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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207화 (207/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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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2부 21화

    “아직도 거기 있었나?”

    “아직도 있냐니, 난 처음부터 여기 있었다고 몇 번을 설명했는데.”

    “그러니까, 이제 슬슬 방 뺄 때도 되지 않았나 싶어서 하는 말이야.”

    “매몰차시군. 그래도 네 아빈데.”

    풀 죽은 척하는 프란 페이지.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자 언제 그랬냐는 듯 의뭉스럽게 웃었다.

    “어차피 곧 보고 싶어도 못 볼 날이 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이제 정말 몇 번 안 남은 것 같거든.”

    듣던 중 반가운 소리.

    이안이 되물었다.

    “왜지?”

    “흐음, 덕분에 새로 습득한 지식으로 풀이하자면…… 네 녀석의 격이 너무 올라가 버렸기 때문이야.”

    ‘격’이 올라갔다.

    역시 프란은 이안의 내면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기억나지? 내 사념이자 꼭두각시신세에서 벗어나 이안 페이지로서의 자아가 각성했을 때, 그때랑 상황이 좀 비슷하다고 보면 돼.”

    이안은 본디 프란 페이지가 만든 사념체였다. 하지만 이안 페이지로서의 자아가 나날이 강해졌고, 결국 완전한 독립을 이루어냈다.

    한데 그때와 비슷하다고?

    “이제는 독자적인 자아를 넘어서 아예 나보다 높은 격을 갖추어가고 있으니…… 그 12과업이란 심부름을 모두 끝낼 때쯤이면 나랑은 영원히 작별일 거다. 아마도.”

    영원한 작별.

    이안이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딱히 감흥이 없는 표정이었다.

    “좀 아쉬워해 주면 안되냐?”

    “아쉽지가 않은데 무슨 수로?”

    “너무하는구먼. 그래도 내가 애비다. 천륜이 지엄할지언데…….”

    “내 손으로 끊어낸 천륜이지.”

    직접 끊어낸 천륜.

    더 말해서 무엇 하랴?

    프란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언제 만나도 무서운 아들이다.

    “또 끊을 건 아니지?”

    “하는 거 봐서.”

    “뭘 해야 남은 시간이라도 연명할 수 있을까? 알려주면 노력해 볼게.”

    “하려던 얘기나 마저 해봐.”

    “하려던 얘기?”

    “속삭였잖아? 당신은 이 격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아하! 맞다. 맞아. 이거 어쩌다 보니 얘기가 이상한 곳으로 셌구먼.”

    내면의 프란이 손뼉을 탁 쳤다.

    그러고는 제법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목청까지 가다듬으며 말했다.

    “이 아비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지. 그 격이라는 건 말이다. 비유하자면 우리 세상의 계급이라고나 할까? 황족이나 귀족 같은 거.”

    이안의 고향에 존재하는 계급.

    황족, 귀족, 평민에 이르기까지.

    프란은 그 세 가지 계층을 쭉 펼친 손가락 세 개와 함께 언급했다.

    “황족은 황제가 될 수 있고, 귀족은 영주나 재상이 될 수 있지. 그러나 백성은 황제가 될 수도, 영주나 재상이 될 수도 없어. 되고 싶다면 혁명을 일으켜 직접 왕조를 세우거나, 큰 공을 세워 귀족의 작위부터 받는 게 우선이니까.”

    그게 뭐 어쨌다고?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이다.

    계급 사회란 그런 것 아닌가?

    “그런데 말이다. 우리는 다 똑같은 인간이잖아? 황족이라고 내 마법 안 통하는 거 아니고, 노예라고 내 마법이 더 잘 통하는 거 아니니까. 분명 다 똑같은 인간에 불과한데…… 어째서 누구는 황제가 되는 것이 당연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노예로 전락함이 당연한 걸까?”

    다 같은 인간일 뿐이다. 한데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정해져 있다. 계급에 따라서 말이다.

    “황족이나 귀족들이 누리고 있는 각종 혜택, 암묵적인 관습은 누가 결정하는 것이며, 평범한 이들이 감내해야 하는 여러 부조리와 한계는 또 누가 정해준단 말이냐?”

    “그야 오래전부터 합의된 사회적 질서와 기준이…….”

    “그래, 바로 그거야.”

    프란이 손뼉을 탁 쳤다.

    이안 역시 조금은 감이 잡혔다.

    “격이란 바로 이곳 슈페리어 차원의 기준이고 질서다. 높은 격을 갖출수록 더 많은 것들이 가능해지지. 예를 들자면, 얼마 전에 그랬잖아? 텔레포트 주문이 먹히지 않는다고. 포탈 주문도 마찬가지고.”

    끄덕.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랬다. 여기서는 텔레포트와 포탈 마법이 발동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까 봤지? 아프로디테, 그 높은 격을 가진 존재는 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포탈을 열었다. 이게 무엇을 뜻하겠느냐?”

    높은 격을 갖출수록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다. 마치 평민이었던 자가 귀족 작위를 하사받는 순간부터 각종 혜택을 누리는 것처럼.

    “아마 너도 그 격이라는 게 더 높아지다 보면 텔레포트든, 포탈이든, 조만간 가능해질 거다. 그 이상도 가능하겠지. 무엇이 되었든 상상을 초월하지 않을까 싶다.”

    슈페리어 차원에서 격이란 곧 기준이며 권한이고, 질서 그 자체다.

    그 가능성은 너무나 무궁무진하니, 프란조차 일부만 이해했을 뿐.

    “그러니까 당신 말은, 격이 올라갈수록 한계도 사라진단 뜻인가?”

    “그렇지. 할 수 있는 일은 많아지고, 할 수 없는 일은 줄어든다. 그나저나 네 녀석, 격이 올라가더니 말귀가 좀 밝아진 것 같기도……?”

    “……하던 얘기나 계속해.”

    “다 했는데? 뭐, 굳이 한마디 덧붙이자면, 그런 와중에 너는 격이랄 것이 없는 중간계의 벌레 주제에 저기 저 시계탑 꼭대기의 존재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했지.”

    절대적인 시간, 크로노스의 회귀.

    분명 그것을 뜻하는 이야기일 터.

    “그러니 위에 계신 분께서 눈깔이 돌아? 안 돌아? 확 돌지. 모든 문제는 결국 거기서부터 시작된 거야. 네 녀석이 자초한 일이라고.”

    “그 정도는 알고 있어.”

    그래, 알고 있다.

    결국 원흉은 이안이다.

    이안이 재구축 이론에 닿지만 않았더라면, 지금쯤 이안의 세상은 아무 것도 모른 채 평화를 누렸으리라.

    “뭐, 그래도 나는 잘했다고 본다. 내 머리 위에 나를 벌레처럼 여기는 족속들이 득실득실하다는 거, 솔직히 좀 꺼림칙하잖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박멸해야 두 발 쭉 뻗고 잘 수 있지. 안 그래?”

    공감하기 싫다.

    하지만 공감이 되었다.

    둘은 어쩔 수 없이 닮았다.

    “그러니 이왕 시작한 거 제대로 해봐라. 너와 네 주변에 위협이 되는 모든 것들을 네 손으로 직접 박멸하라는 거다. 나도 여기 남아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도와주마.”

    돕겠단다.

    물론 신뢰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으로서는 프란이 아니라 누구의 손이라도 빌려야 한다.

    그 손이 도움만 된다면야,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용해 먹어야겠지.

    “날 위하는 척하지 마. 순전히 당신 호기심 때문인 거 아니까.”

    “이런, 들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약간의 문제가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온전한 모습이었던 프란 페이지의 파편.

    그 존재의 형상이 흐릿해졌다.

    “……이거 봐라. 네 녀석의 격이 올라가니 나는 온전히 나로서 기생하는 것조차 힘들어졌잖아?”

    “…….”

    “물론 네 입장에서는 내가 빨리 사라지길 바라겠다만…… 내가 아직 그러고 싶지 않거든. 그러니 이만 가 봐. 조금 쉬어야겠으니.”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내면에서 나와 눈을 뜬 이안.

    그의 눈앞에는 더 이상 프란 페이지와 어둠뿐인 내면 세상이 아닌, 아르로디테가 마련해 준 거처 안쪽 풍경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 * *

    아프로디테는 분명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신전으로 오라 말했다.

    언제든 오라는 소리였으니, 이안은 딱히 뜸들이고 싶지 않았다.

    [수, 수행자시여.]

    올림포스 신전 앞을 지키는 문지기가 이안을 단번에 알아봤다.

    전에 봤던 그 문지기였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매혹의 지배자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데 그 반응이 예사롭지 않다.

    많이 고분고분해졌다고나 할까?

    ‘소문이 벌써 퍼졌나 본데.’

    첫 번째 과업을 완수했다는 사실.

    불과 며칠 전의 일이건만, 이미 올림포스 구역에 소문이 퍼진 모양이리라. 그게 아니고서야 저리 고분고분하게 나올 리가 없을 터.

    [오셨군요. 나의 수행자여.]

    매혹의 지배자 아프로디테의 조각상은 일전에 공양을 했을 때처럼 백색 안광이 뿜어지고 있었다.

    과업을 완수한 지배자에 한해서는 또 공양할 필요가 없는가보다.

    [과업 이야기부터 해야겠지요. 수행자 칼리두 와탕카, 그대는 나, 매혹의 지배자 아프로디테가 내린 과업을 무사히, 완벽하게 수행하셨어요. 이는 내 격을 걸고 보장하는 업적이며, 그에 따른 합당한 보상 역시 준비되어 있답니다.]

    그 순간.

    새하얀 빛줄기가 올림포스 신전 하늘로부터 내려와 이안의 오른쪽 손등에 복잡한 문양을 새겼다.

    첫 번째 과업의 완수자임을 알려주는 올림포스 특유의 증표였다.

    [먼저 그대에게 첫 번째 과업의 완수자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격을 허락하겠어요. 이는 우리 올림포스의 열두 지배자가 만장일치로 내리는 축복이니, 앞으로의 여정에 크나큰 도움이 되길 바랄게요.]

    첫 번째 완수자로서의 격.

    프란의 말에 따르면, 할 수 있는 일이 결정되는 기준이자 질서.

    이안이 그 축복을 오롯이 다 받아들일 때쯤, 매혹의 지배자 아프로디테의 음성이 다시금 들려왔다.

    [또한 나는 수행자와 개인적으로 많은 약속을 했습니다. 가호를 내려주겠노라 약속하였고, 그대의 수호성이 되어주겠노라 약속했지요.]

    한 번 맺은 약속은 영원한 약속.

    아프로디테는 그리 믿었기에, 이안과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았다.

    [내가 내려줄 수 있는 최고의 가호는 ‘매력의 가호’입니다. 나의 가호를 받는 이는 만물로부터 무한한 호의를 받지요. 그 호의는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변하지도 않는답니다. 내 손으로 직접 가호를 거두지 않는다면 말이에요.]

    일컫기를 매력의 가호.

    만물의 호의를 사는 가호라.

    [이 세상 모든 만물이 그대에게 대가 없는 친절을 베푸는 기분, 한 번쯤 느껴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듣는 것만으로는 딱히 모르겠다만, 거절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

    무엇이 되었든 받는 수밖에.

    “……궁금하네요. 많이.”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이번에는 빛줄기가 아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무형의 기운.

    다만 형체 대신 향기가 느껴졌다.

    아주 매혹적인, 그 어떤 꽃이나 향초보다 향기로운 그런 향이었다.

    [또한 마지막으로 나, 아프로디테는 지금 이 순간부터 수행자 칼리두 와탕카의 수호성으로서 그대가 요청하는 모든 도움에 성심성의껏 응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모든 도움에 응답하겠다.

    역시 가호보단 이쪽이 더 유용해 보인다. 일전에 헤라클레스와 맺은 약속도 그렇고, 앞으로 일을 진행함에 있어 좋은 옵션이 되리라.

    “감사드립니다. 시작부터 너무 많은 호의를 선물 받은 것 같네요.”

    [뭘요. 덕분에 앓던 이 하나가 쏙 빠져나간 기분인걸요? 마음 같아서는 뭔가 더 해드리고 싶은데, 형평상의 문제로 그럴 수 없다는 점이 한스러울 뿐이랍니다.]

    이안을, 아니, 칼리두 와탕카를 대하는 아프로디테의 태도에서 깊은 신뢰와 호의가 뚝뚝 떨어졌다.

    매력의 가호라는 힘이 벌써 발동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과했다.

    뭐, 나쁜 현상은 아니겠지.

    [자, 그럼 어서 두 번째 과업을 수행하셔야지요. 바로 건너편에 보이는 조각상으로 가서 공양을 하세요. 제가 단단히 일러뒀으니 아무거나 공양하면 나타날 거예요.]

    건너편에 있는 또 다른 조각상.

    그 조각상은 아프로디테와 달리 남자의 형상이었으며, 왠지 모르게 어디서 본 것 같은 인상을 줬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다녀와요. 나의 수행자여.]

    꾸벅 인사한 이안이 곧장 아프로디테의 건너편 조각상 앞에 섰다.

    아무거나 공양해도 나타날 거라 했으니, 정말 아무거나 해볼까?

    ‘어디 한번…….’

    이안이 신전 바닥에 장식용으로 쌓여 있는 조약돌을 주워 공양했다.

    그러자 곧 남성의 모습을 한 조각상에서 목소리가 들렸으니…….

    [네놈이 정녕 미친 게로구나?]

    투쟁의 지배자 아레스.

    그가 분노한 듯 으르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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