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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173화 (173/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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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173화

    68. 마지막 매듭 (2)

    [그대는…….]

    이안의 첫 번째 행선지는 바로 보랏빛 무차원의 공간, 프란 페이지의 봉인지이자 드래곤 일족의 임시 영토였다.

    프란이 소멸함과 동시에 펼쳐졌던 방해 마법도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드래곤 일족은 바깥세상으로 빠져나오지 않았다. 이안이 승리했음을 짐작했고, 곧 찾아올 거라 여겼으니까.

    [엄청난 존재가 되었구나.]

    수장 리시스 라덴쥬가 이안의 변화를 단번에 알아봤다. 과연 ‘엄청난 존재’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더는 견제의 대상조차 될 수 없겠군. 그대가 마음먹기에 따라 우리 일족은 세상에서 영영 지워질 수도, 생존할 수도 있을 터이니.]

    리시스 라덴쥬의 말에 생존한 드래곤 일족 구성원들이 술렁거렸다.

    이전까지의 이안만 해도 충분히 강력한 존재였거늘, 이제는 그마저도 초월해버렸다는 걸까? 도무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안도 순순히 그 벌어진 힘의 격차를 인정했다. 명백한 사실이었다. 지금 이안에게 드래곤 일족이란 여흥 거리조차 되지 않을 터.

    “본의 아니게 상황이 편해지기도 했죠. 더 이상 일족 여러분을 경계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이 마당에 무슨 수작을 부릴 수 있겠습니까?”

    이안의 말은 다소 건방졌다. 자신이 이만큼 강해졌는데, 감히 드래곤 일족 따위가 중상모략을 꾸밀 수 있겠느냐는 뜻이었으니까.

    [진실이 더 아픈 법이라더니, 정말이로군. 인정할 수밖에 없겠어.]

    그러나 리시스 라덴쥬는 조금도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답지 않은 너스레와 함께 넘어갔다.

    [해서, 프란 페이지. 그 존재의 마지막은 어떠했지? 끝내 타락한 영혼에서 해방되지 못했는가?]

    “적어도, 마지막 순간만큼은.”

    리시스 라덴쥬의 물음에 이안이 대답했다. 크게 침통하지도, 그렇다고 후련하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편해 보였습니다.”

    [그런가…….]

    그 대답에 리시스 라덴쥬가 옛 추억을 떠올렸다. 따지고 보면 이곳 누구보다도 프란 페이지와 가까웠던 인물 아니겠는가?

    뜻을 함께하는 스승과 제자로서 많은 교류가 존재했을 것이니 말이다.

    [좋은 곳으로 갈 수는 없겠지. 홀로 짊어진 무게만큼, 악행도 확실하게 저질렀던 존재이니…….]

    “쉴 수 있는 게 어디겠습니까.”

    [확실히, 그 존재는 너무 오랫동안 달려왔어. 깨끗한 비단길이든, 울퉁불퉁한 자갈밭이든, 일단 앉아서 쉬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겠군.]

    수천 년 만에 소멸을 맞이한 존재, 프란 페이지를 가슴 속으로 묻은 리시스 라덴쥬가 이안을 바라봤다. 지금부터는 보다 현실적인 문제에 두 발을 들이밀 순서였다.

    [그대는 이제 어찌할 요량이지?]

    “무엇을 말입니까?”

    [모르는 척하지 말게. 그대의 궁극적인 목표가 프란 페이지, 그리고 우리 일족 모두의 소멸임을 모르는 바 아니니까. 나는 지금 그 생각이 여전하냐는 물음을 건네고 있는 것이라네. 이전까지야 부족한 힘에 어쩔 도리가 없었겠다만, 지금은 충분하지 않던가?]

    리시스 라덴쥬의 말이 옳았다. 본디 이안은 프란 페이지와 드래곤 일족, 양측 모두가 사라지는 것을 진정한 평화라고 여겼다. 하지만 9클래스를 넘어선 0클래스. 즉 ‘제로 클래스’라고 명명한 경지에 오르기 전까지는 사실상 이룰 수 없는 목표였기에, 조금이라도 더 나은 쪽과 동맹을 맺었던 거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혼자의 힘으로 프란 페이지와 드래곤 일족, 양측 모두를 눈앞에서 치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리시스 라덴쥬의 물음은 바로 그러한 배경을 가졌다.

    “방금 전에도 말했습니다만.”

    이안이 그 물음에 대답을 내놓기 시작했다. 드래곤 일족과 대면한 이래 가장 안정된 목소리였다.

    “상황이 편해졌습니다. 굳이 피를 보고 싶진 않네요. 심지어 따지고 보면, 여러분이 제 삶에 끼어든 적도 없고 말이죠. 전부 다 프란, 그자의 계략이었을 뿐이니까.”

    이안은 드래곤 일족을 향했던 경계와 의심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워졌다.

    여차여차 많은 까닭이 존재했으나, 가장 근본적인 이유로는 ‘강력한 힘’을 얻어낸 덕분이었다.

    “페어리의 여왕님과 드래고니안 일가 분들의 얼굴을 봐서라도, 잠깐이나마 함께 싸웠던 순간을 생각해서라도, 저희의 동맹은 당분간 유효한 것으로 하겠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혓바닥을 놀릴 필요나 있겠습니까?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이렇게 된 마당에 말입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안이 마음만 독하게 먹었다면, 이 보랏빛 무차원의 공간으로 돌아온 순간 일족 전체를 멸종시켰으리라.

    [적어도, 우리 일족이 먼저 그대가 제안한 동맹을 파기하는 경우란 존재하지 않을 걸세. 칼자루는 전적으로 그대 손에 쥐어졌으니.]

    “그야 뭐, 두고 볼 일이겠죠. 부디 진심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거짓이 아니다.]

    “허면 다행이고요.”

    어깨를 으쓱거린 이안, 그가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가장 먼저 드래곤을 찾아온 본론이기도 했다.

    “그래서 말인데, 저는 당분간 이 세상, 그러니까 이 차원을 비우고 다른 차원에 머물 예정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프란 페이지가 무분별하게 분열시킨 차원을 수습하고자 합니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돌아와서 드리겠습니다만, 일단 알고는 계시라고요. 일종의 경고이기도 하죠.”

    간단한 의미였다. 볼일 좀 보고 올 생각인데, 괜히 허튼수작 부리지 마라. 그런 의미 아니겠는가?

    [허어, 차원을 넘나드는 진리조차 깨우친 모양이로군.]

    “언제든지, 어떠한 형태로든 돌아올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 가진 힘 그대로 말이지요.”

    쉽게 말해서, 허튼수작을 부릴 경우 언제든 돌아와 응징할 수 있다, 그런 뜻이었다. 듣는 귀에 따라 협박처럼 들릴 수도 있을 터.

    “그 당부를 드리고자 제일 먼저 찾아온 겁니다.”

    한동안 자리를 비워야 하는 일이니만큼, 이안 자신과 드래곤 일족 간의 관계를 확고히 정립해둘 필요가 있었다. 바로 그래서였다.

    [우리는 무모하지 않다. 오랜 시간 봉인을 유지하며 지칠 대로 지치기도 했지. 그저 오늘의 싸움으로 잃어버린 동족, 그리고 프란 페이지를 봉인하는 과정에서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동족들의 유해를 수습할 생각일 뿐이네. 너무 많이 늦었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까.]

    리시스 라덴쥬가 말했다. 단지 말 뿐이었으나, 여러 정황을 고려해볼 때 신뢰성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좋습니다. 오래간만에 만끽하실 자유, 마음껏 누리시길 바랍니다. 단, 인간이 이룩한 문명에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말이지요.”

    [물론. 애당초 우리는 인간들의 문명에 해를 끼친 적이 없다. 그래서 프란 페이지와 대립했던 것이니까. 그대도 잘 알고 있지 않던가?]

    “그건 그렇긴 합니다만.”

    이안은 드래곤 일족에게 자유를 줬다. 계속 가두는 수도 있겠으나, 굳이 그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럼 나중에 뵙죠.”

    이안이 손을 흔드는 그때, 무리 틈에 섞여 이안과 리시스 라덴쥬의 대화를 지켜보던 젊은 용, 헤르파이 도토스가 이안에게 다가왔다.

    [인간. 아, 아니. 동맹이시여.]

    “음?”

    [자, 잠시 내 말을 들어주시오.]

    “뭡니까?”

    이안의 물음에 젊은 용 헤르파이 도토스가 그 육중한 몸뚱이를 움찔거렸다. 말투마저 한층 공손해졌다. 복잡 미묘한 표정도 일품이었다. 대체 전하고 싶은 말이 뭘까?

    [고…….]

    “고?”

    [고, 고맙소.]

    젊은 용 헤르파이 도토스가 전하고 싶은 말은 바로 ‘감사의 인사’였다. 프란 페이지의 공격으로부터 목숨을 구명해준 고마움 말이다.

    “뭐가 고맙다는 겁니까?”

    [그, 그것은…….]

    “생각이 잘 안 나는데, 자세한 설명 좀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그게…….]

    사실 이안이라고 감사의 까닭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저 장난이나 걸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저 자존심 대단했던 드래곤이 지금은 귀엽게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농담입니다. 앞으로는 인간이라고 무시만 하지 마시고요.”

    [무, 무시라니. 나는 단지…….]

    젊은 용 헤르파이 도토스가 말끝을 흐렸다. 자신의 건방졌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 탓이었다.

    [……미안하오. 내가 너무 어리석어 동맹께 큰 실례를 범했었소.]

    “사과받자고 꺼낸 말은 아닌데, 아무튼 미안하다니 잘 받겠습니다. 피차 앞으로 조심하면 되겠죠.”

    이안이 피식 웃으며 읊조렸다. 젊은 용 헤르파이 도토스의 육중한 바라락을 툭툭 쳐주기도 했다. 실로 완벽한 ‘윗사람’의 자태였다.

    “수습을 끝내고 돌아오거든, 종종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안의 인사.

    그리고 사라질 때까지.

    모든 일족이 긴 목을 숙였다.

    일족에게 자유를 선사해 준 존재.

    그 인간을 향한 경의의 표시였다.

    * * *

    “허억! 헉! 후우우……!”

    동부 대초원의 격전지.

    삼국토벌대, 그린리버 진영.

    그 수많은 호흡소리 가운데.

    “이긴 건가. 우리가……?”

    붐 스틱을 손에 쥔 미청년, 황태자 ‘하이든 그린리버’가 힘겹게 읊조렸다. 체력과 정신력을 몽땅 쏟아내지 않았던가? 안도감과 함께 휘청거리는 육신이 그 증거였다.

    “정말, 정말로…….”

    그가 어렵사리 버티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 나직한 읊조림처럼, 더 이상 대초원의 땅덩이 위로 살아 움직이는 좀비란 목격되지 않았다. 단 한 마리도 남김없이 널브러져 꼼짝도 할 수 없었으니까.

    “단장……, 아니, 부단장. 거기 있나? 아직 살아있기는 하겠지?”

    황태자의 중얼거림에.

    “부단장 폴, 여기 있사옵니다.”

    제2 황실기사단의 부단장이자, 단장 올리버가 후방으로 물러난 지금 황태자의 첫 번째 호위기사인 기사 ‘폴’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하명하시옵소서. 전하.”

    폴 역시 지칠 대로 지쳐 보였다. 그럼에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면모를 뽐냈다. 과연 올리버가 아끼는 수하다웠다.

    “부단장도 힘들 텐데 미안하지만, 쉴 틈이 없겠어. 지금부터는 부상자를 얼마나 빠르게 치료시설로 후송하느냐, 그 싸움이니까.”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준비된 작전에 따라, 모든 부상자를 적절하고 재빠르게 인도할 수 있도록 전력을 기울이겠나이다.”

    폴의 대답에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아가 품속으로부터 통신구 하나를 꺼내 폴한테 건넸다.

    “이건 후방, 그러니까 상아탑의 마법사 쪽과 연결된 통신구야. 그들과 협력하여 속히 통솔하도록.”

    황태자는 부상자 후송 및 치료와 관련된 지휘권을 부단장 폴에게 넘겼다. 결코 무책임한 떠넘김이 아니었다. 황태자 자신보다 훨씬 더 경험이 많으며,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는 인재였으니까.

    “명을 받드옵니다. 전하.”

    “어서, 어서 가봐.”

    “하오시면.”

    “음.”

    달려가는 부단장 폴을 지켜본 황태자, 그가 다시금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더는 버티고 서있을 힘조차 없었다. 근성도 마찬가지였다.

    ‘더 움직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적절한 인재에게 적절한 임무를 맡겼으니 되었다만, 그래도 황태자 하이든은 아쉬움이 남았다.

    ‘아직은 욕심일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할 수 있는 일만 해내자. 그것이 지난 몇 년간 황태자가 되새기고 또 되새겼던 다짐이었다.

    한데 막상 그 너머에 닿을 것 같으니 욕심도 생겼다. 더 완벽하게, 흡사 아바마마처럼 모든 문제에 관여하고 싶었다.

    “후우.”

    대초원의 흙바닥은 푹신했다.

    왠지 모를 포근함마저 느껴졌다.

    육신과 오감을 지배했던 긴장감.

    그 긴장감이 눈 녹듯 녹아들었다.

    “이안은…….”

    팽팽한 긴장감이 해소되자.

    곧장 그 생각부터 들었다.

    “성공했을까?”

    이 모든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겠다며 나섰던 이안 페이지, 그 위대한 마법사이자 둘도 없는 친우가 걱정되는 황태자였다.

    “……내가 무슨 걱정을, 당연히 성공했겠지. 그 녀석이 누군데.”

    하지만 그 걱정도 잠시.

    황태자가 고개를 저었다.

    이안 페이지가 누구던가?

    곧 완벽한 모습으로 나타나 사태의 종결을 널리 천명해줄 터.

    “멈춰라. 저분께서는 전하시다.”

    “압니다. 앞장서 저희 같은 것들과 함께 해주신 전하를 어찌 몰라 뵙겠습니까? 단지 한 번이라도 가까이서 뵙고 싶은 마음에…….”

    황태자의 생각이 갈무리되는 그 순간이었다.

    주변으로부터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바로 사방에 포진되어 황태자를 지키는 기사들과 토벌대 병사들의 목소리였다.

    “나는 괜찮으니.”

    그 광경에 황태자가 말했다.

    옅은 미소도 함께였다.

    “오게 두어라.”

    “하, 하오나…….”

    “괜찮대도.”

    황태자의 명이 떨어졌다. 제2 황실기사단 전체가 한 걸음씩 물러났고, 함께 싸운 병사들이 황태자 하이든의 근처로 우르르 몰려왔다.

    “그래, 전할 말이라도 있느냐?”

    황태자가 묻자, 잠시 눈치를 살피던 병사들이 넙죽 엎드렸다. 뿐만 아니라 하나둘 목소리도 내기 시작했다.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전하! 저희 같은 놈들과 함께 싸워주셔서 영광이었습니다! 하물며 그 신비로운 지팡이로 목숨까지 구명을 해주셨으니, 이놈들은 평생의 은혜로 여기며 제국과 전하께 충성을 다할 것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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