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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2부 29화
‘……일단 내색하지 말자.’
이안이 가까스로 평정심을 유지했다. 어쩌면 함정일 수도 있잖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움직인다.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그 결과가 득이 될지 실이 될지, 항상 따지고 움직여야 한다.
‘예전에, 살면서 처음으로 시간이란 것을 되돌렸을 때처럼 말이지.’
다시 한번 마음을 굳힌 이안이 프로메테우스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태연하게 굴었다.
“헤파이스토스 님의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사슬을 교체하려고 하는데, 순순히 협조해 주시겠습니까?”
유창한 슈페리어 공용어.
여러 기억과 경험으로 더더욱 유창해진 이안의 발음은 이쪽 세상 그 누가 들어도 자연스러웠다.
[과업을 완수 중이신가 보군.]
그러자 ‘죄인’ 프로메테우스 역시 슈페리어 공용어를 구사했다.
[가만있자, 헤파이스토스가 보냈다면…… 두세 개쯤 완수하셨나?]
“이번이 세 번째 과업입니다.”
[본격적으로 자신감이 붙을 시기로구먼. 이대로만 계속하면 금방 지배자의 격을 얻겠구나 싶겠지.]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만, 자신감이 붙었다는 말씀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자신감과 오만함의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보여주는 말투.
[재미있는 친구일세?]
그런 이안의 반응이 썩 괜찮았던 걸까? 사슬에 칭칭 감긴 프로메테우스가 피식 웃으며 읊조렸다.
[보통 여기까지 올라오는 친구들은 그 임무가 무엇이든 나를 보자마자 배신자니, 죄인이니, 아주 그냥 난리를 치던데, 혹 그대는 나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하셨나?]
“듣기는 했습니다. 다른 지배자들과 달리 추방자들을 도우셨다고.”
[그런데?]
“저지른 죄가 그것뿐이라면, 딱히 모욕을 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호오.]
예상치 못한 대답에 프로메테우스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것참 시계탑의 지배자가 되길 원하는 수행자로서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군. 설마 평소에도 그렇게 말하고 다니는 건 아니시겠지?]
“뭐 문제 있습니까?”
[음? 그야 당연히…….]
“벌레한테 측은지심 좀 느꼈다고 배신자 취급하긴 좀 그렇잖아요?”
[…….]
“다른 죄가 더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들어보고 판단하도록 하죠.”
신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 이안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신중함이란 바로 슈페리언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니, 그에게 추방자는 곧 벌레와 같은 존재여야 한다.
적어도 입으로는 말이다.
[그럼 이건 어떤가?]
“또 어떤 죄가 있으십니까?”
[중간계의 벌레한테도 측은지심이 생기더군. 해서 내 이래저래 몇 가지 가르쳐 주다가 걸렸지 뭐야?]
추방자뿐만 아니라 중간계의 인간들한테도 영향을 끼친 배신자.
역시, 고대 제국의 언어를 구사한 것은 우연이나 착각이 아니었다.
[예컨대 불을 피우는 방법이라든지, 소통할 수 있는 언어라든지.]
바로 그 순간.
이안의 뇌리에 번개가 쳤다.
어떤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다.
‘만약 이 프로메테우스라는 자가 우리 세계에 와서도 측은지심을 느꼈다면, 그래서 본인이 말한 것처럼 무언가를 가르쳐 줬다면…….’
실로 많은 것들이 설명된다.
이안의 고향, 첫 번째 중간계 문드아일에 어째서 슈페리어 차원과 연결되는 쥐구멍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프란 페이지, 그 고대의 인간이 무슨 수로 슈페리어 차원의 언어를 언어의 힘이란 이름으로 습득하고 있었는지.
대부분 설명이 되리라.
“……중간계의 벌레들한테도 감정을 느끼는 티탄 출신 지배자라, 그건 좀 독특하긴 하네요. 아니면 그냥 그쪽 취향이 괴상한 건가?”
그럼에도 이안은 지극히 슈페리언스러운 태도를 잃지 않았다.
아직 반응할 때가 아니다.
“아무튼 그렇습니다. 당신이 추방자와 사랑에 빠지든, 중간계와 사랑에 빠지든, 저한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어차피 여기 묶여서 평생 고통받으실 텐데, 거기다 대고 모욕해봐야 기운만 빠지겠죠.”
[현명하시군.]
“제 관심사는 아까 말씀드렸듯 순순히 계실 것이냐, 아니면 사슬을 바꾸는 과정에서 탈출을 감행하실 것이냐, 그 여부밖에 없습니다.”
[효율적이기도 하시고.]
“아셨으면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말씀해 주시는 것이…….”
[그런데.]
이안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던 프로메테우스가 별안간 갸웃거렸다.
의뭉스러운 표정도 함께였다.
[그렇게 중립적이고 효율적이신 수행자의 몸에서 어찌 중간계 벌레들 냄새가 솔솔 풍기는 게지?]
“……!”
이번에는 크다.
처음 고대 제국어를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큰 당혹감이 느껴졌다.
[날 시계탑의 그 오만한 지배자들처럼 속일 수 있다고 여겼다면 큰 오산이야. 딱 봐도 알겠거든.]
프로메테우스는 확신했다.
이안이 중간계에서 왔음을.
그 확신은 너무나 확고하여 어떻게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어쩌지?’
끝까지 시치미를 뗄까?
아니면 과감하게 나서볼까?
선택의 기로, 고민은 짧았다.
‘……과감하게 나가보자.’
중간계와 깊은 교류를 나눈 존재.
범상치 않은 존재임은 확실하다.
그런 존재의 정보를 얻는 거.
나쁘지 않은 계산이리라.
‘여차하면 시간을 되돌린다.’
결국 회귀의 때가 왔는가?
긴장감을 끌어올린 이안이 프로메테우스에게 제국어로 속삭였다.
“……어떻게 알았지?”
“얘기했잖아? 냄새가 난다고.”
그러자 프로메테우스 역시 제국어로 화답했다. 이안이 구사한 제국어와 마찬가지로 아주 오래전에나 쓰였던 구식 제국어였다.
“냄새?”
“중간계 냄새에 추방자들 냄새도 섞여 있는 것이, 무슨 수로 여기까지 왔는지 대충 알 것도 같군.”
“그 냄새라는 게 정확히…….”
“아, 무슨 걱정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그럴 필요 없어. 다른 지배자들은 느끼지 못하는 감각이니.”
“…….”
“중간계의 벌레들이나 쓰는 천박한 감각이라며 없애버렸거든. 아주 오래전에, 자기들 손으로 직접.”
그가 말하는 감각과 냄새, 그것들은 단어 그대로 ‘후각’을 뜻했다.
“처음 만났을 때 제국어도…….”
“떠본 거야. 냄새가 진동해서.”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뭐지?”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말투.
프로메테우스가 계속 말했다.
“무슨 짓을 했는지, 어째서 이 꼭대기에 묶여 있는 건지, 그대가 중간계에서 왔음을 어떻게 알아낸 건지, 묻는 족족 대답해드렸잖아?”
틀린 말은 아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 이안이 묻는 말에 성실히 대답해 줬으며, 이름과 출신 또한 널리 알려졌으니, 이만하면 따로 정체를 밝힐 필요가 없을 터.
“하지만 그대는? 아직 아무런 얘기도 해주지 않았어. 과업의 수행자라는 가면만 보여줬을 뿐이고.”
“…….”
“그러니 정체가 무엇이냔 물음은 그대 입에서 나올 질문이 아니지.”
“…….”
“전적으로 내 몫이라고. 내 몫.”
그건 그렇다.
그의 정체는 명확하다.
프로메테우스란 이름도, 그가 티탄족에서 전향한 기간테스라는 사실도, 죄인이 되기 전까지는 ‘예언의 지배자’로서 올림포스 전당 최상급 지배자였던 과거까지도 전부.
“……저는.”
타당한 요구임을 느낀 이안.
그가 찰나의 침묵 끝에 읊조렸다.
이왕 회귀를 염두에 두고 과감히 나가기로 한 거, 제대로 질러볼까?
“이안 페이지라고 합니다.”
“이안 페이지?”
“재구성을 앞둔 첫 번째 중간계 문드아일에서 왔고, 맞서 싸울 힘을 얻고자 과업을 수행 중입니다.”
“오호, 문드아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 내가 처음 관심을 가졌던 중간계도 거기였지. 문드아일.”
지금껏 파악하기로 프로메테우스는 중간계에 호의적인 지배자다.
벌레보다 못한 취급을 했던 분석관이나 기껏해야 장난감취급이 전부였던 아레스와는 경우가 다르다.
더군다나 이안의 정체를 냄새만으로 파악했으니, 한 번쯤 과감히 나서 반응을 볼 가치가 충분했다.
“어쩐지 익숙하다 했더니만, 문드아일 특유의 냄새였군. 그 땅에서 보낸 세월이 제법 되니…… 나도 모르는 사이 익숙해졌을 수밖에.”
아련함이 느껴지는 중얼거림.
그가 계속해서 말문을 이어갔다.
“해서, 지배자의 격을 얻어 맞서 싸울 힘이 생긴다면, 그다음에는 어찌할 생각이지? 지배자들을 모조리 죽이기라도 하실 셈인가?”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겠죠.”
“……가능하다고 보나?”
“글쎄요.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더군요. 가능성이 낮습니다.”
가능성이 낮다.
솔직한 대답이었다.
“그래도 지금으로서는 말씀하신 방법, 몰살이라고 해두죠. 그걸 목표로 두고 움직이는 중이긴 합니다. 아직 먼 이야기지만요.”
이안의 말에 프로메테우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째서인지 피부와 눈에 생기가 돌아오기도 했다.
“그대를 보고 있자니, 그리고 그대의 고향을 들으니 옛 생각이 떠오르는군. 그래, 그 중간계에는 항상 그대와 같은 자가, 닥쳐오는 거대한 위협에 절망하지 않고 어떻게든 맞서 싸우려는 자가 있었지.”
어떻게든 맞서 싸우려는 자.
순간 누군가의 이름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정답일까?
“…….”
이번에는 이안이 아닌 프로메테우스가 잠시간의 침묵을 삼켰다.
물론 길지는 않았다.
“……이런 제기랄.”
다짜고짜 욕지거리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난 매번 이런 거에 약하네.”
“무슨……?”
“뭣도 아닌 미물이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제 딴에는 소중한 것들을 지켜보겠답시고 아등바등하는 거.”
“…….”
“염병할 측은지심 같으니라고. 내가 매번 이 멍청한 감정에 휘둘려서 본 손해가 얼만데 참…….”
그렇게 한참을 자조 섞인 목소리로 구시렁거리던 프로메테우스.
이내 그가 정신을 차린 듯 눈앞에 나타난 미물, 이안 페이지의 손에 들린 사슬을 보며 읊조렸다.
“오늘 들은 건 못 들은 걸로 하지. 비밀을 지켜드리겠단 뜻이야.”
이안의 비밀을 지켜주겠다.
무작정 믿을 수 없는 약속이었으나, 왠지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헤파이스토스가 내린 과업, 날 묶고 있는 사슬 갈아 끼우는 거, 그건 내가 반항하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야. 이 사슬이 풀리는 순간 나타날 감시자가 문제지.”
“감시자……?”
“그 감시자한테서 살아남는 것이야말로 그대가 받은 진짜 과업인 셈이지. 뭐, 과업을 내린 입장에서는 그냥 죽으라고 보냈겠지만…….”
그냥 죽으라고 보낸 임무.
기분이 썩 좋진 않았으나, 애당초 과업이라는 게 다 그런 것이겠지.
“다른 놈들은 그것도 모르고 그 자리에서 죽거나, 맞서 싸워 이기거나 둘 중 하나였는데, 내 특별히 그대한테만 미리 알려주는 거야.”
이 또한 빌어먹을 측은지심.
그 감정의 영향이리라.
“아무튼 각오가 되었다면 사슬을 풀고, 그게 싫으면 그냥 도망이나 치시라고. 과업이야 좀 더 준비해서 천천히 수행하면 그만이니…….”
철그덕!
프로메테우스의 권유는 거기까지였다. 말문이 다 끝나기도 전에 사슬부터 푸는 이안이었으니 말이다.
“제가 시간이 별로 없어서.”
시간이 없다, 실로 간단한 이유와 더불어 전투를 준비하는 이안.
“……이거 큰일이네.”
그런 그를 바라보며 프로메테우스가 낭패라는 듯 중얼거렸다.
“내가 방금 본 예지에 따르면 그대, 감시자한테 죽을 텐데……?”
한때는 ‘예언의 지배자’였던 존재.
프로메테우스의 한 박자 늦은 예언에 이안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걸 왜 지금 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