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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2부 18화
이안은 재촉하지 않았다.
충분히 생각할 기회를 줬다.
눈앞에 이 꼬맹이, 절대로 심부름꾼 따위가 아닐 거다.
아레스가 직접 변장했거나, 최소 화신쯤 되는 존재겠지. 그래도 명색이 지배자가 이리 허술해서 쓰겠나 싶기도 한데, 이미 앞서 만났던 헤라클레스나 아프로디테를 떠올리자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좋다. 나 투쟁의 지배자 아레스, 올림포스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나니, 만약 일이 잘못될지언정 수행자에게 선물한 니벨룽겐의 반지와 약속을 저버리지 않겠노라.]
“라고 아레스 님께서 전언하셨습니까?”
[……마, 맞다. 아레스 님께서 그리 말씀하셨느니라.]
“그렇군요. 그럼 제가 드린 모든 제안을 수락하셨다는 전제하에, 아레스 님의 부탁을 받아들이죠.”
이안이 왼쪽 검지에 니벨룽겐의 반지를 끼우며 말했다.
역시 예상했던 그대로 양질의 마나가 충만히 전해져온다.
이만하면 앞으로의 여정에 크나큰 도움이 되어줄 터.
‘몇 가지 옵션이 더 붙어 있는 것 같긴 한데…….’
추가 옵션에 대해서는 아레스도 모르는 눈치.
혹은 그가 보기에 너무 하찮아서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든가.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높겠지.’
저리 허술해도 최상급 지배자 아닌가?
이안의 고향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은 분석관 수만 명이 덤벼든다 한들 벌레처럼 죽일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 그것이 바로 최상급 지배자의 ‘격’이리라.
[……그런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느냐?]
물론 겉보기로는, 그리고 말투나 행동거지만 봐서는 그만한 ‘격’이 느껴지지 않는 꼬맹이 아레스.
그 소년이 입을 열었다.
“아레스 님의 전언입니까?”
[어? 아, 그, 그래. 전언이시다.]
“말씀하십시오.”
[그…… 엿들으려고 엿들은 건 아니고, 그냥 슬쩍 들린 건데, 네놈 이름이 칼리두 와탕카가 맞느냐?]
칼리두 와탕카.
얼떨결에 확정된 이안의 가명.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지만 어쩌겠나? 당분간은 꼼짝없이 ‘수행자 칼리두 와탕카’로 살 수밖에.
“무슨 문제라도?”
[흐으음, 이상하군. 아무리 봐도 기간테스 일족 덩치는 아닌데.]
“……예?”
[아, 별거 아니다. 네 부모가 어디서 주워들었을 수도 있겠지. 그쪽에서는 나름 유명하다고 하니.]
대체 무슨 소리일까?
어디서 뭐가 유명해?
[아무튼 잘 부탁하마. 특히 그녀에게는……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서 많이 미안하다고 전해다오.]
제대로 된 설명 없이 주제를 바꾼다.
한데, 그 바뀐 주제 역시 기가 찼다.
‘정황상 부인은 아프로디테가 확실하다. 그런데 사과를 해달라고?’
분명 그럴 지언데.
누구한테 사과를 전해달라고?
부인이 아닌, 외도의 대상한테?
‘뭐가 어떻게 되어먹은 족속들인지 원.’
지독한 가족바라기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일.
이후 아레스와 헤어지고 나서도 한참을 고민해 봤으나,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칼리두 와탕카…….
아니, 이안 페이지였다.
‘……그나저나, 가족들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지배자들의 복잡한 가족 관계를 보고 있자니, 새삼 고향 세계에 남겨놓고 온 가족들 생각이 났다.
‘저쪽은 얼마나 지났을까?’
이안이 이곳으로 넘어온 지는 이쪽 세계의 기준으로 약 석 달이 지났다.
워낙 땅덩어리가 넓은지라 추방자 마을에서 이곳 슈페리어의 심장으로 이동하는 시간만으로 석 달 중 대부분을 소모해버렸다.
‘문제는 이곳과 중간계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다는 점.’
정확히는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
일정하지 않고 불규칙하다.
분석관조차 분석에 실패했을 만큼 불규칙한 차이를 보였다.
‘너무 긴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가족들이 보고 싶다.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동료들이 보고 싶다.
아내, 요하나, 부모님, 더글라스.
황제 폐하, 올리버 경, 여러 장인들, 상아탑의 마법사 동료들.
페어리 퀸을 포함한 권속들과 미묘한 관계였던 드래곤 일족까지도.
‘처음에는 어머니뿐이었는데.’
어깨 위에 짊어진 사람들.
시작은 어머니뿐이었으나, 한 명 한 명 인연이 늘고 추억을 쌓다보니 어느새 이만큼이나 늘어났다.
‘……요하나.’
그중에서도 유독 아비를 바라보며 빵긋빵긋 잘 웃어주던 아기.
그러나 20년 후 미래에는 미소 짓는 방법조차 잊어버렸던 딸아이.
그 녀석 생각이 자꾸만 났다.
‘조금만 더 기다려다오. 곁을 오래 비우지 않겠다는 약속, 이 아비가 어떻게든 지켜볼 테니까.’
이안이 슈페리어의 심장 중심부에 우뚝 솟아난 흑색 거탑.
자기네 마음대로 이안의 고향땅을 쑥대밭으로 만들려던 세력.
‘시계탑’을 노려보며 다짐했다.
‘저 탑을 무너뜨려서라도 반드시.’
* * *
와구, 와구!
“요하나, 천천히 먹으렴. 그러다 체한단다.”
와구, 와구!
“요하나, 할머니 말씀 들어야지.”
쪼옥, 쪼옥!
“…….”
500일.
그러니까 약 16개월 차를 맞이한 요하나 페이지.
이제 슬슬 걷고 뛰는 것이 능숙해진 그 아이가 눈앞에 놓인 이유식, 그리고 더글라스가 만든 특제 분유를 번갈아가며 폭풍처럼 흡입하기 시작했다.
“이상하구나. 네 아버지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렇고, 이 할미도 그렇고…… 이렇게까지 먹성 좋은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저희 황실도 그래요. 소식이 미덕이거든요.”
“으음,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
“그러게요…….”
먹성이 좋다.
좋아도 너무 좋다.
500일 된 아기, 요하나가 말이다.
와구! 와구!
단순히 잘 먹는 게 아니다.
분유와 이유식을 전투적으로 먹는다.
이를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까?
그래, 생존이다. 생존과 성장을 위해서 철지부심 씹어 먹는 느낌.
어째서 500일 된 아기한테 그런 전투적인 기세가 느껴지는 걸까?
“자 - 무 - 따!”
먹성만 좋은 게 아니다.
전체적인 발달이 빠르다.
구강 구조상의 문제로 발음은 아직 미흡하나, 벌써부터 완벽에 가까운 문장을 구사했다.
방금만 해도 그렇다.
잘 먹었단다.
세상에, 500일 된 아기가 잘 먹었다니. 참고로 말하는데, 이 집에서 그런 말투는 누구도 쓰지 않는다.
팟!
어디 그뿐일까?
아기용 의자를 박차고 내려온다.
당장에라도 어디론가 달려가 버릴 기세였다.
“요, 요하나, 어딜 가려고……?”
어머니 하이리가 묻자.
“노끄야!”
놀 거란다.
순간 할 말을 잃어버린 하이리.
요하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앗뇽!”
“요하나, 잠깐!”
우다다다다다!
요하나의 목적지는 자신의 방.
일찍이 태어나자마자, 아니,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께서 만들어주신 특별한 방이었다.
달칵! 쿵!
어린 딸아이를 위해서 손잡이마저 낮게 달아놓았다.
물론 이마저도 평범한 500일 차 아기에게는 쉽지 않겠지만, 요하나는 매우 능숙히 문을 열고 닫았다.
촥! 촤악!
어디 문만 닫고 잠글까?
온 힘을 다하여 방문 커튼 역시 내렸다.
마법이 걸린 커튼이라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깜깜해져 버린 요하나의 방.
촛불이라도 켜두는 게 맞지 않나 싶을 때쯤.
화륵!
실로 놀라운 일이 요하나의 방에.
그리고 요하나의 손바닥 위에서 펼쳐졌다.
“끄응……!”
그것은 불꽃. 아니, 불꽃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불씨였다. 작은 손바닥과 잘 어울리는 불씨 말이다.
피슈슈……!
조그마한 크기.
금방 꺼져 버리는 지속력.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요하나가 마법을 부렸다는 점이다.
다시 얘기하는데, 요하나는 태어난 지 고작 500일 된 아기다.
이제 막 아장아장 걷는 것이 인생 최대 업적이어야 하는 그런 아기 말이다.
한데 마법을 부린다고?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예컨대 누구처럼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이상에는 결단코.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그래.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이상.
요하나는 바로 그 불가능에 가까운 전제조건을 충족시켰다.
물론 자의가 아닌, 타의였다.
‘여기 남아 있는 가족들은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킬 테니까요.’
비록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요하나는 아버지의 회귀 마법과 함께 과거로 돌아왔다.
아버지 이안 페이지처럼 모든 기억을 머릿속에 간직한 채로.
그녀가 추측하기로, 아버지께서 시간을 되돌릴 때 나눠드린 마나가 부작용을 일으킨 건 아닐까 싶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리라.
‘이번에는 저도 아버지처럼 최연소 8클래스, 아니, 그마저 뛰어넘은 마법사가 되어서 반드시……!’
이안과 함께 시간을 거슬러 올라온 ‘회귀자’.
요하나는 그녀 나름대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 * *
‘일단 오긴 왔는데…….’
티탄의 영토.
그 땅은 여러 기억 속 모습 그대로 구름 너머 천공에 부유하는 땅이었으니, 뭣 모르는 이들 눈에는 가히 ‘신들의 땅’처럼 보일 만했다.
‘……저길 어떻게 기어들어간다?’
티탄의 땅 아래에서 하염없이 높은 허공을 올려다보는 이안.
그가 선천적으로 잘 자라지 않는 턱수염을 매만졌다.
“우선…….”
티탄의 영토 지리를 잘 알고 있을 만한 자.
그런 존재를 지상에서 찾는 것이 우선일 터.
기억을 잘 살피면 쥐구멍이라도 찾지 않겠나?
[거기 너, 두 손 들고 그대로 돌아서라.]
바로 그 순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안보다 족히 3배 이상은 커다란 티탄족 순찰병이었다.
“……저 말씀이십니까?”
[슈페리언이로군.]
사실 아까부터 접근을 감지하고는 있었다.
조금 더 가까워질 때까지 기다려줬을 뿐.
[시계탑이 보낸 염탐꾼인가?]
“아뇨, 염탐꾼은 아니고…….”
이안이 극도로 경계하는 티탄 병사의 요구에 따라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린 채 빙글 뒤돌았다.
“심부름꾼인 걸로 하죠.”
[……심부름?]
“미리 사과드립니다.”
[뭣……?]
‘블링크.’
순식간에 티탄 순찰병의 배후로 접근한 이안.
그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마법 연계가 펼쳐졌다.
‘페럴라이즈.’
니벨룽겐의 반지 덕분에 더욱 강력해진 페럴라이즈 주문이 티탄 병사의 육신을 단숨에 굳혀버렸다.
‘메모리 이터.’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기억 흡수 마법, 메모리 이터.
하나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다.
그 불완전함 속에서 어떻게든 옥석을 가려낼 수밖에.
“큭……!”
티탄 병사가 수백 년간 쌓아온 기억이 이안의 머릿속으로 빠르게 흡수되며 미약한 두통을 일으켰다.
“…….”
기억은 단순했다.
그저 충성스럽게 살아온 티탄족 군인.
그에게도 평범한 삶과 가족이 있었었다.
‘정말…… 평범하군.’
지난 석 달.
이안은 추방자 마을과 헤라클레스 등을 겪으며 심경의 변화가 찾아왔다.
그건 바로 슈페리어 차원의 지성체라 하여 모조리 죽여야 할 적은 아니라는 점이다.
‘분류할 필요가 있겠어.’
제거하는 편이 이득인 상대.
살려두는 편이 이득인 상대.
과거 이안은 완벽한 두 번째 삶을 위하여 어머니 이외 모든 사람들을 그리 분류한 적이 있었다.
‘그땐 정신적으로 많이 피폐했었거든. 라그나르한테 배신을 당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인지라…….’
슈페리어 차원으로 넘어온 직후도 마찬가지였다.
고향 땅의 멸망을 목격한 직후였던지라 정신적으로 많이 피폐했다.
분류를 넘어 모조리 적으로 간주하고 여차하면 목숨을 빼앗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때와는 달라야겠지.’
과거에는 보다 완벽한 복수를 위하여.
지금은 여러 가능성을 개척하기 위하여.
뿐만 아니라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예전과는 달라질 필요가 있으리라.
“……하루만 주무시고 계십쇼. 혹시 몰라 조치는 해뒀으니까 입 돌아갈 일은 없을 겁니다.”
티탄족 순찰병에게 강력한 수면 마법과 몇 가지 보호 주문을 걸어놓은 이안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기억 속에서 ‘쥐구멍’을 찾아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