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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2부 55화
끼이이이이……!
이안이 숙소 문을 열었을 때.
미첼한테서는 패배에 대한 분노나 후회, 아쉬움 같은 감정의 변화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살아야 하는 의미와 방향성을 잃어버린 이들 특유의 건조한 눈빛.
저 눈에 생기를 불어넣을 차례다.
“다시 뵙습니다. 미첼 님.”
“……패자에게 볼 일이 남았나?”
“남았죠.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시작도 안 했다? 무엇을……?”
“추방자 마을을 기억하십니까?”
“……!”
추방자 마을.
미첼과의 인연이 짙게 남은 곳.
그 물음에 비로소 반응을 보였다.
“그대가 어찌 추방자 마을을…….”
“부탁을 받고 왔으니까요.”
“부탁……?”
“마을 사람들, 특히 나타시아 님께서 많이 보고 싶어 하십니다.”
나타시아.
미첼 그린리버의 연인.
종과 세계마저 초월했던, 그럼에도 잊어버렸던 그녀가 떠오르자 미첼의 두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마을 사람들이, 그리고 그녀가 그런 부탁을 할 정도라면, 혹 그대도 추방자이신 거요?”
이제야 이안에게 흥미를 보인다.
말투 역시 조금은 공손해졌다.
“아뇨, 전 추방자가 아닙니다.”
“헌데 어찌……?”
“미첼 님과 고향이 같습니다.”
“나와…… 고향이 같다?”
“황실에 기증하신 그 로브, 제가 빌려서 잘 입었습니다. 덕분에 하늘을 원 없이 날아다녔지요.”
이안의 말에 미첼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말은 곧 중간계에서 왔다는 뜻 아닌가? 바로 자신의 고향 되는 첫 번째 중간계, 문드아일 말이다.
“아, 참고로 전 그린리버 황실 사람이 아닌지라 잠깐만 빌렸고, 이후에는 미첼 님께서 남기신 전언에 따라 새로 탄생한 황족 마법사에게 넘겨 드렸습니다. 하이리 그린리버라고, 지금은 제 아내 되는 사람이죠.”
놀라움의 연속이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눈앞에 저 칼리두 와탕카란 수행자는 자신과 거의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거다.
첫 번째 중간계에서 슈페리어로 넘어왔고, 과업을 수행 중이며, 하데스의 계략에 명계까지 떨어졌다.
“미첼 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고향이 위험합니다.”
이안과 미첼의 고향.
첫 번째 중간계 문드아일.
그곳이 위험하다. 무엇 때문에?
“시계탑에서 우리 고향에 재구성 판정을 내렸습니다. 일단 제 힘으로 늦춰놓기는 했습니다만, 아마 오래 버티진 못할 겁니다. 해서 제가 직접 넘어온 것이고요. 어떻게든 방법을 찾기 위해서 말입니다.”
같은 길을 걷는 줄 알았다.
한데 이제 보니 전혀 아니었다.
미첼은 단지 호기심으로 슈페리어 차원을 찾아냈고, 넘어왔다.
그러나 눈앞에 저 후손은 달랐다.
고향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여기까지 왔다. 심지어 재판장에 끌려갔는데도 망자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 다르다는 거다.
“그 방법이란 건 찾으셨소?”
“간단합니다. 이기는 거죠.”
“이긴다, 시계탑을 상대로?”
“그렇습니다.”
“쉽지 않을 텐데?”
“불가능에 가깝죠. 현재로서는.”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
그럼에도 미첼은 흥미를 느꼈다.
불가능을 논하는 이안의 목소리로부터 망설임이나 두려움, 막막함 따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물론 영원히 불가능하진 않을 겁니다. 제가 바꿀 예정이니까요.”
“무슨 수로 말이오?”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해야겠죠. 과업을 수행하는 것도 그 일부고요. 이기기 위해서는, 그리고 무언가 지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힘이 필요한 법 아닙니까?”
“으음.”
미첼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특유의 건조함이 많이 사라졌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내가 무얼 도울 수 있을지 모르겠군. 보시다시피 나는 실패했소. 명계의 하수인이 되어 복종할 뿐이지.”
“네, 우선은 그 명계의 하수인 역할에 충실하시면 됩니다.”
“……그게 무슨?”
“천 번의 우승까지 몇 번 남으셨죠? 이제 한 서른 번 남으셨나요?”
“그 정도 남은 걸로 아는데…….”
“우선 그것부터 채우십시오. 그리고 힘을 받으세요. 지금보다 강해지셔서 훗날 있을 싸움에 대비하셔야 합니다.”
“싸움이라…….”
그리고 반드시 하데스의 지배에서 풀려나는 방법을 찾아내겠다.
그 뒷말은 내뱉지 않았다.
어디선가 듣고 있을 테니까.
명계의 지배자, 하데스 말이다.
“시계탑을 무너뜨려야 우리들의 고향 땅이 무사합니다. 뿐만 아니라 미첼 님께서 정을 붙이셨던 추방자 마을의 추방자들, 그들도 더는 숨어 살 필요가 없어지겠죠.”
“…….”
“하데스 님과는 얘기 끝내놓았습니다. 적어도 이 싸움터 위에 둘만 남기 전까지는 뜻을 함께하기로 했죠. 그러니 지금부터는 부지런히 움직이세요. 고향에 남아 있는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미첼 님과 각별했던 추방자들을 위해서라도.”
이안의 당부에 미첼이 침묵했다.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긍정의 표시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용건이 하나 더 남아 있다.
“미첼 님의 기억이 필요합니다.”
“기억? 그게 무슨 소리인지…….”
“중간계인의 몸으로 아홉 번의 과업을 완수하셨습니다. 물론 과업이라는 게 매번 똑같지는 않겠습니다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저한테는 제법 유용한 정보 아니겠습니까?”
이안보다 먼저 아홉 번의 과업을 수행한 존재의 기억이다. 그 안에 담겨있을 정보가 상당할 터. 챙길 수 있을 때 챙겨놓음이 좋으리라.
“나야 상관은 없소만, 특별히 내 기억을 가져갈 만한 방법이 있소?”
“물론이죠. 이래 보여도 인류 최초의 8클래스 마법사 출신입니다.”
“8클래스……? 그게 사실이오?”
미첼의 두 눈이 다시 한번 휘둥그레졌다. 처음 휘둥그레졌을 때보다 곱절은 더 커진 느낌이었다.
“나 때는 5클래스의 경지가 최고였는데…… 많이 변했구려.”
“저 때도 어지간하면 5클래스가 최고였습니다. 제가 대단한 거죠.”
“…….”
“괜히 인류 최초였겠습니까?”
“…….”
마법사가 아니라 이안 자신이 대단한 거다, 그 뻔뻔하리만큼 당당한 태도에 미첼이 일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정말 남다르긴 하다.
“아무튼 소중한 기억, 잘 받아가겠습니다. 따로 하실 건 없고 그냥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그럼…….”
그로부터 얼마 후.
메모리 이터 주문으로 미첼 그린리버의 기억을 넘겨받은 뒤 몇 가지 대화를 더 나눈 이안이 곧장 챔피언의 숙소에서 빠져나왔다.
만족스러운 명계 탐험이었다.
* * *
[어떠하던가?]
[갑자기 뭐가?]
[시치미 떼기는! 그 수행자 말일세. 자네한테 평가를 맡겼던.]
하데스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이왕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김에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고자 했다.
절대적인 시간에 닿은 것이 확실한 중간계인 이안 페이지가 아닌.
과업의 수행자 칼리두 와탕카를.
[오, 그 친구, 정말 완벽하더군.]
[……설마 자네 입에서 그런 표현이 나올 줄이야. 대체 뭘 했기에?]
좀처럼 보기 드문 하데스의 극찬에 올림포스의 왕, 제우스가 놀란 듯 되물었다.
[내 당장 명계로 끌고 가서 이런저런 시련을 다 내려줬지. 어지간하면 죽어 나뒹굴거나,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하거나, 둘 중 하나가 될 만큼 끔찍한 시련을 말일세.]
[헌데?]
[헌데 그걸 견뎌내더군. 아니, 아니지. 견디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다 극복하더라니까? 내 살다 살다 그렇게 독한 수행자는 처음이야.]
연이어 펼쳐지는 하데스의 극찬.
그 반응들은 제우스의 호기심과 기대감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렸다.
[그러지 말고 자세히 좀 말해주게나. 정확히 어떤 시련을 내렸고, 어떤 식으로 극복해 냈다는 건가?]
[이 친구, 왜 이렇게 안달이 났어? 여유를 갖고 가만히 듣게. 내 설마 얘기해 주지 않을까 봐서?]
하데스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만큼 제우스의 반응이 예상에서 빗나가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그놈이 글쎄…….]
[글쎄?]
[내가 그놈 특기인 요술이랑 주술부터 금지시키고 투기장에…….]
[명계의 투기장 말인가?]
[……흐음.]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려던 하데스가 다짜고짜 뜸을 들였다.
노림수가 있는 뜸들임이었다.
[이거 제법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막상 떠들어대려니 입이 심심하군. 목도 마른 것 같고…….]
[여봐라, 어서 황금사과로 만든 과일주와 안줏거리를 대령하라!]
[어허, 이 사람! 내가 지금 황금사과나 얻어먹자고 이러는 줄 아시나? 그냥 갈증이 난다는 건데.]
[알지. 잘 알고말고. 그냥 성의일세. 알다시피 요즘 황금사과가 많이 들어와서 말이야. 좋은 게 있으면 나누는 것이 친구 아닌가?]
[이것 참…….]
[그때 자네가 얘기했잖아? 친구 좋다는 게 뭐냐고. 그 말 그대로 돌려줌세. 친구 좋다는 게 뭔가?]
[뭐…… 그렇기는 한데…….]
결국 못 이기는 척 대령 된 황금사과주 한 잔을 쭉 들이켠 하데스가 입가를 슥 훔치며 읊조렸다.
[크! 맛 좋다. 역시 과일주는 황금사과주가 최고라니까? 내 자네 덕에 좋은 술을 자주 마시는구먼.]
[원하면 언제든지 마실 수 있는 친구가 괜한 소리는, 자자, 그러지 말고 이제 슬슬 얘기해 보게나.]
[아아, 그거? 음, 가만있자, 내가 그 수행자 놈한테 내린 첫 번째 시련이 뭐였느냐 하면은…….]
그날.
하데스는 이안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기념으로 제우스의 마음속에 불씨를 제대로 지펴놓았다.
그 불씨에 이름이 있다면, 아마 기대감이라는 이름이 아닐까 싶다.
혜성처럼 나타난 유망주, 칼리두 와탕카를 향한 기대감 말이다.
* * *
[나, 명계의 지배자 하데스, 수행자 칼리두 와탕카의 다섯 번째 과업 완수를 모든 올림포스 전당의 지배자들 앞에서 인정하노라.]
슈페리어의 심장, 올림포스 신전.
하데스의 석상 앞에 선 이안의 손등에 새로운 문양이 새겨졌다.
그것은 곧 다섯 번의 과업을 수행했다는 증표였으니, 이안의 ‘격’ 역시 한 단계 더 높아졌으리라.
[또한 우리 올림포스 전당은 수행자 칼리두 와탕카의 뛰어난 과업 수행 능력을 높이 사는바, 그대가 모쪼록 무사히 우리들의 일원이 되길 진심으로 염원하는 뜻에서 하사품을 준비하였으니,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가도록 하라.]
슬슬 시작되었다.
올림포스 전당, 정확히는 그곳 수장 제우스의 노골적인 선물공세가.
물론 거절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지금은 뭐라도 챙기는 게 승리다.
탱그랑!
석상 앞 공양물 그릇에 빛이 모여들더니 어떤 물건을 만들어냈다.
여러 경험상 이것이 하사품일 터.
어떤 물건일까? 궁금하긴 하다.
[과업을 수행하다 보면 타지에 나가 있는 일이 다반사지. 그럴수록 식량이나 도구 따위가 많이 필요할 터.]
생김새만 따지자면 ‘뿔’이다. 짐승의 뿔 말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뿔피리나 나팔에 가까운 형태였다.
[그 뿔은 코르누코피아라는 유물이다. 올림포스 일족의 고대 귀족어로 ‘풍요의 뿔’이라는 뜻을 가진 만큼 아주 유용한 물건이지.]
코르누코피아Cornucopia.
고대어로 일컫기를 ‘풍요의 뿔’.
[수행자여, 그 풍요의 뿔 안쪽으로 손을 한번 넣어보겠는가?]
이안이 하데스의 권유에 따라 뿔 안쪽으로 손을 쑥 넣어봤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이 뿔의 정체를 말이다.
‘아공간 주머니.’
그야말로 아공간 주머니 그 자체.
물론 거기서 끝이라면 많이 실망스러울 거다. 말 그대로 아공간 주머니와 다를 것이 전혀 없으니까.
그러나 올림포스 전당의 보물은 고작 아공간 주머니 수준에서 그치지 않았다.
[무엇이든 집어넣고 보관할 수 있지. 아무리 거대한 물건일지언정 뿔 앞에 놓이는 순간 그대로 빨려 들어가니 활용에 주의하도록.]
정정한다.
기존 아공간 주머니의 한계가 완벽하게 보강된 새로운 주머니.
강력한 지팡이 케리케이온에 이은 올림포스 전당의 귀중한 보물.
일명 ‘풍요의 뿔’이 수행자 칼리두 와탕카의 수중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