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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2부 62화
“그건.”
차민성의 희열에 긍정적인 답변을 내어주고 싶었다. 저 넘치는 의욕과 기세를 몰아가도록 말이다.
하지만.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이건 현실이다.
모든 것을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
차민성은 가능성을 보였을 뿐.
아직 슈페리어로 넘어가기 직전의 이안보다도 약한 존재였으니까.
“그 기억 속에는 넣지 않았습니다만, 사실 저한테는 믿는 구석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마음 편히 도전할 수 있는 것이고요.”
“믿는 구석…… 그게 뭐죠?”
“여분의 목숨이 있거든요.”
“여분의…… 목숨?”
“저한테는 그 여분의 목숨만큼 다시 도전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더 과감하게, 몸 사리지 않고 부딪칠 수 있죠. 하지만 그쪽은 다릅니다. 매 순간순간이 마지막 기회일 겁니다. 그러니 저처럼 할 수 있다? 그건 장담하기 어렵겠죠.”
“…….”
이안의 말이 옳다.
여분의 목숨이 있다는 것.
실로 엄청난 이점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굳이 저와 같은 길을 걷고자 한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위험하다는 거, 목숨 하나로는 부족할 확률이 높다는 거, 이 두 가지는 알고 계십쇼.”
그 당부에 차민성이 피식 웃었다.
“애초에 저만 따로 불러서 부추겨놓고 이제 와서 아닌 척하면 뭐 달라져요? 그런 거 아니잖아요.”
따로 불러서 이와 관련된 기억을 보여준다, 이게 자신처럼 해보라고 부추긴 것이 아니면 무엇일까?
“그러니까 우리 그냥 솔직해집시다. 바라는 게 뭔지, 단순한 부추김 말고 뭔가 더 있다면 그것도 설명해 주시고요. 그게 편합니다.”
이안 역시 인정하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래서 무얼 하려거든 눈치 빠른 사람과 하는 편이 좋다.
“부추긴 거 맞습니다.”
이안이 말했다.
상대가 솔직해지길 바란다.
이안은 그 분야의 전문가다.
“당신이 쓸 만해 보였거든요.”
“겨우 그 정도입니까?”
“네, 아직은.”
차민성은 알까?
이조차 극찬이란 사실을.
“물론 선택은 차민성 씨 몫입니다.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아요.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으실 확률이 절반이라고 보고, 절 따라 해봐야 시작 단계에서 죽을 확률이 5할이라고 봅니다.”
“……잠깐, 그럼 제가 뭔가 해낼 확률은 아예 0이란 뜻이잖아요?”
“그렇죠.”
“1도 아니고?”
“네, 그렇습니다.”
“하?”
이안의 단호하기 그지없는 대꾸에 차민성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럼 왜 부추기는 건데요? 그냥 가서 죽으란 뜻밖에 더 됩니까?”
“그 이상 해내면 기적입니다. 기적이 일어날 확률은 대개 제로죠.”
“…….”
“어쩌면 그 기적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사람, 제가 말씀드린 쓸 만해 보인다의 기준입니다. 이쪽 세계에는 차민성 씨 한 분밖에 없고요.”
확률이 제로에 가까운.
아니, 제로나 마찬가지인 기적.
이안의 기준은 굉장히 엄격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또 제가 할 말이 없네요. 기적이라, 음, 확실히 저희 쪽에서는 제가 그 단어에 가장 가깝긴 하죠. 그러니 마지막 희망 취급을 받고 있는 거고.”
인류의 마지막 희망, 차민성.
돌이켜보면 그는 언제나 기적이란 단어와 한 몸처럼 묶여왔다.
설마 그게 복선이었나?
“하기야, 당신마저 벌레 잡듯 죽일 수 있는 족속들이라는데, 그런 괴물들 상대로 내 고향 지키려면…… 확실히 필요하네요. 기적.”
차민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기적을 운운하는지 백 퍼센트 이해했다. 이건 정말 기적의 힘이 아니고서는 까마득한 일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선택은 차민성 씨 자유입니다. 당장 큰 도움이 될 거란 기대도 없고요. 대신, 저와 같은 길을 걷겠다고 하시면 몇 가지 정보는 드릴 수 있습니다.”
“더 생각할 게 뭐 있습니까? 당장 해야죠. 가만히 앉아서 결과 기다리는 건 제 취향이 아니거든요.”
역시는 역시다.
지난 보름간 파악한 차민성이라면 당연히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대신 준비할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제가 요즘 한 단계 위로 올라가기 직전이라서, 어지간하면 이번 수련만 끝내고 싶은데…….”
“넉넉하게 드리죠. 어차피 저도 한 번은 다녀와야 하니까요.”
“좋네요. 모쪼록 좋은 소식 부탁드립니다. 말씀하신 그 세 번째 방법이 통해야 시간도 벌고, 저도 뭔가 시작할 여유가 생길 테니까.”
차민성이 악수를 권했다.
이안 역시 그 손을 잡았다.
이안의 고향과 차민성의 고향.
보기 드물게 양쪽 세계에서 모두 통용되는 인사법 아니겠는가?
“그럼 나중에 봅시다.”
보름간의 특별한 경험.
특별한 정보, 특별한 인연.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은 이안이 슈페리어 차원으로 돌아갔다.
지금부터가 정말 중요하리라.
* * *
“……그래서, 그때 같이 왔던 그 외계인은 무사히 돌려보냈습니까?”
“어? 약사님께서 그걸 어찌…….”
“딱 봐도 알겠던데요?”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럼 우연히 들었나 봅니다.”
“글쎄요. 그럴 리도…… 제가 극비사항을 여기저기 흘리고 다닐 만큼 입이 싼 놈은 아닐 텐데…….”
이안을 떠나보낸 차민성이 방문한 곳은 서울 바깥에 위치한 약국.
평소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하거나 어떤 정신적인 휴식이 필요할 때마다 찾아가는 특별한 장소였다.
아니, 장소가 특별하기보다는, 그곳 약사가 특별한 게 아닐까 싶다.
“그럼 그냥 감이 좋았나 봅니다.”
“……예?”
“가끔 그래요. 어렸을 때 UFO도 자주 봤고, 귀신도 꽤 봤습니다.”
“그거랑은 딱히 연관이…….”
“그냥 그런 걸로 하고 넘어가죠.”
“…….”
차민성이 추측하기로, 그리고 거의 확신하기로, 이 약사는 여러 헌터들처럼 각성자가 분명했다.
특별한 능력을 지닌 무기나 방어구, 소모품 따위를 제작할 수 있는 ‘장인’ 계열의 각성자 말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 약사가 내어주는 물약들을 설명할 길이 없다.
“아무튼, 수련은 잘 되십니까?”
“아, 네. 이게 다 약사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이죠. 특히 그 황금색 물약은 정말이지 어마어마했…….”
“도와드린 적 없습니다만.”
“……아, 참! 그렇죠. 어련히 모르는 척해드려야지요. 제가 이 약국 하루 이틀 오는 것도 아니고, 이제 그 정도 눈치는 챙겨뒀습니다.”
“있으면 쓰세요.”
“네……?”
“눈치요. 안 쓰고 있잖아요?”
“아, 듣고 보니 그러네요? 하하.”
차민성이 어린 아이처럼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약사가 건네준 여러 물약들을 들이켰다. 시제품조차 아닌 정체불명의 약물이었으나, 민성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약사가 주는 물약을 꼬박꼬박 받아마셨다.
“근데 참 놀라운 일 아닙니까?”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과묵한 사람도 말하게 만드는 분위기, 그게 이 약국의 매력이다.
물론 차민성이 과묵한 타입은 아니지만, 스스로는 그렇게 여겼다.
“이 다른 세계라는 게, 사실 균열학 박사들끼리도 있다, 없다로 논란이 많았던 사안이었잖아요?”
“그랬죠.”
“거기서 또 세부적으로 파고들면 그 세계가 과연 우리처럼 지성체가 지배하는 세상인가, 아니면 균열에서 쏟아져 나오는 괴수들로 가득한 세상인가, 그런 식으로도 나뉘고, 아무튼 논란이 많았죠.”
차민성의 말에 약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창밖으로 보이는 간판에 ‘말벗 약국’이라고 적혀 있는 것처럼, 그곳 약사는 매우 좋은 리스너인 것 같았다.
“근데 이제 그 논란이 종결된 거 아닙니까? 우리 같은 지성체들, 아니, 우리 같은 지성체 수준이 아니죠. 우리를 아예 압도하는…….”
그래서였다.
그 특유의 분위기.
약국 이름에 걸맞은 리스너.
그 두 가지 앞에서 차민성은 처음 자부했던 ‘극비사항 흘리고 다닐 놈은 아니다’라는 말이 틀렸음을 제 입으로 증명하고 말았다.
“……약사님.”
“네, 말씀하세요.”
“제가 어지간하면 남 탓 잘 안 하는 스타일인 거, 알고 계시죠?”
“모르는데, 그런 걸로 하죠.”
“그래도 이건 다 약사님 탓입니다. 괜히 외계인이라고 하니까 약사님도 관계처럼 느껴져서…….”
“못 들은 걸로 해드리겠습니다.”
“……정말이요?”
“제가 어디 가서 손님들이 한 말 흘리고 다닐 놈은 아니니까요.”
완벽한 인용.
약사가 뒤쪽 냉장고에서 물약 몇 병을 꺼내 차민성에게 건네줬다.
“가져가십쇼. 차민성 씨 오면 드리려고 준비해 둔 것들입니다.”
“아이고, 뭐 이런 걸 다. 전 그냥 지나가는 길에 얼굴이나 보러…….”
“아닌 거 압니다.”
“진짜 아닌데…….”
“그럼 말고.”
“아뇨, 아뇨! 성의는 받아야지요.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약사님.”
냉큼 약부터 챙긴 차민성.
그가 약사를 빤히 쳐다봤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표정이다.
“저기, 그건 그렇고, 약사님.”
“듣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여쭈고 싶었던 건데.”
“뭔지는 몰라도 매번 참은 거면 계속 참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럴까도 싶었는데, 이젠 도저히 궁금해서 못 참겠습니다.”
“못 참겠으면 풀어야죠. 말씀해보십쇼. 가능한 대답해드릴 테니.”
“연세가 정확히 몇이십니까?”
“……네?”
“아무리 봐도 30대이신데, 여기서 약국 운영하신 경력으로만 따지면 최소 50대라는 계산이 나와서요.”
“…….”
“혹시 약사님이야말로 외계인 아니십니까? 그게 아니고서야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동안인데?”
“…….”
“평소에 뭐 드십니까? 저도 이제 슬슬 관리가 필요한 나이라서요.”
그래, 바로 이런 이야기.
별 얘기가 다 나오게 만드는 특유의 분위기 속에서 몇 마디 더 나눈 차민성이 약국을 빠져나왔다.
균열 너머의 존재를 태우고 여기저기 다녔던 승용차와 함께 어디론가 향했는데, 약사가 듣기로는 폐관 수련에 나서는 모양새였다.
“……다른 세계라.”
그리고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약사 역시 생각에 잠겼다.
아주 깊은 생각이었다.
* * *
‘지켜보고 있는 거 압니다. 잠깐 저 좀 보시죠. 상의할 게 있으니.’
비프로스트를 통해 슈페리어 차원으로 돌아온 이안의 첫 번째 행선지는 올림포스 신전이 아니었다.
그들보다 먼저 만나고 싶은 이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하데스였다.
[당돌하군. 내 여전히 마음만 먹으면 네놈을 벌레 잡듯…….]
‘죽일 수 있죠. 아니까 더 당당하게 요구하는 겁니다. 어차피 변덕 한 번이면 죽을 텐데, 그쪽 기분 좋아 보일 때 뭐라도 계속 해야죠.’
[…….]
시꺼먼 그림자의 형태로 나타난 하데스가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아무래도 이놈, 단순히 믿는 구석이 있어서 당돌한 건 아닌 것 같다. 그냥 천성이 이런 놈 아닐까?
[……네 말이 옳다. 내 아직은 기분이 좋으니 웃어넘겨 주도록 하지. 그래, 날 부른 연유가 뭐지?]
‘뭐 하나만 여쭤볼까 해서요.’
[무엇을?]
‘혹시 네 번째 중간계 어나더 어스를 아십니까?’
[알다마다. 아폴론, 그 겉과 속이 다른 음흉한 놈이 제 전용 장난감처럼 갖고 놀던 중간계 아닌가?]
겉과 속이 다른 음흉한 놈.
글쎄, 아직 그건 모르겠다만.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럼 혹시 그 네 번째 중간계에서 나타나고 있는 각성이란 현상에 관한 것도 알고 계시는지요?’
[물론이다. 명계로 떨어지는 네 번째 중간계의 망자들 중에도 꽤 많은 이들이 겪었다더군. 우리 명계로서는 좋은 일이지. 양질의 하수인이 들어오는 격이니까.]
‘흐음, 그렇군요.’
하데스의 반응은 평범했다.
그러나 이안의 반응은 달랐다.
가늘게 뜬 눈이 증거였다.
‘그 말씀은 결국 네 번째 중간계에 발생한 각성 현상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보는 쪽이 명계, 그러니까 하데스 님이라는 뜻이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