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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2부 12화
제법 쓸 만해 보이는 변장이다.
간혹 추방자들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슈페리어의 심장에 들어가야 할 때 자주 쓰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 변장은…….]
“아, 대답하실 필요 없습니다.”
[……?]
“스스로한테 물어본 겁니다. 아직 촌장님 기억이 익숙지가 않아서.”
기억을 읽는다 하여 자신의 기억처럼 언제든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머릿속 수납장에 종류별로 차곡차곡 쌓아놓을 뿐.
“재료가 꽤 많이 필요하네요? 태양풀, 유령버섯, 엘부크 상아…….”
[원래는 구하기 쉬운 재료들이었습니다. 이곳 늑대의 땅에 차고 넘치는 재료였지요. 그런데…….]
“평의회에서 개척 사업을 시작했군요. 덕분에 여러분은 결계 안쪽에서 옴짝달싹도 못 하는 중이고.”
추방자 마을 촌장 아르골.
그의 낯빛이 어둡게 변했다.
실제로 그들은 마을에 고립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아직 머나먼 북쪽 땅을 개척 중이기에 직접적인 영향은 없었으나, 문제는 변장에 필요한 재료 대부분이 북쪽 땅에서만 나고 자란다는 거다.
[그렇습니다. 특히 이번 개척에는 기간테스 종족까지 투입되었으니…… 늑대의 땅 전체가 지배자들의 영토로 떨어짐은 시간문제겠지요. 이제 또 어디로 도망치고 숨어들어야 할지 막막할 따름입니다.]
추방당한 이들의 숙명이 그렇다.
평생 도망자 신체를 면치 못한다.
비록 평의회를 포함한 시계탑의 지배자들은 추방당한 이들을 중간계와 마찬가지로 벌레 취급하기에 직접 토벌하지는 않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문제는 그들의 눈에 띄고자 안달이 난 족속들이었다.
예컨대 사냥꾼 같은 놈들 말이다.
“제안 한 가지 드리죠.”
그런 촌장에게 이안이 말했다.
이거 잘만 하면 서로 필요한 것을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어떤 제안을 말씀하시는지……?]
“새로운 지역에 안전한 터전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아까 보여드린 결계 그거, 아마 사냥꾼뿐만 아니라 분석관의 눈도 속일 수 있을 겁니다. 그만하면 새 터전을 잡는 데 문제는 없겠죠.”
[……!]
이안의 대답에 촌장 아르골이 두 눈을 번쩍 뜨며 놀라워했다.
[부, 분석관이라 하시면…….]
“아, 말씀드리지 않았네요. 여기 오기 전에 한 놈 잡고 왔습니다.”
[허어……!]
평의회의 분석관을 죽였다?
이는 놀라고도 남을 문제였다.
그도 그럴 게, 분석관이 무엇이던가? 시계탑의 지배자 집단 중 ‘올림포스 전당’과 ‘아스가르드 전당’에 소속된 말단 지배자 아니겠나?
아무리 말단이어도 지배자는 지배자다. 눈먼 아버지로부터 힘과 권능을 허락받은 존재란 뜻이다.
한데 그런 존재를 쓰러뜨렸다고?
슈페리언도, 또 다른 시계탑의 지배자도 아닌, 중간계의 인간이?
‘거짓말 같지는 않다.’
촌장은 예지능력을 가졌다.
비록 미약한 수준에 불과하나 이따금 선명히 보일 때가 있다.
그 옛날 미첼 그린리버를 처음 만날 때가 그러했고, 바로 오늘 이안 페이지를 만날 때도 그러했다.
‘이토록 선명한 점괘는 항상 마을의 생존에 큰 도움을 줬지. 촌장으로서 그냥 넘길 수 없는 문제야.’
촌장 아르골이 결심을 세웠다.
이안의 말을 전부 믿기로 했다.
그는 아직 슈페리어 차원의 모든 지성체를 적대적으로 보는 존재.
괜히 증명 따위를 운운했다가 겨우 회복된 관계만 어그러질 터.
그리되면 큰일이다.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말씀만 해주시구려.]
“판단 잘하셨습니다. 기회를 두 번이나 드릴 생각은 없었거든요.”
이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농담처럼 읊조렸으나 진심이었다.
그는 아직 이 땅의 지성체들을 믿지 못했다. 그나마 몇몇 슈페리언들의 기억을 읽어봤기에 이만한 호의나마 베풀 수 있는 거다.
적어도 이 마을의 추방자들은 중간계 침공에 연루된 시계탑 지배자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었으니까.
“조건은 간단합니다. 제가 요구하는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주십시오. 물론 가능한 선에서요.”
푸른색 마나가 두 사람 앞에 어떤 그림을 그렸다. 꼬맹이들과 사냥꾼, 촌장, 분석관의 기억을 토대로 만든 ‘늑대의 땅 지도’였다.
“첫 번째 요구는 변장입니다. 재료는 제가 구해올 테니 바로 변장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십시오.”
이안의 첫 번째 요구는 변장.
과거 미첼 그린리버가 그랬던 것처럼 슈페리어의 중심지로 잠입할 수 있는 변장을 준비해 놓아라.
“겸사겸사 개척 사업의 동태도 좀 살펴 드리겠습니다. 계산은 아까 그 결계로 치렀고요. 어떻습니까?”
[마침 내지인 변장에 능숙한 주술사가 저희 마을에 있습니다. 재료를 구해오시는 대로 곧장 착수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놓겠습니다.]
‘내지인’이라함은 곧 아버지의 피라는 것을 물려받아 기괴한 머리카락과 안광을 갖게 된 존재일 터.
그나저나 주술사라니, 여기에도 그런 개념이 존재할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그 능숙하다는 주술사가…… 아까 그 꼬맹이들이잖아?’
촌장과 꼬맹이들의 기억에 따르자면 그랬다. 이거 왠지 못 미덥긴 한데, 어쩌겠는가? 기억이 그런데.
“좋습니다. 바로 다녀오죠.”
로브를 고쳐입은 이안,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몇 마디 덧붙였다.
“저희 중간계는 아까 말씀드린 분석관에게 침공을 당했습니다. 모든 것이 짓밟힌 미래 역시 보았죠.”
[그, 그런 일이…….]
“따라서 저는 이 세상에 속한 모든 이들한테 다소 불친절할 수 있습니다. 신뢰받지 못한다는 인상을 드릴 테고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미리 양해의 말씀 드리겠습니다.”
정중한 말투, 정중한 목소리.
다만 그 내용은 정중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모든 것이 불타오르는 광경을 봤다. 그런 그에게 호의를 기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리라.
“아, 그리고.”
할 말이 더 남았을까?
무언가 떠오른 듯 검지를 치켜세운 이안이 촌장에게 읊조렸다.
“미첼 그린리버, 그분께서 마을에 남긴 흔적들을 모아주십시오.”
[흔적 말씀이십니까?]
“남겨놓은 일지라든지, 전언이라든지, 사소한 거라도 좋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마을 사람 전원을 수소문해서 남아 있는 모든 흔적을 확보해 놓도록 하지요.]
“부탁하죠.”
이안이 로브에 딸린 후드를 뒤집어썼다. 이쪽 세상에서 얼굴이 팔려봐야 이득 볼 일은 없지 않겠나?
“그럼.”
* * *
태양풀, 유령버섯, 겨우살이 야광 진드기 가루, 엘부크의 왼쪽 상아.
기타 다양한 재료들이 이안의 머릿속에 있었고, 그 모든 건 늑대의 땅 내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였다.
다만, 약간의 문제가 있다면.
‘엘부크의 상아와 태양풀인데.’
먼저 엘부크의 상아.
정확히는 왼쪽에 달린 상아.
이쪽 세상에는 코끼리와 여러모로 비슷한 짐승 ‘엘부크’가 산다.
그 짐승은 코끼리보다 작되 보랏빛 가죽을 가졌으며 특이하게도 왼쪽 상아만 반짝거렸다.
‘코끼리 상아와는 달리 계속 자란다고는 하는데, 그래도 미안하군.’
계속 자란다니 다행이다. 그래도 최대한 아프지 않게 잘라줘야겠지.
‘그리고 태양풀, 이건 나고 자라는 위치가 여러모로 좋지 않아.’
태양풀은 늑대의 땅 북쪽, 평의회의 개척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 중인 지역에서만 나고 자란다.
‘되도록 마찰은 일으키지 않는다.’
아직은 탐색 단계,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신중할 필요가 있으리라.
‘그레이트 인비저블.’
이윽고 북부 개척지 인근에 닿은 이안이 투명화 주문을 펼쳤다.
언어의 힘과 술식의 묘리가 조화를 이룬 가장 완벽한 투명화였다.
‘저 거인 놈들이 촌장의 기억 속에 있는 그 기간테스 일족인가?’
처음에는 그런 의문이 들었다.
제국 영토와 맞먹을 만큼 커다란 평야를 개척하는 일 아니겠는가?
시간이 걸림은 당연지사, 땅 전체를 개척할 리도 만무하다 여겼다.
한데 두 눈으로 직접 마주하고 있자니, 저 거대한 기간테스 일족이 아무것도 없는 평야를 도시의 베이스로 개척해 나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새삼 촌장과 마을 사람들의 걱정이 이해가 되었다.
‘가장 작은 개체만 해도 나보다 다섯 배 이상씩은 크다. 몇몇 개체는 분석관보다 거대한 것 같군.’
표현 그대로 ‘거인’ 일족.
저들이 저들만의 방식과 규모로 하여금 늑대의 땅을 개척 중이다.
그 속도는 실로 어마어마할 터.
‘태양풀만 얻고 빠르게 물러나자.’
지금껏 습득한 슈페리언들의 기억에 따르면, 이 개척 사업의 책임자는 기간테스 일족의 수장이다.
‘이름이…… 헤르쿨레스였나?’
기간테스 일족의 수장.
‘용감무쌍한’ 헤르쿨레스.
그는 시계탑 내 주축 세력 중 하나인 ‘올림포스 전당’ 소속된 투사였으며, 평의회의 의결권을 가진 중급 지배자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서열상 분석관보다도 상위의 존재다. 부딪치지 않는 편이 좋겠지.’
마음을 굳힌 이안이 움직였다.
투명화 마법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고 최대한 기간테스 일족과 마주치지 않게끔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안쪽으로 진입하였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놈들이 임시거처로 쓰는 천막지대가 눈에 보였다.
‘촌장과 꼬마들 기억으로는 이 근처에서 자라는 풀이 확실한데…….’
이안이 태양풀을 찾는 그때였다.
쿵!
거인들의 천막지대 가장 안쪽.
붉은 깃발이 휘날리는 황금빛 천막으로부터 무언가가 걸어 나왔다.
그 존재는 붉은 장식이 휘날리는 황금빛 투구와 사자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둘렀으며, 올리브 나무로 깎아 만든 거대한 몽둥이와 히드라 독이 발린 화살로 무장했다.
여타 기간테스 종족처럼 무지막지하게 커다랗지는 않았는데, 기껏해야 이안의 세 배 정도 되는 덩치였다. 다만 온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세 자체가 남달랐다.
‘저놈이 우두머리인가?’
‘용감무쌍한’ 헤르쿨레스.
그 존재가 틀림이 없을 터.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겠군.’
다행스럽게도 놈은 이안의 존재를 전혀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한숨 자고 나온 듯 뼈 마디마디를 풀어주는가 싶더니, 이내 개척 작업이 한창인 현장으로 걸어갔다.
‘지금의 내가 이길 수 있을까?’
놈은 분석관보다 상위의 존재.
이후 내려왔던 평의회의 인도자한테도 뒤처지지 않는 지배자다.
그런 존재를 상대로 작금의 이안은 어떻게 대항할 수 있을까?
아니, 버틸 수나 있을까?
“…….”
아무 것도 장담하기 힘든 상황.
생각을 접은 이안이 빠르게 태양풀부터 확보하려는 그 순간이었다.
[쥐새끼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오싹한 음성.
그 주인이 누구인지는 굳이 돌아볼 필요가 없을 만큼 확실했다.
[기어들어왔구나.]
‘용감무쌍한’ 헤르쿨레스.
우뚝 멈춰선 그 존재가 투명화 마법으로 몸을 숨긴 이안의 눈동자를 정확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되도 않는 요술 따윈 집어치우고 모습을 드러내라. 쥐새끼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