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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2부 14화
정체가 무엇이냐?
그 물음에 관하여 이안은 어느 정도 진실을 담아 대꾸해 줬다.
놈은 어차피 평의회의 일원으로서 이안이 누군지 대충 알고 있다.
괜히 숨기거나 거짓을 늘어놓아 봐야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겠지.
다만, 이미 크로노스를 되감았단 사실만큼은 끝까지 숨겼다. 놈들에게 이안은 ‘감히 벌레 주제에 슈페리어의 언어를 구사하며, 어쩌면 그 힘으로 크로노스까지 되감을지도 모르는 중간계의 변수’로 보여야지, ‘언제든 되감을 수 있는 치명적인 오류’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
‘신중해야 한다. 크로노스를 한 번 되돌리기 직전까지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야만 해. 부작용이 존재하는 이상 횟수의 한계 역시 존재할 테니까.’
분석관, 사냥꾼, 꼬마들, 촌장의 기억을 통해서, 그리고 지금 눈앞에 우뚝 선 헤르쿨레스의 존재감 앞에서, 이안은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싸움은 장기전이 될 거다. 그것도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기나긴 장기전, 아무리 신중하게 시간을 되돌린다 한들 족히 수십 번은 더 되돌려야 할지도 몰라.’
이안의 고향.
저들이 표현하길 중간계.
그 세상을 위협하는 모든 위험요소로부터 자유로워지기까지 필요한 정보와 힘, 그리고 인내심의 요구량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터.
‘당장 이 헤르쿨레스란 존재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강한지, 어떤 성향을 가졌는지, 정말 약속을 지키는지, 그런 것들을 파악하고 돌아간다면 일이 한층 수월해지겠지.’
한 번의 시간 회귀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한다. 그것은 오만이다. 그만큼 강대한 적들과 마주했으니 말이다.
‘일단 조금 더 대화를 나눠볼까?’
방향성을 확고히 잡은 이안.
그가 어느새 철퍼덕 앉은 채로 경청 중인 헤르쿨레스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네놈은 너희 세상에서도 아주 특별한 놈이라는 뜻이군. 하기야, 중간계를 벌레 취급하는 평의회가 직접 나설 정도였으니, 충분히 그럴 만도 하겠어.]
“그쪽은 다른가?”
[음? 무엇이 말이냐?]
“중간계를 벌레 취급하는 평의회라고 하니 꼭 남 얘기하는 것 같아서, 당신도 그들 중 하나잖아?”
[이 몸은 남을 벌레 취급하지 않는다. 직접 붙어보기 전까지는.]
그리 읊조린 헤르쿨레스가 이안에게 입은 팔뚝 상처를 바라봤다.
[봐라. 고작 벌레한테 물렸다고 하기엔 상처가 너무 깊지 않나?]
이미 다 회복해 버렸으면서 무슨.
그래도 무슨 말인지는 잘 알겠다.
[그나저나, 네놈도 어지간히 독종이로구먼. 밟혀 죽기는커녕 오히려 분석관을 죽여 여기까지 오다니.]
“운이 나쁘게도 올라온 첫날부터 당신한테 걸려 버렸지만 말이야.”
[틀렸다. 네놈은 오히려 운이 좋은 편이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 걸렸으니까. 말하지 않았더냐? 이 몸은 태어나서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 앞으로도 마찬가지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 헤르쿨레스가 주섬주섬 투구부터 착용했다.
편하게 풀어헤쳐 놓았던 사자 가죽 갑옷 역시 단단하게 동여맸다.
[가만있자, 태양풀 때문에 쥐새끼처럼 기어들어 왔다고 했던가?]
“몇 뿌리 가져가도 될까?”
[오, 그야 얼마든지. 오늘 난 여기서 네놈을 못 본 거니까.]
정말 약속을 지키려나 보다.
이는 꽤 중요한 정보가 될 터.
[대신 풀떼기 캐는 동안에 몇 마디만 하지. 채집하면서 들어라.]
갑옷과 투구, 방망이와 활로 단단히 무장한 헤르쿨레스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다. 이안을 만나기 직전까지의 모습 그대로였으니까.
[추방자들의 주술로 변장해서 중심지에 기어들어 갈 생각이라면 제대로 하는 편이 좋을 거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걸음걸이라든지, 복장이라든지, 체취라든지.]
그는 놀랍게도 태양풀이 필요한 까닭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한데 그러면서도 제지하기는커녕 성공적인 잠입에 필요한 팁을 늘어놓기 시작하였으니, 어째서일까?
[그리고 이건 그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인데, 네놈 억양 말이다.]
“억양?”
[내 이름은 헤라클레스다. 네놈 발음처럼 헤르쿨레스가 아니라.]
“…….”
[아까는 그냥 넘어갔다만, 중심지까지 기어들어 갈 생각이거든 반드시 그 억양부터 고치도록.]
“…….”
[네놈 억양 구려. 진짜로.]
“……참고하지.”
생각지도 못한 충고.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직 현지의 존재만이, 그것도 그 슈페리어의 심장이라는 도시에서 오래 살아본 토박이만이 해줄 수 있는 충고 아니겠는가?
‘사냥꾼과 분석관의 기억을 토대로 고쳐야겠군. 시간이 걸리겠어.’
그리 마음먹은 이안이 태양풀 다섯 뿌리를 챙겨 자루에 챙겼다.
그러고는 여전히 자신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헤루쿨레스, 아니, 헤라클레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있잖아.”
[음?]
“날 보내주는 거, 그리고 못 본 척해준다는 건 약속이라 치겠는데, 굳이 충고를 해주는 이유가 뭐지? 난 엄밀히 따져서 당신과 당신 동료들의 적일 텐데?”
단순한 질문이 아니다.
어쩌면 헤라클레스란 존재를 파악하는데 크나큰 단서가 될 물음.
[나와 내 동료의 적? 으하하! 네놈,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군.]
그 물음에 헤라클레스가 떡 벌어진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꾸했다.
[네놈이 여기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만약 이게 내기였다면 네놈 죽음에 돈을 걸었을 거다. 그깟 눈속임만으로는 시계탑의 감시자를 속이지 못할 테니까.]
시계탑의 감시자, 이안이 그 범상치 않은 키워드를 머리에 넣었다.
[그러니 이는 충고나 조언 따위가 아닌 동정심이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약속 하나 더 할까? 만약 네놈이 내 생각보다 오래 살아남는다면, 해서 언젠가 나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특별히 그 자리에서 부탁 한 가지를 들어주도록 하마.]
근엄한 생김새와는 다르게 약속을 남발하는 타입의 헤라클레스.
물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이안 입장에서는 엄청난 옵션이었다.
[자, 오늘 이곳에 없었던 쥐새끼와 나눌 대화는 여기까지다. 곧 시계탑에서 보낸 물자가 도착할 터. 다 챙겼으면 슬슬 떠나라.]
더 얘기할 거 없다는 듯 일방적으로 대화를 끊어버린 헤라클레스.
그는 정말 이안을 여기서 못 본 사람처럼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마침 인간의 상반신과 말의 하반신을 가진 켄타우로스 일족 수송대가 멀찍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무언가 더 파악하고 싶어도 그럴 겨를이 없는 상황, 급히 투명화 주문을 펼쳐 빠져나가는 이안이었다.
* * *
[오셨습니까?]
모든 재료를 구한 이안이 추방자 마을로 돌아왔을 때, 촌장 아르골 역시 이안의 요구를 완성시켰다.
[부탁하신 미첼 그린리버 님의 흔적들입니다. 찾아보니 제법 많더군요. 워낙 마을 사람들과 두루두루 거리낌 없이 지내셨던 분인지라.]
촌장의 말이 실로 옳았다.
쪼개진 박달나무 지팡이부터, 평소 입던 옷, 신던 신발, 가벼운 낙서, 깨진 수정구, 녹슨 열쇠…….
……가만, 열쇠?
“이 열쇠는 뭡니까?”
[미첼 님께서 저희 마을에 계실 때, 따로 사용하셨던 지하실의 열쇠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거기 있는 물건을 모두 끄집어낼까 하다가, 이건 직접 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 그대로 뒀습니다만…….]
“판단 잘하셨네요.”
감이 좋은 노인이다.
도망치고 숨어야 하는 이들의 촌장으로서 손색이 없는 재능이리라.
“그 지하실부터 가 보죠.”
[그러시지요. 이쪽으로.]
미첼이 썼다는 지하실은 촌장의 집 바로 뒤뜰에 자리 잡고 있었다.
풀밭 아래 육중한 문을 열자 계단이 보였고, 그 계단 끝에 단단히 잠긴 문짝이 하나 더 있었으니, 바야흐로 열쇠가 나서줄 차례였다.
철컥!
부드럽게 풀리는 자물쇠.
끼이익, 하는 소리와 더불어 이안이 지하실 안쪽으로 발을 넣었다.
‘라이트.’
불빛 한 점 없는 지하실을 이안의 마법이 밝혔다. 그러자 곧 이런저런 물건이나 가구 따위가 눈에 들어왔는데, 첫인상은 간단했다.
‘별거 없네.’
표현 그대로 지하실이다.
잠깐 쉴 수 있는 간이침대, 책상과 의자, 쓰다 남은 잉크와 낡은 깃펜, 몇 장의 종이, 그리고…….
‘……수첩?’
그나마 눈에 띄는 물건을 꼽자면 수첩, 정확히는 ‘일지’인 것 같다.
“후!”
이안이 수첩 겉면에 쌓인 먼지를 입으로 후 불어 털어내는가 싶더니 곧장 첫 번째 페이지를 펼쳤다.
사락!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좋다.
그래도 수첩 자체는 마법이 걸려 있어 종이가 훼손되지 않았나보다.
[혹시나 해서 그 자리에 계속 두었습니다. 중간계의 문자로 적혀 있어서 읽을 수도 없으니…….]
뒤따라 들어온 촌장 아르골의 말처럼 일지는 모두 중간계, 그러니까 제국의 문자로 서술되어 있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아, 그러시지요. 허면 저는 밖으로 나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마침내 혼자 남은 지하실.
이안이 곧장 일지부터 살폈다.
『많은 사람들은 나를 황위 경쟁에서 물러난 황족이며, 마법사이고, 동시에 상아탑주로만 안다.』
『물론 그 시선은 타당하다. 다만 나는 내 본질이 황족과 마법사보다는 탐험가, 그리고 고고학자라고 믿는다. 따라서 먼 훗날 역사책에도 나를 황족이나 마법사가 아닌 ‘탐험가이자 고고학자 미첼 그린리버’로 회자해 주길 바란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서두부터 남달랐다.
그도 그럴 게, 미첼 그린리버라 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가 바로 ‘황족 출신 고위마법사’다.
덕분에 하이리에게도 항상 ‘미첼그린리버의 후예답다’는 수식어가 따라붙지 않던가?
한데 정작 미첼 그린리버 본인은 스스로를 황족 마법사가 아닌, 탐험가이자 고고학자로 불러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저 높은 하늘 너머 우주까지 닿아보는 것, 하여 명백히 존재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다른 세상을 모험하는 것, 그것은 나의 오랜 숙원이었다. 마법은 단지 내 꿈을 이루어줄 도구에 불과했다.』
『오직 그 꿈에 닿기 위해서 마법을 수련했고, 세상 곳곳을 뒤져 도움이 될 만한 아티펙트를 닥치는 대로 수집하고 만들어냈다.』
하늘 너머 우주라는 공간.
그 영역에 직접 닿아보는 것.
미첼 그린리버의 꿈은 그랬다.
『덕분에 나는 여기서, 다른 세상에 닿은 최초의 제국인으로서, 이 세상 누구도 읽지 못할 언어로 하여금 기념비적인 기록을 남긴다.』
어찌 이곳에 닿았는가는 따로 적어놓지 않았다. 정말 드넓은 우주를 횡단이라도 한 걸까? 그거, 이안이 알기로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조금 더 살펴보자.
『이 세상은 특별하다. 공기 중에 마나가 섞여 순환한다. 덕분에 나 역시 조금은 더 강해진 것 같다.』
『오늘은 헤르쿨레스란 자를 만났다. 이쪽 세상에서 만난 존재 중 단언컨대 가장 강력한 자였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늑대의 땅 남부로 낚시를 하러 다녀왔다. 우리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기괴한 생선들이 참 많았는데, 구워서 먹어보니 보기보다 맛은 좋았다.』
『이 세상은 놀랍게도 태양과 달이 없다. 그래서 낮과 밤의 차이도 없다. 언제나 자체적으로 빛을 발하는 세상, 나는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아 지하실을 따로 받았다. 이제야 푹 잘 수 있겠다.』
『해와 달이 뜨지 않는 이유를 드디어 알았다. 촌장님의 말씀으로는 우주에서 가장 높은 곳에 군림하는 세상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라 하는데, 허면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선다면 거기가 곧 세상의 끝이 아닐까?』
『지금 당장은 어려워도 언젠가 한 번쯤 가보고 싶다. 저 시계탑의 최정상에, 광활한 우주의 끝에.』
『그곳에서 세상 만물을 내려다보는 기분, 그 느낌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정말 궁금하다. 궁금해.』
일지는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그날 있었던 일이나 느낀 점 따위를 간단하게 서술하는 일기형식.
더 읽어봐야 알겠지만, 딱히 주의 깊게 읽을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마지막 글귀만큼은 굉장히 의미심장했다. 특히 그가 시계탑으로 향한 이후 소식이 끊어졌다는 행보를 알고 있는 이상 더더욱.
“……역시.”
남의 기록으로는 부족하다.
직접 가서 확인해 볼 수밖에.
미첼 그린리버의 일기를 덮은 이안이 지하실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지하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촌장 아르골한테 말했다.
“변장, 바로 준비해 주십시오.”
물론 헤르쿨레스, 아니, 헤라클레스가 해준 조언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