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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167화
65. 자아각성(2)
[기꺼이 내 목숨을 내놓겠다.]
[한 번만 그분들을 믿어다오.]
[인간, 이안 페이지.]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장면과 목소리의 끝은 고요였다. 파티 참석자들의 소곤거림 물론, 페어리 퀸을 두고 나누는 황제와 영주의 대화조차 들리지 않았으니까.
“나, 나는…….”
그 고요함 속에서 수많은 기억이 되살아났다.
처음에는 영문조차 모를 정도로 조각조각 흐트러졌던 기억의 조각들이, 점차 한곳으로 모여 완연한 형체를 이루었다.
‘나는 이안, 이안 페이지. 30년이란 세월을 거슬러 올라왔던 마법사. 시간을 되돌리기 전보다 훨씬 더 빠른 성장을 이루었으며, 온갖 인외의 존재와 얽혀버렸다.’
덧그려진 기억 아래 감춰졌던 또 다른 기억, 그 기억이 수면 위를 뚫고 올라왔다.
한번 올라오기 시작한 기억은 마치 기름 위 떨어진 불씨처럼 빠른 속도로 만개했다.
‘종국에는 내 아버지이자 미쳐버린 존재, 내와 주변이 겪었던 모든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 프란 페이지를 제거하기 위하여 드래곤 일족과 손을 잡았다. 분명 두통이 느껴지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감당키가 힘들 정도의 혼란스러움이 이안을 괴롭혔다.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온 두 명의 이안 페이지, 그 모든 기억이 정돈되지 않은 채 강압적으로 합쳐지는 과정 아니겠는가?
조금만 어긋나더라도 미쳐 버릴 터. 이안이 재빨리 마나 호흡부터 시작했다. 파티장 내 참석자들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았다.
“후우우우……!”
마침내 두 기억이 조금씩 정돈되기에 이르렀다. 시간 회귀자로서 프란의 가장 완벽한 사념체로 선택받았던 이안, 그리고 프란의 기준으로는 실패작이나 분열된 차원 그 어떤 이안보다도 긍정적이며 순탄한 삶을 살았던 이안. 두 존재의 삶과 기억이 말이다.
“…….”
마침내 모든 혼란이 잠들었다. 동시에 깨달았다. 프란 페이지, 그자는 이안에게 선물을 준 거다. 아니, 선물이란 ‘착각’에 빠져 있으리라.
‘프란, 당신은 실수를 저질렀어.’
그 거악이 저지른 단 하나의 실수란 바로 ‘이안 페이지’ 그 자체였다.
뜬금없이 무슨 뜻이냐고? 간단한 논리다. 놈은 자신이 선택한 차원의 사념에게 너무 많은 것을 줬다.
‘무려 두 번의 삶을 살았고, 주변에 지켜야할 것들이 생겼으며, 인외의 권능마저 손아귀에 넣었다. 그 이안 페이지는 더 이상 당신의 사념 따위가 아니야.’
그렇다. 일개 사념체라기엔 너무 많은 것을 가졌다. 고작 기억과 환경의 변화 따위로는 억제하기 힘든 ‘자아’가, 사념으로서의 완벽함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자아가 이안의 영혼에 각인되어 버린 거다.
‘돌아간다.’
물론 뚜렷한 방법은 알지 못했으나 불가능할 것도 없었다. 프란 페이지가 저지른 짓이라면 이안도 충분히 가능할 거다.
특히나 ‘언어의 힘’까지 모두 기억해낸 이상, 이안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으리라.
‘아마 이 세상의 나는 심상 세계에 잠들어있겠지. 빠져나가 주면 알아서 육신의 주도권을 되찾을까?’
지금으로선 알기 힘든 일,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설령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본래의 세상, 즉 프란 페이지와 관련된 모든 문제부터 마무리 지은 뒤 해결해야 할 터,
‘일단.’
이안이 급히 주변을 살폈다. 과도하게 펼쳤던 마나 호흡 때문일까? 어느덧 파티장 내 모든 참석자의 이목이 이안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
어찌될지 모른다. 이 세상의 이안, 그 육신의 안전을 부탁해둘 자가 필요할 텐데.
“라그나르.”
이안의 선택은 라그나르였다. 가장 가까울뿐더러 왠지 모를 씁쓸함에 이끌린 탓이었다.
비록 본래의 세상에선 죽고 죽이는 원수였고,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썩 유쾌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 세상에서만큼은 둘도 없는 죽마고우인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하기야, 첫 번째 삶에서도 그랬지. 그때는 둘도 없는 친우였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씁쓸히 웃었던 이안, 그런 그에게 이 세계의 라그나르가 물었다.
“역시 몸에 문제가 있는 게지? 그런 게지? 대답해 보게나. 어서!”
“라그나르, 잘 듣게. 조만간 내가 쓰러질 수도 있어.”
“가, 갑자기 무슨 말을…….”
“물론 곧 깨어날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이 몸을, 나를 잘 부탁하네. 아! 그리고…… 저 페어리들 말이지.”
“페어리?”
“풀어줘.”
“……?”
“리시스 라덴쥬라는 이름을 언급하면 보복하지도 않을 거야. 그러니까 모든 것을 사과하고, 보석도 두둑하게 내어주고. 그렇게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 주게. 반드시 그래야만 하네. 내 말 알겠나?”
“그, 그건 형님께 상의를 드려보겠네만, 정말 왜 이러는 겐가? 도대체 무슨 문제가…….”
“그럼 나중에 보자고.”
이안이 라그나르의 어깨를 툭툭 털어줬다. 나아가 허공에 대고 언어의 힘을 발동시켰다.
(언령이여. 이 세상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다. 그러니 나를 마땅히 존재해야 할 위치로, 본디 내가 소속된 세상으로 돌려보내다오.)
흡사 누군가에 대한 부탁처럼 느껴지는 몇 마디 읊조림이 언어의 힘으로 하여금 주문이 되었고, 권능으로서 화하기에 이르렀다.
(마저 끝내야 할 일이 있으니.)
그 한마디.
언어의 힘으로 빚어진 주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텔레포트의 빛줄기보다 수천 배는 더 강렬한 빛기둥이 하늘을 뚫고 벼락 치듯 떨어졌다. 표적은 명백한 이안 페이지, 그 중년인의 내면에서 가장 이질적인 영혼이었다.
* * *
콰아아아앙-!
프란 페이지, 그리고 그의 꼭두각시가 된 이안 페이지가 날뛰는 보랏빛 공간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크윽! 이런 낭패가……!]
절망스러운 상황에 리시스 라덴쥬가 쓴물을 삼켰다.
이안과의 동맹으로 우세를 잡았던 드래곤 일족, 그들이 역으로 궁지에 몰리기까지는 말 그대로 순식간이었다.
“도마뱀들아! 어찌 된 것이냐? 아까의 그 기세는 다 어디로 사라졌지? 내 영혼을 정화해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대체 그 약속은 언제 지켜줄 생각이냐? 엉?”
프란이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든 검은 용의 시체를 짓밟으려 외쳤다. 이미 그는 광기로 물들다 못해 화신이 되어버린 모양새였다.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도마뱀 새끼들! 그러니까 네놈들이 짐승에 불과한 거야! 이참에 모조리 멸종시켜주마. 씨앗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다!”
이 난잡한 흐름 속에서 유추할 수 있듯, 드래곤 일족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본신을 되찾은 프란 하나만으로도 버거울 지언데, 하물며.
[이안 페이지! 내 말이 들린다면 정신을 차려라! 언제까지 놈의 꼭두각시가 되어 조종을 당하고만 있을 참인가? 고작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인간이었나?]
검은 용 아타르 하카가 이안의 맹공을 피하며 소리쳤다.
정말 이성을 되찾아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으나, 사실상 발버둥의 외침과도 같았다.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으니까.
계속 이대로 가다간 저 미쳐 버린 프란 페이지의 선언처럼 ‘멸종’을 맞이할 터. 드래곤이란 종족 자체가 영영 사라진다는 거다.
“입 닥쳐라. 까마귀 도마뱀.”
그 외침에 이안, 정확히는 이안의 육성을 빌린 프란의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한껏 풍기는 멸시와 조롱이 영락없는 프란 페이지였다.
“오냐, 도망치고 또 도망쳐라. 친히 그 아가리를 찢어줄 테니까!”
한마디 남긴 프란은 제 육신으로 돌아가 다시금 드래곤 사냥에 나섰고, 이안의 육신 또한 텅 빈 눈빛으로 드래곤 일족을 노렸다.
[제기랄!]
아타르 하카가 침통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멸종이 코앞까지 도달한 상황, 아무리 생각해 봐도, 드래곤으로서의 모든 지혜와 경험을 총동원해도 정답이 나오지 않았다. 과거 프란 페이지를 봉인했던 당시보다 훨씬 더 불리했으니까.
[윽……!]
바로 그 순간이었다.
프란의 꼭두각시가 된 이안은 아타르 하카가 보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일시에 면전 앞까지 나타나 손바닥을 정면으로 펼쳤다. 피할 길은 물론 일말 여유조차 차단된 상황, 아타르 하카가 단념하며 읊조렸다.
[내 그릇된 판단과 선택이 일족 전체의 종말만을 앞당긴 셈이로구나. 원통하다. 참으로 원통해…….]
이안의 손바닥으로부터 맞이할 죽음, 아타르 하카는 바로 그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무리 기다려도 그 죽음은 찾아오지 않았다.
[……?]
아타르 하카가 면전 앞 이안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조금 이상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인형처럼 딱딱한 눈빛이 아니었던가?
[자네, 설마……?]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눈으로부터 명백한 생기가 돌았다.
살아 있는 생명체의, 영혼을 가진 인간의 순수한 눈빛 말이다.
프란의 지배를 받는 중일까? 아니, 그 역시 아닌 것 같았다. 지배를 받을 때의 광기 어린 눈빛과도 달랐으니까.
“쉿, 조용히.”
머나먼 차원을 넘어 본연의 육신으로 돌아온 이안, 그가 놀란 눈을 뜬 아타르 하카에게 침묵을 요구했다. 본격적인 반격의 서막이었다.
‘다행이다. 아직 긴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어.’
이안은 단숨에 본연의 세상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우여곡절이 참으로 많았다. 여러 차원을 쉴 새 없이 방황했다. 그럴 때마다 새로운 기억과 경험을 받아들였다. 넘어간 차원의 이안 페이지가 수십 년간 보고 겪은 경험들을 말이다.
‘적당한 것 같군.’
실로 색다른 경험이긴 했으나, 오랜 시간을 소모한 탓에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한데 아무래도 괜한 기우였던 것 같았다. 차원과 차원 간의 시간 차이는 이안이 이해하기 힘든 원리로서 흘러가는 모양새였으니까.
‘아직 알아채진 못했나?’
재빨리 프란의 기운부터 살피는 이안이었다. 놈은 아직 이안의 복귀를 알아채지 못한 눈치였다. 드래곤 사냥에 심취한 까닭일까? 말 그대로 ‘방심’에 빠진 상태라는 거다.
‘단숨에 해치운다.’
계획은 간단했다. 더글라스가 연금술 장인 바이온의 정수를 받아 탄생시킨 비약, 이 비약을 놈에게 사용해야한다.
지금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터, 다만 기회는 한 번뿐이리라.
“뭘 하는 게냐, 리시스 라덴쥬! 어차피 막다른 골목 아닌가? 괜한 주접떨지 말고 깨끗하게, 수장으로서 죽음을 받아들여라! 네놈이 선택할 수 있는 최적의 종말일 테니까!”
과열된 프란 페이지의 형상은 그야말로 괴상망측했다. 뿜어지는 마기가 도를 넘어섰다.
검게 물들어버린 눈은 물론, 피부마저 변색되기에 이르렀다.
뿐일까? 머리칼은 흡사 전설 속 메두사처럼 사방으로 넘실거렸으며, 목소리 또한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선한 척 너스레를 떨던 이전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더는 사람조차 아닌 것이 된 건가.’
아니.
놈은 애당초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의 탈은 예전에 벗어던졌다.
일말 동정조차 필요치 않으리라.
‘가자.’
마침내 이안의 형체가 사라졌다.
목적지는 프란 페이지의 면전.
일 초도 채 소요되지 않았다.
“무슨……?”
순간 흠칫할 수밖에 없었던 프란이었다. 자신의 사념으로서 다시 태어난 이안 페이지가 갑작스레 눈앞에 나타났으니 말이다. 이런 명령은 내린 적이 없을 터인데.
“어, 어떻게……?”
놀란 듯 내뱉어진 프란의 물음에.
“잘.”
이안이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동시에 오른손으로는 프란의 멱살을 잡아당겼으며, 왼손으로는 더글라스의 비약을 꺼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