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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174화
68. 마지막 매듭 (3)
덩치 큰 대머리 병사 하나가 우렁차게 다짐했다. 그는 좀비 무리에게 몇 번이고 물어뜯길 위기를 맞이했으나, 전부 황태자의 기묘한 지팡이로부터 발사된 매직 미사일 덕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전하!”
“영광, 또 영광이었습니다.”
한 무리가 몰려와 황태자 하이든에게 무릎을 꿇자, 그 광경을 보며 눈치만 살피던 병사들도 하나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부상 탓에 끼어들 수 없는 이들만 제외한다면 거의 모든 생존자들이 몰려왔다.
“…….”
황태자가 눈을 껌뻑거렸다.
이런 기분, 생전 처음 느껴봤다.
도대체 이 기분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흥분? 쾌감? 만족감?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군림하는 환상적인 느낌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마찬가지였다. 감히 정의할 만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좋다. 정말 좋다. 귀족들을 골탕먹이던 시절보다도, 온갖 술과 음식으로 밤을 지새우던 나날보다도, 그 어느 때보다도.’
방황 속을 거닐던 과거.
열등감과 분노로 가득했던 시절.
그 넘쳐나는 화를 식히고자 선택해왔던 기행, 그로부터 얻었던 만족감 따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내가 왜 그렇게 살았을까, 그런 후회가 들 정도로 기쁘구나.’
무릇 사내로서, 그리고 일국의 지도자로서 누려야 할 만족감과 쾌감이 한계를 모른 채 몰려왔다.
“그대들이 왜…….”
이윽고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한참을 고민했다.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그 고민의 결과였다.
“왜, 그대들이 영광스러운가?”
그 첫마디는 다소 새로웠다.
듣기에 의문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황태자는 멈추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몽땅 쏟아냈다.
“어째서 나와 함께한 것이 평생의 은혜란 말인가? 그 말은 내가, 이 제국과 대륙 모두가 그대들에게 올려도 부족한 말일지언데.”
황태자의 말에 모여들었던 병사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황태자는커녕 황제에게조차도 저런 말을 듣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터. 그것이 높은 곳에 군림하며 아래를 내려다보는 상전의 덕목이니까.
“손가락질만 받았던 얼간이 황태자, 그 보잘것없는 놈과 목숨 걸고 싸워준 그대들이야말로 나에게는 평생의 은혜이자 영광이다.”
하지만 황태자는 달랐다. 그의 말은 단언컨대 진심이었다. 열등감으로 몸부림쳤던 나날들. 그 허투루 보낸 세월이 송구스러울 정도로 은혜로웠으며, 또 영광스러웠다.
“고맙다. 진심으로. 나 같은 얼간이와 함께 싸워줘서, 나 같은 얼간이를 믿어줘서, 나 같은 얼간이에게 충성을 맹세해줘서…….”
갑작스레 눈물이 흘렀다.
황태자의 눈으로부터 말이다.
“저, 전하?”
“어찌 그러십니까?”
“저희가 무슨 실수라도…….”
모두를 당황케 한 눈물에는 참으로 다양한 감정과 회한이 담겨 있었다.
후회, 쾌감, 행복.
하지만 그중에서도 ‘후련함’이란 감정이 컸다. 바로 오늘, 동부 대초원의 전투가 있기 전까지만 해도 전부 다 떨쳐낼 수 없었던 열등감, 그 응어리진 열등감을 마침내 벗어던진 ‘후련함’ 말이다.
<우와앙! 벌써 다 끝났네!>
어색한 기류가 그린리버 제국 진영 내에 감도는 그때였다.
“……?”
누군가의, 많아 봐야 10대 초반 정도로 들리는 소년의 쾌활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고성능 증폭구로 한껏 커져버린 목소리였다.
<우웩! 저게 다 후손님께서 말씀하신 좀비인가? 힝, 무서워…….>
방금만 해도 목숨이 오갔던 전장. 그 일대를 깨우기 시작한 소리. 밝고 명랑한 소년의 음성이 증폭구를 타고 사방으로 뻗어 갔다.
<그래도 참아야지. 따지고 보면 불쌍한 사람들, 그리고 몬스터들이니까……. 참!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이안 님께서 보낸 사람인데요! 뒤처리를 도와드리라고 하시더라고요. 음, 이 친구들 아시죠?>
명랑한 목소리의 주인. 그는 바로 조각의 장인 클레반이었다. 녀석은 과거 그린리버디움 복구공사 당시 투입했던 작업용 조각상 ‘불끈이’ 수백 기와 함께 포탈을 넘어오고 있었는데, 그 자태가 참으로 위풍당당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더더욱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았다.
<많이 지치셨을 테니까, 뒤처리는 저희들이 도와드리기로 했어요! 후손 이안 님께서 그러시는데, 언데드의 시신은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게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클레반은 이안의 부탁에 따라, 대초원의 뒷수습을 위해 투입된 장인이었다. 가장 적절하기도 했다.
<그래서! 저와 불끈이들이 달려왔답니다. 하핫, 다들 반가워요!>
그 정신없는 등장에 그린리버 진영 측은 물론, 로 공국과 콜드우드 제국 소속의 토벌대조차 어안이 벙벙했다.
심지어 불끈이들의 압도적인 덩치가 위압감마저 내뿜었다.
‘저런 게 있었으면…….’
동시에 모두가 떠올린 생각. 국적, 나이, 직책, 성별마저 초월한 채 모두가 떠올린 단 하나의 의문.
‘진즉에 쓰지 않고, 왜?’
저 육중한 불끈이들이 전투에 참가했다면? 보다 수월하게 풀어나가지 않았을까? 그러한 의문이 토벌군 전체를 강타했다.
<아아!>
그 기류를 읽기라도 한 걸까?
클레반이 손뼉을 탁 치며 말했다.
<불끈이들은 싸움을 못해요! 진짜로요. 평화주의자거든요. 채식만 하기도 하고요. 큰 덩치만 보고 오해하시면 안 돼요! 다들 아셨죠?>
이안 앞에서도 한차례 펼쳤던 설정 놀이, 그 놀이를 삼국 토벌대에게 마음껏 펼친 클레반이 불끈이들을 통솔했다.
대초원 바닥에 널브러진 좀비의 시체들, 그리고 본 드래곤의 뼈를 한곳으로 가지런히 모았고, 삼국 마법사들과 협력하여 몽땅 불태우기에 이르렀다. 물론 억울하게 희생된 생명을 기리는 애도의 표현도 빼먹지 않았다.
<아이쿠, 냄새야!>
장대했던 대토벌은 명랑함으로 똘똘 뭉친 클레반과, 자칭 ‘평화주의 조각상’ 불끈이들의 등장과 활약으로 순식간에 마무리되어 갔다.
* * *
주어진 임무를 완수한 삼국 토벌대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포탈이 존재하기에 서로의 국가로, 자신들의 영지로, 준비된 치료 시설로 수월하게 돌아갈 수 있었다. 황태자 역시 약간의 휴식만 취한 뒤, 곧장 황제를 알현하여 토벌의 대략적인 정황과 성과를 보고했다.
“더는 잘했다느니 장하다느니 그렇게 어린아이 다루듯 칭찬하지 않으마. 일국의 황태자이자 짐의 후계로서 당연한 업무를 수행한 것이니까.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황제 테리 그린리버가 말했다. 그는 이제 황태자 하이든 그린리버를 과거의 얼간이처럼 다루지 않았다. 오직 어엿한 황태자로서, 훌륭한 후계자로서 대접해줬다.
“물론이옵니다. 마땅히 그럴 일이지요. 황은이 망극하나이다. 폐하.”
“녀석, 그렇다고 폐하는.”
한평생 아바마마란 호칭으로 일관했던 황태자 아니겠는가?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래. 상아탑주에게 소식은?”
“송구하오나, 소자도 아직 들은 바가 없사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상아탑주의 저택에 찾아갈 계획이온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허락이랄 것이 있겠느냐? 편할 대로 다녀오너라. 무언가 소식이 있다면 꼭 아비에게 기별해주고.”
“그리하겠사옵니다. 폐하.”
“……그냥 평소대로 부르는 게 어떠하겠느냐? 어른스러워진 건 좋다만, 막상 들으려니까 좀.”
직전까지가 황제로서의 뜻이었다면, 지금부터는 평범한 아버지로서 바라는 점이었다.
장남이지만 막내 같은 황태자마저 어른스럽게 변하고자 하니, 영 아쉬운 모양새였다.
“폐하, 옛말에 말이지요. 있을 때 잘하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평범한 아버지가 된 황제.
황태자 역시 장단을 맞췄다.
“폐하의 그 철없던 아들. 얼간이 하이든 그린리버가 그리우시겠지만, 있을 때 잘하셨어야지요.”
“뭐?”
황태자의 재치 있는 응수에 기막힌 듯 되물었던 황제 테리 그린리버. 그가 곧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녀석, 이제 내 앞에서 말장난도 할 줄 알게 되었구먼?”
“저주받은 드래곤조차 단칼에 베는 검공을 호위기사로 두었으며, 말해봐야 입만 아픈 대마법사, 상아탑주마저 친우로 두었습니다. 세상 두려울 게 어디 있겠습니까?”
“하하! 오냐, 그렇겠지. 무릇 지도자에게 가장 우선시되는 덕목이란 개인의 능력도, 타고난 혈통도 아닌 ‘운’이라고 하더군. 특히나 인재를 얻는 ‘인복’ 말이지. 아마 그 분야에 한해서는 태자, 네가 대륙역사상 최고일 게다. 하하하하!”
한바탕 웃음과 농담으로 마무리된 알현, 황태자는 이내 길을 나섰다. 푹 쉴 법도 하나, 예정대로 이안의 저택부터 방문할 참이었다.
“소신이 모시겠습니다! 전하!”
황태자의 호위는 부단장 폴이 도맡았다.
그 또한 지칠 만큼 지쳐 방전의 수준에 이르렀으나, 어쩌겠는가? 그 상관이자 첫 번째 호위기사 올리버는 이미 방전의 수준을 넘어 기절해버렸으니 말이다.
“자네도 그만 푹 쉬지 그러나? 병사 몇 명만 함께 가면 되는데.”
“아니 될 말씀이시옵니다. 황실의 기사가 쉴 수 있는 순간은 오직 심장에 칼이 꽂혔을 때, 기사로서 숨을 다하는 그 순간뿐이옵니다.”
부단장 폴이 짐짓 근엄한 어조로 읊조렸다. 평소에도 기사로서 자부심이 대단한 인물이니 만큼, 그 행실과 언행도 기사 그 자체였다.
“그래?”
“그렇사옵니다. 전하.”
어느덧 황궁을 빠져나온 황태자와 폴, 그리고 몇몇 기사들까지. 그 발걸음이 계속해서 상아탑주 이안 페이지의 저택으로 향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부단장 폴의 근사한 발언을 곰곰이 생각해봤던 황태자. 슬슬 그의 장난기가 발동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야. 부단장.”
“하명하시옵소서.”
“올리버는 멀쩡히 살아 있는데?”
“……예?”
“심장에 칼도 안 꽂혔고, 죽지도 않았어. 그냥 좀 무리해서 쉬고 있는 거지. 그럼 올리버는, 자네의 상관은 사실 기사가 아닌 건가?”
“헙……!”
순간 부단장 폴의 숨통이 턱하고 막혔다.
자부심 한번 부렸다가 허를 찔려 버렸다. 요즘 너무 어른스러워진 탓에 잊고 있었다. 황태자 특유의 짓궂음을 말이다.
“소, 소신의 말은 그런 것이 아니옵고. 단지 황실의 기사로서…….”
“아, 올리버는 황실의 기사도 아니다? 그냥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칼 찬 나부랭이일 뿐이다? 이거 올리버가 꽤 솔깃할 얘기로군.”
“저, 전하……!”
부단장 폴을 놀려먹는 재미가 쏠쏠한 그때, 도시에는 대대적인 연회가 베풀어지고 있었다. 수도 그린리버디움 뿐만 아니라 제국 전체가 연회로 밤을 지새웠다. 성공적인 토벌을 기념하는 연회였다.
“부단장, 자네도 저기 껴서 한잔하지 그래? 아, 술을 싫어했던가?”
“전하, 기사에게 술이란 맹물에 불과할 뿐이옵니다. 마셔도 취기가 오르기는커녕 멀쩡하기만 하니, 어찌 즐길 수가 있겠사옵니까?”
제 가슴을 탕탕 치는 부단장 폴.
그새를 못 참고 허세를 부린다.
“올리버는 잘 취하던데.”
“…….”
“주정도 부릴 줄 알고.”
“…….”
“이거 아무래도 검공이란 칭호를 폴, 그대에게 넘겨줘야겠어.”
“전하…….”
“하하핫!”
역시 놀림감 중 으뜸은 기사.
그 중에도 부단장 폴이 최고였다.
“벌써 다 왔군.”
만족스럽게 혀를 놀렸던 황태자.
그의 발걸음이 일순간 멈췄다.
따르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상아탑주, 이안의 저택.
그 앞에 도착했으니까.
‘아직 이안은 없겠지만…….’
이안이 돌아왔다면 진즉에 황제를, 그리고 황태자 자신을 찾아왔을 터. 한데도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무언가 소식이 있을까싶은 마음 반, 직접 이안을 기다리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저, 전하께서 어연 일로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기별이라도 해주셨다면 준비를 했을 터인데…….”
황태자의 방문에 급히 달려 나온 래디오와 더글라스, 그리고 베네사였다. 드래곤 레어로 피난을 떠났던 그들이 어느덧 돌아와 있었다.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이안에게는, 아직 소식이 없느냐?”
황태자가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그…….”
하나 돌아오는 대답, 그리고 이안 일가의 표정은 크게 밝지만도 않았다. 오히려 어두운 편에 속했다.
“그것이…….”
잠시간 침묵했던 래디오.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전하, 송구하오나 잠시, 잠시만 이쪽으로 와주시겠습니까?”
“음? 아, 그러도록 하지.”
황태자가 의구심 어린 눈빛으로 래디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2층에 자리한 이안의 침실, 어째서 여기까지 온 걸까?
“지금 이안 님께서는 이 문 너머에서 곤히 주무시고 계십니다.”
“뭐? 이안이 벌써 돌아왔단 말이냐? 한데 왜 아무런 기별도…….”
말끝을 늘어뜨린 황태자.
불안한 느낌이 불쑥 들었다.
‘서, 설마…….’
황태자가 급히 문을 열었다. 래디오의 언급처럼, 침실에는 이안 페이지의 모습이 보였다. 새하얀 침대 위로 가지런하게 누워 있었다.
“……!”
그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황태자였다. 꼼짝없이 죽은 줄로 알았으니까. 하지만 가까이서 확인해본 결과, 이안은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혈색도 나쁘지 않았다.
“이안 님께서는…….”
뒤따라 침실로 들어온 래디오.
그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