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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242화 (24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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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2부 56화

    본디 아공간 주머니는 그 입구가 좁아 큰 물건을 넣을 수 없다는 점에서 불완전한 물건이었다.

    하나 이 풍요의 뿔이란 뜻을 가진 유물, 코르누코피아는 달랐다.

    스스로 앞에 놓인 물건을 빨아들여 보관한다. 그 물건이 크든, 작든, 그 어떠한 형태든 문제없다.

    이러니 아공간 주머니의 단점을 완벽하게 보완한 물건일 수밖에.

    ‘당장 필요했던 물건이기도 하고.’

    마침 이곳의 고유자원을, 예컨대 흑요석 따위를 대량으로 운반할 수단이 필요하던 참 아니었나?

    그런 와중에 참으로 요긴하게 쓰일 주머니를 하사받았다. 어쩌면 변장 주술로 자신의 계획을 훔쳐본 하데스의 선택이 아닐까 싶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건가? 그건 그거대로 문제로군.’

    주술 변장을 써야 하는 이상 하데스의 감시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루빨리 방법을 찾아야겠지.

    “감사히 받겠습니다.”

    물론 속으로만 생각할 뿐.

    하데스의 석상 앞에서는 그저 하사품을 챙기는 일에만 집중했다.

    [만족하니 다행이로군. 바로 여섯 번째 과업을 시작하겠느냐? 아니면 정비할 시간이 더 필요한가?]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여섯 번째 과업의 계시자께서 지금 당장 맡길 일이 있다고 하는구나.]

    끄덕.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서둘러 여섯 번째 과업의 석상 앞에 섰다.

    굉장히 잘생긴 조각상이다.

    ‘뭔가 급한 일이 있나 본데.’

    수행자가 절실한 계시자다.

    딱히 대단한 공양물을 바치지 않아도 될 것 같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성의 표시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첫인상이 중요한 법 아니겠나?

    달그락!

    이안이 공양 그릇 위에 여분의 황금 사과 한 개를 올려놓았다.

    극소수를 제외한 모든 지배자들이 사족을 못 쓰는 과일이니, 여섯 번째 계시자라고 다르진 않았다.

    [드디어 오셨군요. 수행자님.]

    조각된 얼굴만 봐도 잘생김이 느껴지는 비주얼답게 목소리 역시 젊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껏 만나본 남성 지배자 중 유일하게 존댓말을 써준다. 물론 더 봐야 알겠지만, 일단은 첫인상이 괜찮다.

    [시계탑에서 명성이 자자하신 수행자께 과업을 내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제우스 님의 아들이며 여덟 중간계를 비추는 태양의 지배자, 아폴론이라고 합니다.]

    격식을 갖추어 말하는 그의 직책은 태양의 지배자, 이름은 아폴론.

    아레스와 마찬가지로 제우스의 핏줄인 그가 말문을 이어갔다.

    [수행자님의 성함은 칼리두 와탕카, 맞으시지요?]

    “그렇습니다.”

    [이번에 여섯 번째 과업이시고.]

    “네.”

    [하데스 님의 과업을 통과할 정도면…… 실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겠네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잘 부탁합니다.”

    남다른 지배자다.

    특유의 느낌이 없다.

    앞서 만나 모든 지배자에게서 느껴졌던 특유의 오만함 말이다.

    ‘급해서 그런가?’

    아니, 그럴 리가.

    급하다는 이유로 이런 친절함을 보일 리 없다. 그냥 타고난, 나아가 갈고닦은 성정이 이런 거다.

    “급한 일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하데스 님께요. 제가 무엇을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이안이 먼저 물었다.

    뜸 들여서 좋을 거 없다.

    속전속결, 지금은 그게 중요하다.

    [오, 정녕 하데스 님께서 그리 말씀해 주셨습니까? 제가 곤경에 빠졌으니 얼른 가서 도와주라고요?]

    아니, 그건 아닌데.

    뭐 일단 그런 걸로 치자.

    “……예, 뭐, 그 비슷하게 말씀하시긴 했습니다. 그러니 얼른 말씀해 보시죠. 어떤 과업이든 완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안의 말에.

    정확히는 하데스가 자신을 챙겨줬다는 말에 감동한 듯 보인다.

    그게 저렇게까지 감동할 일인가 싶지만, 저들의 생태를 모르는 이상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으리라.

    [잘 알겠습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부탁드리지요. 지금 즉시 비프로스트를 통해서 네 번째 중간계에 다녀오십시오.]

    네 번째 중간계는 처음이다.

    첫 번째가 이안의 고향 문드아일.

    다섯 번째가 아레스 및 여러 지배자의 전쟁 놀이터였던 지구.

    네 번째는 뭐 하는 동네일까?

    “네 번째 중간계라 하시면……?”

    [다섯 번째 중간계 이전에 여러 지배자들이 여흥거리로 삼았던 중간계입니다. 제가 특히 아끼던 중간계이기도 한데…… 손을 뗀 지 꽤 오래되었는데도 빠르게 발전하더군요. 문명이 말입니다.]

    “그게 문제가 됩니까?”

    발전이 뭐 어쨌다는 걸까?

    문명이 발전하면 좋은 거지.

    이안의 물음에 아폴론이 골치 아프다는 말투와 목소리로 대꾸했다.

    [문제가 되지요. 빨라도 너무 빠릅니다. 자칫 다른 중간계를 침략할 만큼…… 아시다시피 저희 지배자들한테는 중간계의 균형을 지키는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중간계 간의 침략도 엄격히 금지 중이고요. 근데 그 선을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에요. 이건 문제가 큽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어이가 없다.

    자기네들이 여흥거리랍시고 우르르 몰려가서 불씨를 붙여놓고는, 뭐? 중간계의 균형을 지킬 의무?

    참으로 이기적인,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사상이 아닐 수 없으리라.

    “그래서, 제가 할 일이 뭡니까?”

    물론 속으로만 생각할 뿐.

    그걸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아직 꺼내기에는 시기상조다.

    [문제가 큰 중간계이니 만큼 저희 시계탑은 네 번째 중간계에 부분적 재구성 조처를 내렸습니다.]

    “……재구성 말씀이십니까?”

    [예, 안타까운 일이지만, 필요하다면 감행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재구성.

    이안의 고향에 예정된 파멸.

    그 여부를 판단해 달라고?

    시계탑의 지배자도 아닌, 고작해야 수행자에 불과한 자신에게?

    새삼 지배자 놈들의 중간계 취급이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껴졌다.

    [문제는 네 번째 중간계의 저항이 너무 거세다는 겁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부분적 재구성이라서, 이게 완전한 재구성하고는 또 다르거든요. 말 그대로 일부분만, 문명의 폭주를 잠재울 만큼만 도려내는 일인데…… 워낙 섬세한 작업이다 보니 저항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네요.]

    아하.

    무슨 소리인지 알겠다.

    모든 걸 지우고 새롭게 시작하는 완전한 재구성, 예컨대 이안의 고향에 떨어진 판정이 아닌, 표현 그대로 일부분만 손보는 재구성이다.

    화끈하게 짓밟을 수 없는 만큼 저항에 막히는 부분도 많을 터.

    [그 부분을 수행자께서 해결해 주셨으면 합니다. 가서 상황부터 살펴보고, 방법을 찾으시면 됩니다.]

    “방법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별수 없죠. 따지고 보면 저희가 그렇게 만든 거라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정 방법이 없으면 완전한 재구성 단계로 넘어갈 수밖에.]

    “…….”

    들으면 들을수록 어이가 없다.

    지배자들의 평균적인 성품에 그저 감탄만 나올 따름이리라.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말씀하세요.]

    “제가 지금껏 경험해 본 중간계는 총 두 곳입니다. 먼저 헤파이스토스 님께 바칠 공양물을 얻으러 갔던 첫 번째 중간계 문드아일, 그리고 아레스 님의 여흥을 보좌하러 갔던 다섯 번째 중간계 지구.”

    [두 곳 모두 멋진 중간계죠.]

    “두 곳 모두 비슷한 문명 수준을 가졌더군요. 물론 엄밀히 따지면 첫 번째 중간계 쪽이 좀 더 발달하긴 했습니다만, 적어도 다른 세상처럼 느껴질 만큼 엄청난 차이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럴 겁니다. 두 곳 모두 3티어 문명에 해당하는 곳이니까요.]

    3티어 문명.

    그 표현을 듣는 순간 프로메테우스에게서 받았던 기억 속 낡은 정보 한 가지가 활력을 되찾았다.

    ‘시계탑 평의회가 여덟 중간계의 문명 수준을 구분하는 단위.’

    올림포스와 아스가르드가 여러 안건을 논의하는 시계탑의 평의회.

    그들이 여덟 중간계의 문명 수준을 구분하는 단위가 ‘티어Tier’인데, 이안의 고향인 문드아일은 지구와 함께 3티어 문명에 속했다.

    “그럼 네 번째 중간계는……?”

    [2티어…… 아니, 그쯤 되면 1티어 문명이라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여덟 중간계 중 으뜸이죠.]

    1티어 문명을 보유한 중간계.

    그 말에 이안이 호기심을 품었다.

    이안의 고향이 3티어 문명이다.

    물론 지금은 모든 정보를 통제 중이라서 3티어지, 아마 2티어로 넘어간 수준이 아닐까 싶긴 하다.

    ‘그런데 1티어 문명이라니, 도대체 어떤 별천지 세상인 거야?’

    궁금하다.

    그리고 기대가 된다.

    만약 그 1티어에 속하는 문명 기술을 고향으로 전수할 수만 있다면? 모르긴 몰라도 슈페리어 침략 계획의 퀄리티가 대폭 상승할 터.

    “궁금하네요. 1티어 문명이 어떤 건지, 지금 바로 가 보겠습니다.”

    [오,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급한 일 아닙니까? 뜸 들여서 좋을 거 없죠. 속전속결로 끝내겠습니다.”

    [역시, 호평이 자자하신 분답게 뭔가 남달라도 확실히 남다르십니다. 그럼 모쪼록 잘 부탁드리죠.]

    “맡겨두십시오.”

    여섯 번째 과업으로 중간계 긴급출장을 명받은 이안이 신전에서 빠져나와 비프로스트 앞에 섰다.

    [수행자 칼리두 와탕카 님, 태양의 지배자 아폴론 님께서 설정해 놓으신 네 번째 중간계, 어나더 어스로 통하는 길을 열어 드릴까요?]

    네 번째 중간계, ‘어나더 어스’.

    이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번째 중간계, 어나더 어스로 향하는 통로를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태양의 지배자 아폴론 님의 지시사항에 따라 칼리두 와탕카 님의 외형을 네 번째 중간계와 어울리도록 재구성할 예정이오니, 모쪼록 즐거운 여정 되시기 바랍니다.]

    * * *

    “부협회장님, 균열 수치가 너무 높습니다. 일단 물러나셔야……!”

    국제 헌터협회 소속 S급 헌터.

    크리스티나가 균열 수치 측정기를 보며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격변’ 이후 최고치를 기록 중 아니던가?

    이런 수치의 균열에서 튀어나올 괴물, 뭔지는 몰라도 엄청날 거다.

    분명 재앙에 가까우리라.

    “우리가 물러나면.”

    “……?”

    “어차피 세상은 끝이다.”

    “하, 하지만…….”

    “여기서 막아야 해. 어떻게든.”

    “…….”

    그러나 국제 헌터협회 부협회장.

    길버트 베르너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이 세계의 마지막 수호자라고 불리는 남자로서, 20년 전 세계 곳곳에 균열이 나타나 온갖 외계 생물체가 쏟아지기 시작한 ‘대격변’ 당시 첫 번째 ‘각성자’였다.

    “이 정도 수치면 10년 전에 나타났던 레르니안 히드라 때보다 높잖아? 확실히 목숨 걸어야겠는데?”

    이를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남자, 길버트 베르너와 마찬가지로 이쪽 세계의 마지막 수호자 ‘차민성’이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민성, 미안하지만 이번에도 자네가 수고를 좀 많이 해줘야겠어.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자네라면…….”

    “날 너무 믿지 마. 지금까지야 운이 좋았을 뿐이지. 이번 건 나도 장담하기 어렵다고. 수치 봤잖아?”

    차민성은 이곳 어나더 어스의 마지막 수호자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힘을 가진 헌터였다.

    이 세상에 불어닥쳤던 여러 위기 중 대다수는 사실상 차민성이 막아낸 것이나 다를 바 없었으니, 부협회장 길버트 베르너의 부탁은 지극히 당연하고 익숙한 것이었다.

    “……뭐, 그래도 일단은 해볼 테니까 서포트 잘하라고. 메인 요리는 내가 먹더라도 사이드 요리는 너희들이 먹어줘야 할 거 아니야?”

    검은 머리칼의 차민성이 허리에서 시꺼먼 단검 한 쌍을 뽑았다.

    “슬슬 온다. 준비해.”

    모든 시민을 대피시킨 대도시 한가운데 발생하기 시작한 균열.

    그 백색 재앙 앞에 소집된 각성자, 혹은 헌터들이 저마다 익숙한 무기를 꺼내며 전투태세에 나섰다.

    파직, 파직, 파지지지지직……!

    이윽고 균열이 완성되었다.

    이제 저 너머에서 무시무시한.

    10여 년 전 온 세상을 파멸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레르니안 히드라 이상의 괴수종이 튀어나올 터.

    “어……?”

    보통 균열 너머에서 튀어나오는 것들은 누가 봐도 괴물이다.

    누구든 ‘괴물’ 하면 단박에 떠올릴 만큼 흉측하고, 포악하며, 거대한, 뭐 그런 것들 말이다.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게, 지금 저 백색 균열 안쪽에서 넘어온 존재는 달랐다.

    “……사람?”

    괴물이 아닌 사람의 형태다.

    아니, 누가 봐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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