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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2부 59화
각성.
위기와 함께 나타난 축복.
네 번째 중간계 어나더 어스를 여태껏 살아남게 만들어준 힘.
이안은 그 현상에 주목했다.
‘만약 이 힘을 우리 세계에 적용할 수 있다면, 해서 제국군 한 명 한 명을 각성자로 만들면…….’
대 슈페리어 침략 계획, 그 과정 및 결과에 크나큰 도움이 될 터.
“정말 그 두 가지면 되겠습니까?”
“일단은 그렇습니다. 추후 원하는 게 더 생기면 말씀드리죠.”
“으음…….”
협회장이 팔짱을 꼈다.
사실 고민할 거리도 없다.
살아남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문제는 이 괴물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느냐는 점, 그리고 왜 이런 걸 요구하느냐는 점인데.’
뭔가 이상하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심부름꾼은 아닌 것 같았다. 마치 따로 무언가를 준비하는 사람처럼 보이잖아?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제 상관을 속일 필요가 없겠지. 이 괴물, 분명 제 상관한테도 말하지 못할 만큼 은밀한 꿍꿍이가 있는 거다.’
물론 따져 물을 생각은 없었다.
놈은 자신의 은밀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하여, 우리는 당장의 생존권을 위하여 잠시 동행할 뿐이니까.
“좋습니다. 자료를 준비해 드리지요. 워낙 방대한 자료이니만큼 관계 부처와 협력이 필요한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미리 양해의 말씀을 구하겠습니다. 시간이 제법 걸릴 거라서…….”
“얼마나 걸립니까?”
“빨라도 3일은 주셔야…….”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생각보다 빠르네요.”
진심이다.
자료를 정리하고 넘기는 데 고작 3일이라니.
1티어에 오른 문명이라서 그럴까? 역시 빠르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군요. 허면 자료의 형식은 어떻게…….”
“형식?”
“PC 파일로 넘겨 드리면 되는지…….”
“피씨가 뭡니까?”
“…….”
이상한 일이었다.
높아진 격의 영향으로 저들의 말은 모두 번역되어 들려온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저 피씨라는 단어만큼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뭘까? 피씨?
“혹시 컴퓨터라고 들어보셨는지…….”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그러시군요. 허면…….”
잠시 고민에 빠졌던 협회장 웨인 베르너가 물었다.
“……서면으로 준비해 드리면 될까요?”
“네, 종이로 부탁합니다.”
“그 양이…… 실물 자료라서 무게나 부피가 상당할 텐데요.”
“괜찮습니다. 방법이 있으니까요.”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다만 이게 아무래도 실물 자료는 시간이 좀 더 걸릴 수밖에 없어서…….”
“얼마나 더 기다리면 될까요?”
“아무리 최소한으로 잡아도 일주일은 더 주셔야…….”
“며칠 더 얹어서 보름 드리겠습니다. 그 정도면 가능하겠습니까?”
“아, 물론입니다. 보름이면 충분하죠. 바로 착수하도록 하지요.”
고개를 숙인 협회장 웨인 베르너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손바닥 크기의 직사각형 도구였는데, 그 도구를 통해서 이런저런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미루어보건대 고향 땅의 ‘통신구’와 비슷한 마도공학품인 것 같았다.
“지금 당장 긴급회의 소집하겠습니다. 각 부처 책임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C9에 소속된 각국 통수권자들 역시 참석하십시오. 갑자기 무슨 일이긴? 우리 쪽에 측정불가 균열 발생했던 거 다 알 거 아닙니까? 그와 관련된 일이니 군소리 말고 소집해요! 아니면 다 같이 죽든가! 내 말 알아듣겠습니까?”
C9는 ‘카타클리즘 나인Cataclysm Nine’의 약자로, 처음 균열과 각성자가 발생한 대격변 이후 새롭게 강대국이 된 아홉 국가를 뜻한다.
‘……이런 것도 다 자동으로 해석이 되는데, 도대체 그 피씨라는 건 뭔데 알아먹을 수가 없는 거야?’
나중에 한번 알아봐야겠다.
그리 결심한 이안이 차민성을 바라봤다. 여러모로 복잡한 표정이다.
“차민성 씨.”
“아, 네. 칼리두 님.”
“보름간 지낼 곳이 필요한데, 어디 지내기 적당한 숙소 없습니까?”
“바로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바깥 구경을 좀 해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아, 그게, 그건 조금…….”
“사고 안 치겠습니다.”
“그…… 칼리두 님께서 문제를 일으킨다는 뜻이 아니라…….”
“그럼 가이드라도 해주시죠.”
“……네?”
“옆에서 감시하시라는 겁니다. 그럼 마음이 놓이실 것 아닙니까?”
“아…….”
이안의 말에 잠시 고민했던 차민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 균열 너머의 존재에 대한 감시를 명받은 몸, 이 정도 권한은 있다.
“……좋습니다. 가이드는 해본 적이 없긴 한데,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건 좋아해서요. 한번 해보죠.”
한번 해보자.
결의를 다진 차민성이 이안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이안의 복색을 살피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칼리두 님.”
“말씀하십시오.”
“그…… 아무래도 복장을 조금 손봐야할 것 같아서요. 편하게 구경하시려면 사람들의 시선에서도 자유로울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아,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협회장의 집무실에 있는 사람들을 살폈다.
그러더니 차민성에게 물었다.
“대충 저렇게 입으면 됩니까?”
“예? 어떤…….”
“위아래로 시커멓게, 안에는 하얗고…… 이상한 끈을 매고 있네요?”
“아, 네 뭐, 저렇게만 입어도 지금보다야 눈에 덜 띄긴 할 겁니다. 물론 저것도 좀 그렇긴 한데…….”
“이 정도면 됩니까?”
“……어?”
조금 전만 해도 이쪽 세상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건만, 갑자기 정장 핏 완벽한 서양인으로 변했다.
“부족한가요?”
“……아, 아닙니다. 가시죠.”
모든 것은 고작해야 손짓 한 번에 벌어진 일이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으리라.
* * *
이안은 몇몇 정보를 더 습득했다.
먼저 이안이 방문한 이곳은 네 번째 중간계 어나더 어스의 수많은 국가 중 하나, ‘대한민국’이다.
대격변 이후 수많은 각성자를 배출하며 단번에 C9 소속 강대국으로 껑충 뛰어오른 국가라는데, 그 중심에 바로 차민성이 있었단다.
그는 이곳 어나더 어스에서 가장 강력한 각성자라고 하는데, 새삼 동질감이 느껴지는 이안이었다.
‘위기에 빠진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는 거, 그 말은 곧 그 세상 모두의 마지막 희망이란 뜻이니까.’
모두가 희망을 건다.
고작 단 한 명의 사람에게.
그 상황 속에서 느낄 압박감, 혹은 사명감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터. 이안 역시 느껴봤기에, 또한 느끼고 있기에 잘 안다.
동질감은 거기서 비롯되었다.
‘막막하겠군, 여러모로.’
그런 상황에서 더 높은 세계가 존재함을 알았다. 심지어 그 세계의 심부름꾼조차 자신을 압도한다.
이안이 처음 분석관과 마주했을 때 느꼈던 감정, 그리고 슈페리어 차원으로 넘어가 지배자란 존재와 처음 맞닥뜨렸을 때의 아득함.
아마도 그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테지. 여러모로 공감된다.
“여긴 경복궁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칼리두 님께서 처음 오셨을 때 찾았던 왕이 기거하던 궁궐이죠. 그러니까 아주 옛날에 말입니다.”
실로 무거운 짐을 짊어진 남자.
차민성은 이안이 요구했던 가이드 역할에 굉장히 심취한 듯 보였다. 그저 따라다니면서 감시나 하라는 뜻이었는데, 무슨 일이든 대충 하는 법이 없는 성격인가 보다.
“예전에는 이런저런 유적지나 문화유산이 많았는데, 대부분 균열이 발생하면서 폐허가 되었습니다. 여긴 아직 균열이 나타난 적 없어서 온전하게 남아 있죠. 물론 그게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혼란한 와중에 아무런 여파도 닿지 않은 걸 보면, 나름 신성한 장소인가 보네요.”
“그렇지 않아도 종종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여기가 한 번 불타 사라졌던 곳이거든요. 저도 역사책에서나 봤을 만큼 오래전 이야긴데…… 만약 또 폐허가 된다면 그때는 국운이 다한 것이라고…….”
전통과 역사가 있는 장소라면 으레 나도는 이야기다. 이안의 고향 땅에도 비슷한 미신이 참 많다.
쿠궁!
바로 그때였다.
쿠구구구구구구구……!
이안과 차민성이 방문한 경복궁.
그 푸른 하늘에 붉은 기운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디 그뿐일까?
지축을 뒤흔드는 진동, 거칠게 불어 닥치는 바람, 숨쉬기가 불쾌할 만큼 변질된 공기의 흐름까지.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아무래도 오늘인가 봅니다.”
“무슨……?”
“국운이 다하는 날 말이에요.”
균열.
네 번째 중간계 어나더 어스가 지난 수십 년간 겪어온 재앙의 시작.
그 문이 맑고 푸르렀던 경복궁의 하늘을 뒤덮기에 이르렀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파견 헌터들이 오기 전까진 제가 막아야 하거든요. 그게 원칙이라…….”
“그러시죠. 편히 일 보십시오.”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 참고로 말씀드리는데 저랑은 관계없는 균열입니다. 위에서 마음대로 벌이고 있는 일이라…….”
“알죠. 실무자와 결정권자의 불협화음이야 여기서도 흔하니까요.”
어울리지 않게 변명부터 늘어놓은 이안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붉은색 차원문, 역시 쥐구멍이다.
저 통로로 슈페리어 차원의 토착 괴수들을 떠밀고 있을 터.
그 옛날, 흑마법까지 섭렵했던 상아탑주 허버트 레온이 동부 대초원의 몬스터들을 삼국 국경으로 침범시켰을 때와 비슷한 경우였다.
‘차원문 크기가 상당한 것이, 아무래도 꽤 큰놈이 넘어오나 본데?’
차원문의 크기를 가늠한 이안이 연이어 차민성을 살폈다. 그는 시커먼 기운과 더불어 허리춤에서 한 쌍의 단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흐음, 아무래도…….’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 이안이 균열을 경계하는 차민성에게 물었다.
“차민성 씨.”
“듣고 있습니다.”
“이 궁궐마저 폐허가 되면 국운이 다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냥 말도 안 되는 미신이죠.”
“가끔은 말도 안 되는 미신이 중요할 때가 있는 법이니까요.”
“…….”
민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실제로 이곳이 폐허가 된다면?
그 파급력은 실로 어마어마할 터.
국민적 불안이 하늘로 치솟겠지.
“해서 드리는 질문인데, 차민성 씨 혼자서 다 막으실 수 있겠습니까? 어느 한 곳도 폐허가 되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말입니다.”
“……글쎄요. 솔직히 어려울 것 같네요. 특히 저 정도 규모라면…….”
“그렇군요.”
자신감 없는 목소리.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끔 주문을 걸어놓았던 ‘케리케이온’이었다.
“그럼 도와드리죠.”
“……예?”
“벌써 그 미신이 실현되는 일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나중이면 몰라도.”
네 번째 중간계 식 복장에 지팡이를 든 모습이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 이안이 하늘로 떠올랐다.
나아가 그 어떤 공격에도 쉬이 무너지지 않을 만큼 단단한 얼음 방어막을 경복궁 일대에 펼쳐놓았으니, 적어도 오늘 당장 미신이 실현될 가능성은 적을 것 같았다.
“자, 그럼.”
이안이 가만뒀다간 또다시 넋을 잃어버릴 기세인 차민성을 깨웠다.
차민성 역시 처음 이안의 압도적인 힘과 마주했을 때보다는 적응이 된 듯 금세 정신부터 차렸다.
“시작하시죠.”
“칼리두 님께서는……?”
“아, 저는 이쪽 분들 제대로 싸우는 모습이 궁금해서요. 힘들어 보이면 그때 다시 개입하겠습니다.”
물론 전부 도와주지는 않았다.
그저 미신이 실현되지 않을 만큼.
딱 그만큼만 도와주고 빠질 뿐.
‘만약 가능성이 보인다면…….’
이안의 앞날에는 실로 기나긴 터널이 남아 있다. 심지어 아직 중간조차 닿지 못한 터널이다.
그 터널을 무사히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만약 네 번째 중간계 어나더 어스의 사람들이 제 쓸모를 증명한다면, 그들과 손을 잡는 것도 훌륭한 수단과 방법이 되리라.
(국제 헌터협회 소속 S+급 라이센스 취득자 차민성, 2041년 9월 24일 오후 대한민국 서울에 발생한 균열 봉쇄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