너무 많아지셨을 뿐, 멀쩡하셔요. 그러니 걱정하실 필요 전혀 없답니다.”
“휴우…….”
“……라고 먼저 전해달라 하셨어요. 황제 폐하께서요. 아마 눈뜨자마자 폐하 걱정부터 하실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눈뜨자마자는 아니어도 거의 비슷하긴 하네요.”
……이런.
눈뜨자마자 폐하 걱정부터 했어야 했거늘, 실수다. 명백한 실수.
“……폐하께는 비밀이다.”
“에이, 사실상 눈뜨자마자 걱정하신 거죠. 제가 보기엔 그런 걸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말하는 요하나의 목소리에서 폐관수련 동기로서의 끈끈한 동료애가 느껴졌다.
“……고맙구나.”
“뭘요. 아무튼, 계속 전달해드리자면, 이번 사태는 정말 초유의 사태이니만큼 따로 특별대우를 해드릴 수 없다는 점, 누구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점, 부디 이해해 달라고 하셨어요. 미안하단 말씀도 남기셨고요.”
“그야 당연한 일이지. 특혜 따위나 바라며 폐하 곁을 지킨 적, 단언컨대 한순간도 없었으니까.”
남들과 똑같은 절차란 바로 지금 이런 상황을 뜻하는 말이겠지.
환복 후 신입 관료의 뒤를 따라가서 겪게 될 모든 절차 말이다.
“좋아요. 폐하께서 남기신 전언은 여기까지고, 이제 환복하고 나가보세요. 제가 설명하는 것보다야 직접 겪어보시는 편이 빠르잖아요?”
고개를 끄덕인 올리버가 서둘러 옷부터 갈아입었다. 각종 검사를 받기 용이해 보이는 의복이었다.
“관료 양반.”
“아, 나오셨군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자세한 건 특별 검사장으로 이동하면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신입 관료의 뒤를 따라 도착한 특별 검사장에는 올리버 말고도 수많은 이들이 검사를 받거나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 풍경이 사뭇 낯설지 않았다. 분명 어디선가에서 본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걸 어디서 봤더라?
‘……아, 마나반응검사.’
아주 어릴 적.
올리버도 마나반응검사를 받아봤다. 때문에 그날의 기억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때 검사를 받기 위하여 줄 선 아이들과 자신이 꼭 지금의 자신과 사람들 같지 않나?
“오면서 말씀드린 것처럼 경께서는 새로운 능력을 각성하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단한 신체검사와 더불어 각성자들이 어떤 능력을 각성했는지 판별하는 검사가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아, 마침 마지막 판정을 기다리고 있네요. 저기, 저쪽을 보시면…….”
신입 관료가 가리킨 곳에는 이제 막 모든 검사를 끝낸 뒤 마지막 결과를 기다리는 각성자가 보였다.
그리고 얼마 후, 최종 판정을 담당하는 상급 관료가 수정구에 담긴 검사 결과를 살펴보는가 싶더니, 이윽고 마지막 판정을 내렸다.
“각성자 라이언 마닝거, 당신의 심장과 머릿속에서 각각 존재하지 않았던 마나 하트와 마나 브레인이 발견되었습니다. 후천적인 마법 관련 능력을 각성한 것으로 추측되오니, 지금 즉시 정밀 검사장으로 이동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