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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192화 (19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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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2부 6화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처음 무차원의 공간이라는 곳에 들어갔을 때, 거기 잠들어 있던 드래곤 일족의 수장 리시스 라덴쥬의 정신체를 쓰러뜨리고자 수없이 도전했던 그때 그 시절 말이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나, 그리고 상대방의 수준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다는 점이겠고.’

    그때의 이안과 지금의 이안?

    솔직히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는 이안뿐만 아니라 프란 역시 마찬가진데, 리시스 라덴쥬의 정신체와 작금의 프란은 비교하기 민망할 만큼 차이가 컸다.

    ‘그때와 같은 점이라면 내가 상대보다 약한 채로 시작했다는 점.’

    과거 무차원의 공간에서 리시스 라덴쥬의 정신체와 무한히 싸울 때도, 이곳 내면세계에서 프란 페이지의 파편과 무한히 싸울 때도.

    이안은 상대방보다 약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쿵!

    두 번째 공통점은 바로 이거다.

    프란이 바닥에 무릎을 찧는 소리.

    리시스 라덴쥬의 정신체를 쓰러뜨렸을 때와 사뭇 닮지 않았는가?

    ‘결국에는 내가 이겼다는 점.’

    힘이 풀린 채 주저앉은 프란의 심장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역시 괴물이구나.”

    “언제는 멍청하다더니.”

    “원래 괴물들이 멍청하잖아?”

    프란이 능청스러운 미소와 더불어 꿰뚫린 가슴팍을 회복시켰다.

    이곳은 현실이 아닌 내면세계, 과거 무차원의 공간에서 그랬던 것처럼 무엇이든 가능하다.

    “아무튼 제법 쓸 만해졌어. 적어도 그 거인한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지 않을 만큼은 되겠는데?”

    회복된 가슴팍을 쓱 훑은 프란.

    그가 무엇이든 가능한 내면세계의 힘으로 와인을 만들어 마셨다.

    “한잔할래?”

    “사양하지.”

    “원래 이 주도라는 것도 아비한테 배워야 하는 법이거늘, 이참에 이것까지 배우고 나가는 건 어때?”

    “시끄럽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이안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비록 프란의 장단에 맞춰주긴 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더 높은 경지를 이루어내기 위함이었을 뿐.

    이제 볼일은 끝났다.

    여기서 나가야 한다.

    “원하는 게 뭐야?”

    “그건 이미 얘기했을 텐데? 일단 나가서 그 못생긴 거인부터 죽여.”

    프란이 원하는 것.

    아니, 원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처음부터 단 하나였다. 바로 거인의 기억을 읽는 것, 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특별한 힘의 뿌리를 찾는 것.

    쉽게 말해 ‘호기심 충족’이다.

    “정말 그것뿐이라고?”

    “그럼 또 뭐가 필요하니?”

    “혹시라도 다른 꿍꿍이가 있으면 지금 실토하는 게 좋을 거야.”

    “없어. 몇 번을 말해? 난 이미 죽었다니까? 네 손으로 죽여 놓고 계속 이러는 거, 너무하지 않냐?”

    “내 몸을 차지할 생각이라든지.”

    “아, 물론 그러고야 싶지. 마음이야 참 굴뚝같은데, 지금 내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래도? 네 녀석 말마따나 허상이라고, 허상! 네놈 정신 속에 박혀 있는 허상!”

    답답한지 방금 회복된 가슴팍을 쿵쿵 내려치는 프란 페이지였다.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게 가능했으면 네놈 약해빠졌을 때 진즉 했겠지. 안 그래?”

    “그것도 다른 꿍꿍이가…….”

    “나에 대한 신뢰가 그렇게 없니?”

    “하…….”

    프란의 신뢰 운운에 이안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오던 양반 주제에 무슨 신뢰?

    뻔뻔하기가 하늘을 찌른다.

    “그냥 믿어. 그게 싫으면 더 강해지든가. 내가 무슨 꿍꿍이를 부리든 전혀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프란이 말했다.

    동시에 차원문을 열었다.

    여기서 나가는 출입구였다.

    “그래야 내 호기심 충족하기도 편할 거고, 무엇보다 내 아내와 며느리, 손녀를 지키기도 용이하겠지.”

    “……뭐?”

    툭!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프란이 이안을 현실로 통하는 차원문 너머로 툭 밀어버렸으니까.

    “잘 가라. 나중에 또 보자.”

    얄밉게 손을 흔드는 것은 덤이었으니, 참으로 그다운 작별이었다.

    * * *

    “…….”

    이안이 다시금 눈을 떴을 때.

    주위는 온통 붉은색 천지였다.

    ‘얼마나…… 지난 거지?’

    충격량만큼 가수면 상태에 빠지는 방어막을 펼쳤다. 이후 깨어나니 세상이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

    ‘뭔가 좀 이상한데……?’

    그는 분명 북쪽 성벽 너머로 나와 거인을 상대했다. 이 말인즉 도시가 보일 만한 거리였다는 뜻이다.

    한데 이안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도시는커녕 본디 있어야 할 산과 숲, 마을까지도.

    오직 이안이 기나긴 겨울의 방패 마법을 시전하며 만들어진 얼음덩이만이 산맥처럼 펼쳐져 있을 뿐.

    ‘생명력도 느껴지지 않아. 적어도 황성…… 아니, 황성이 있던 곳 일대에는 아무도 살아있지 않는다.’

    불타오르는 대지.

    흔적 없이 사라진 제국.

    감지되지 않는 인간의 생명력.

    “……!”

    바로 그때였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혀 감지되지 않았던 누군가의 생명력이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느껴졌다.

    ‘내가 놓치고 있었을 리는 없다.’

    문제는 ‘갑자기’ 느껴졌다는 점.

    이는 그 생명력의 주인 또한 갑자기 나타났을 확률이 높다는 뜻.

    ‘텔레포트……?’

    아니, 그럴 리가.

    텔레포트는 8클래스 마법이다.

    현존하는 인류 중 오직 이안 페이지 자신에게만 허락된 주문.

    한데 그걸 다른 이가, 그것도 인간이 사용한다? 말이 되지 않는다.

    ‘전투 중인가?’

    감지되는 건 누군가의 생명력뿐만이 아니었다. 엄청난 양의 마나가 마법으로서 발현되기를 반복했다. 이는 명백한 전투의 양상이다.

    ‘우선 확인부터 해봐야겠군.’

    생명력이 감지된 위치는 이안의 기준에 한하여 그리 멀지 않았다.

    ‘가 볼까.’

    이안은 일부러 텔레포트 주문을 발휘하지 않았다. 거기에 누가 있고 어떤 상황이 펼쳐지고 있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차분히 접근하여 상황부터 살핌이 백번 옳다.

    팟!

    물론 말이 좋아서 차분한 접근이지, 전보다 더욱 강해진 이안 페이지의 비행 속도는 실로 엄청났다.

    ‘남쪽으로 조금만 더.’

    어디를 봐도 불길만 치솟는 세상.

    그가 알던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

    이안이 참담한 심정을 뒤로한 채 생명력과 마나가 느껴지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쾅! 콰앙! 콰과광! 쾅!

    그곳에는 익숙한 거인이 빛줄기를 뿜어대고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익숙한 로브와 지팡이를 든 여인이 거인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하이리……?’

    이안은 순간 그녀를.

    자신의 하나뿐인 아내이자 마법사인 하이리 그린리버를 떠올렸다.

    ‘……아니, 하이리가 아니야.’

    그 여인은 언뜻 보기에 하이리를 많이 닮았다. 생김새도 그렇고, 이안이 물려준 로브와 지팡이로 무장한 마법사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머리색도, 생김새도, 무엇보다 마법의 경지가…… 차원이 다르다.’

    하이리는 그린리버 황실 특유의 빛나는 금발과 금안을 타고났다.

    하지만 저 여인은 달랐다. 밝은 갈색 머리칼과 푸른 눈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마법의 경지 역시 6클래스였던 하이리와는 천지차이였다. 저 여인은 못해도 8클래스.

    어쩌면 그 이상의 마법사다.

    그래, 마치 이안 자신처럼.

    ‘……어?’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

    이안은 문득 저 여인의 정체에 관한 비현실적인 짐작을 떠올렸다.

    ‘설마……?’

    하이리를 닮은 얼굴.

    이안을 닮은 머리와 눈동자.

    결정적으로 이안이 물려준 미첼 그린리버의 로브와 대초원의 지팡이, 그리고 뛰어난 마법적 역량.

    그 모든 것을 종합해 본다면, 그리고 생각보다 기나긴 시간을 겨울 방패 속에서 보냈다고 가정한다면.

    ‘……요하나?’

    요하나.

    요하나 페이지.

    불과 6개월 아기였던 딸아이.

    그 아이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으윽……!”

    바로 그 순간.

    거인의 손아귀가 허공을 누비며 맞서 싸우던 여인을 낚아챘다.

    [??????? ?????? ??]

    “뭐라는 거야? 못생긴 게. 알아듣게 얘기해. 아님 그냥 죽이든가.”

    여인은 거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안은 달랐다. 그는 거인의 말을 알아듣는다. 그리고 그 말속에서 추측이 확신으로 변했다.

    변수를 제외한 중간계의 마지막 벌레. ‘요하나 페이지’를 제거한다.

    이안한테는 그렇게 들렸으니까.

    스팟!

    무언가 거인의 손목을 스쳐 갔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거인도, 요하나도 알지 못했다. 다만 확실한 점은 요하나를 낚아챘던 손목이 잘려나갔다는 점, 그로 하여금 요하나가 자유를 되찾았다는 점이었다.

    서걱!

    이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무언가 거인을 스치고 지나갔으니, 이번에는 다리였다. 거인의 양쪽 무릎 뒤가 깨끗하게 절단되어 하반신을 무너뜨렸다.

    휘오오오오오……!

    그것은 바람이었다.

    물론 평범한 바람은 아니다.

    톱니바퀴 형태로 휘몰아치는 바람이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사그라졌으니, 그 누군가의 정체는 ‘중간계의 변수’ 이안 페이지였다.

    “아, 아버지……?”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이는 쪽은 요하나였다.

    비록 갓난애 시절 헤어진 아버지였으나 얼음 속에 갇혀 있는 모습을 몇 번 봐서 안다. 저 남자는 분명 아버지, 모두가 그토록 기다렸던 이안 페이지임이 분명했다.

    “정말…… 정말로 아버지세요?”

    “……나도 당혹스럽기는 한데, 아마 그럴 거야. 네 이름이 요하나 페이지가 맞는다면 말이지. 그 이름, 내가 직접 지은 이름이거든.”

    자그마치 이십 년이다.

    무려 이십여 년 만의 재회다.

    세상이 평화로웠다면, 지극히 평범한 재회였다면, 으레 하는 것처럼 왜 이제 왔느냐, 많이 기다렸다, 보고 싶었다, 대충 뭐 그런 종류의 말들을 늘어놓았을 터.

    하지만.

    “……그럼 승산이 있네요.”

    “응?”

    요하나 페이지는 달랐다. 그녀의 삶은 단 하루도 평범하지 않았다.

    날마다 투쟁이고 생존이었을 뿐.

    그런 그녀한테 평범한 이들이 나누는 재회 따윈 사치에 불과했다.

    “8클래스마저 뛰어넘은 마법사셨다고 들었어요. 그게 사실인가요?”

    “뭐…… 그야…… 그렇긴 한데.”

    “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저 혼자서는 역부족이고, 그래서 이제 끝낼까 했지만…… 아버지가 도와주신다면 가능할지도 모르니까요.”

    삶이 곧 투쟁과 생존이었던 여인.

    요하나 페이지가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 끝으로 거인을 가리켰다.

    놈은 이미 이안에게 당한 상처를 모조리 회복한 상태였다.

    “저 거인을, 저한테서 모든 걸 앗아간 저 거인을 심판하는 일이요.”

    가족, 친구, 동료, 터전.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앗아간 저 괴물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것.

    그 목소리에서 이안은 스무 살이 된 딸의 고난과 울분을 느꼈다.

    “…….”

    무어라 대답해 주면 좋을까?

    뒤늦게 나타난 아버지로서.

    지켜주지 못한 보호자로서.

    찰나의 고민 끝에 손을 뻗은 이안이 요하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늦어서 미안하구나. 요하나.”

    자그마치 이십여 년 만에.

    아니, 사실상 처음 느껴보는 아버지의 손길에 요하나가 움찔했다.

    “네가 원하는 걸 해줄 테니, 남은 얘기는 조금 있다가 나누자꾸나.”

    하지만 그 움찔거림도 잠시,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는 요하나였다.

    “그럼.”

    이안이 걸음을 옮겼다.

    거인을 향한 발걸음이었다.

    [중간계의 변수여. 못 본 사이 손상의 정도가 심각해졌군. 이제 더는 방치할 수 없을 만큼…….]

    “야, 너.”

    꽈득, 꽈득, 콰드드드득!

    빙뇌의 창, 브류나크.

    본디 한 자루 빚어내는 게 전부였던 그 궁극의 마법이 이번에는 수십 자루가 동시에 만들어졌다.

    “일단 좀 맞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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