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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164화
64. 비정(2)
“참으로 많은 일을 했더구나. 역시 내 아들이라 그런지 추진력 하나는 타고났어. 음, 이래서 핏줄이 진하다고 말하는 건가?”
보랏빛 봉인구가 사라지고, 그 안에 오랜 세월 봉인되었던 프란 페이지의 ‘본신’이 유유자적 지면으로 내려왔다. 이안과 똑같은 빛깔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그런데 말이야. 지금 이 상황은 솔직히 실망스럽구나. 나는 네 아비로서, 하나뿐인 아들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를 다 보여줬고, 가진바 힘과 지식까지 몽땅 전수해 줬지. 간이고 쓸개고 다 꺼내줬거늘.”
또다시 들려왔다. 이안이 가장 듣기 싫어했던, 저 가증스러운 프란 페이지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단어들. ‘아비’, 그리고 ‘아들’.
“그래도 명색이 아버지한테, 피를 나눈 부모에게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천륜을 저버리고 도마뱀 놈들과 손을 잡겠다는 것이냐? 이 아비는 인정하기 힘들구나.”
아버지, 부모, 천륜.
심기를 건드는 단어들이 연속해서 튀어나왔다. 결국 한계에 봉착한 이안이 낮게 으르렁거리며 대답했다.
“경고했을 텐데. 아비니 아들이니, 그딴 소리 집어치우라고.”
“얼마 전까지야 네 녀석 비위를 맞춰주려고 노력했다만, 이렇게 된 마당에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하긴.”
결국 적으로서 마주했다. 더는 이안의 뜻대로 장단을 맞출 필요가 없을 터. 그 말에 가벼이 수긍한 이안이 하던 말을 이어갔다.
“이제 와서 상관은 없지.”
하나 이안의 반응은 수긍뿐만이 아니었다. 수천 년 전 과거에서도 한 차례 선보였던 마법, 언어의 힘을 발현시킬 수 있는 ‘천 개의 입’이 머리 위 허공으로 나타났다.
“어차피 마지막이니까.”
그것은 명백한 전투태세였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이안과 모든 드래곤 일족.
육신을 되찾은 프란 페이지.
그 인외의 존재들 사이에 말이다.
“이안,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마.”
프란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좋으니 이쪽으로 건너와라. 아비의 손을 잡고 네 세상을 지키려무나.”
그 읊조림에 진실인지, 가식인지조차 알 수 없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이안은 저 간절함이 진심이 아님을, 만들어진 가식임을 확신했다. 감정을 숨기고 과장하는데 특화된 미치광이 아니던가?
“당신이 존재하는 한.”
이안이 단호하게 말했다.
“내 세상은 지켜지지 않아.”
이윽고 천 개의 입이 말할 준비를 시작했다. 드래곤 일족 역시 전투의 진을 완성시켰다. 일촉즉발의 상황이 코앞까지 다가온 거다.
[나불거릴 헛소리가 참으로 많구나. 인간들이여!]
그때, 익숙한 드래곤의 난입이 부자 아닌 부자간의 대화를 끊어버렸다. 끼어든 드래곤의 정체는 바로 젊은 용, 문지기 헤르파이 도토스였다. 이미 이안에게 한차례 큰코다쳤던 그가, 명예 회복을 도모하며 조급하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멈춰라! 헤르파이!]
수장 리시스 라덴쥬가 급히 소리쳤으나 헤르파이 도토스를 막아 세우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렸으니까.
“천방지축 날뛰는 습성은…….”
널따란 곡선을 비스듬하게 그리며 날아오는 헤르파이 도토스의 모습에, 프란 역시 조롱 섞인 목소리와 함께 손을 뻗었다. 곧게 펼쳐진 왼쪽 손바닥이 헤르파이 도토스의 면전으로 겨눠졌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하군.”
육중한 몸으로도 민첩하게 날아드는 헤르파이 도토스의 발톱이 흡사 검기처럼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댔다. 마법이나 브레스가 정답이 아님을 알기에, 자신의 압도적인 신체적 조건을 앞세운 육탄전으로 맞설 요량인 것 같았다. 제법 괜찮은 발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멸하라.)
그 한마디에.
콰과과과과과광-!
지축마저 뒤흔드는 충격파가 프란 페이지의 손바닥에서 떠나 헤르파이 도토스를 집어삼켰다.
“흠.”
시작부터 드래곤 한 마리를 시원하게 잡아 족친 셈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프란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오히려 불쾌한 듯 찌푸리기도 했다. 왜? 이유는 쉬웠다.
“도마뱀 놈들과 언제부터 그렇게 친해진 것이냐? 몸까지 던져가며 보호해줄 정도로 말이다.”
원래대로였다면 육신이 찢어지고 박살났어야 했던 헤르파이 도토스, 한데 그 드래곤이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그보다 앞장서 충격파를 흡수해낸 존재가 나타났으니까.
“이안.”
프란이 그 존재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눈 깜짝할 찰나 헤르파이의 앞으로 나타나 충격파를 흡수해 낸 존재, 그것은 리시스 라덴쥬도, 아타르 하카도 아닌 급조된 동맹, 이안 페이지였다.
“친해졌다기보다는.”
이안이 불러낸 천 개의 입 중 일부가 공간이동을, 나머지는 방어막을 일으켜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아니, 보호막의 규모만 보자면 성공적이다 못해 ‘낭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비록 프란의 충격파가 엄청나긴 했지만, 그럼에도 과분한 대응처럼 느껴질 수준이었다.
“희생이 적을 거라고 장담해서 말이지. 이왕이면 없는 게 좋겠고. 하마터면 시작부터 꼬일 뻔했네.”
[…….]
“조심 좀 합시다. 새끼도마뱀님.”
이안의 말에 헤르파이 도토스가 침묵을 삼켰다. 평소였다면 새끼도마뱀이라는 모욕적인 언행에 불같이 화를 내을 터, 하나 지금은 아무런 반응조차 내보이기 어려웠다.
‘그 짧은 순간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안이란 인간이 목숨을 구해줘서? 아니, 그보다는 저 프란 페이지가 문제였다.
‘바, 발톱이…….’
분명 이안의 방어막이 충격파를 막아줬다.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말이다. 분명 그랬을 지언데.
‘날개까지……?’
부러진 몇 가닥 발톱.
찢겨나간 오른쪽 날개.
인식조차 제대로 못한 사이, 헤르파이 도토스의 육신 곳곳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처가 남아있었다.
[크윽……!]
상처는 비단 발톱과 날개뿐만이 아니었다. 온몸 구석구석에 이르러 크고 작은 상처가 생겨있었는데, 이는 모두 충격파의 극히 일부분, 즉 여파가 닿은 것만으로 생긴 상처들이 분명했다.
‘마, 말도 안 되는…….’
이 상처가 무엇을 뜻하겠는가?
이안의 보호가 아니었다면.
정면으로 받아냈다면.
‘필시 죽었다.’
문지기, 젊은 용.
헤르파이 도토스는 사라졌을 터.
아무런 흔적조차 없이, 깨끗하게.
‘이게 선조의 절반을 학살했다는 인간, 프란 페이지의 힘인가.’
만약 죽음을 맞이했다면 개죽음이었겠으나, 어떻게든 살아남았기에 경험이 되었다. 젊은 용들은 그저 이야기와 기록으로만 접했던 프란 페이지의 힘, 그 인간의 위치를 여지없이 체감해 볼 기회였다.
또한.
‘그 핏줄, 이안 페이지의 힘.’
이미 며칠 전 한차례 겪어봤던 이안 페이지의 힘, 물론 그때는 인정하지 못했다. 자존심이란 녀석이 허락해주지를 않았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저 무지막지한 프란 페이지의 일격을 가볍게 막아내는 존재, 심지어 자신의 목숨마저 구명해준 은인이 아니던가?
[……고, 고맙소. 이안 페이지.]
“한번 살려주는 게 좋긴 좋네. 말투도 약간 공손해진 것 같고.”
이안과 헤르파이가 처음 만났을 때, 그러니까 이안을 우연히 굴러들어온 인간쯤으로 취급하며 마나 하트까지 박살 내버렸던 당시와는 그야말로 정반대의 위치였다.
[그 아이를 구해줘서 고맙다.]
리시스 라덴쥬와 드래곤 일족 전체가 프란 페이지의 사방을 더더욱 좁게 포위했다. 젊은 용들은 모두 프란의 압도적인 경지에 놀란 눈치였으나, 이미 그 힘을 겪어본 바 있었던 나머지 일족들은 오히려 이안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대의 경지는 우리 일족이 가늠했던 수준보다 더 심대한 경지에 도달한 것 같군.]
단언컨대 수장 리시스 라덴쥬는 물론, 일족의 이인자이자 기민함과 은밀함을 즐기는 아타르 하카조차 조금 전 위기에 봉착했던 헤르파이를 보호할 순 없었을 거다. 그리하고자 마음먹는 순간 이미 모든 게 끝나 버렸을 터이니까.
[이런 존재를 아군으로 만들어준 페어리 퀸, 그 아이에게 평생 갚아도 모자랄 빚을 지었구나.]
문득 페어리 퀸을 떠올린 리시스 라덴쥬, 그가 일족들과 함께 본격적인 진영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안의 힘이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조금 더 공격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을 터.
[한때는 모든 일족의 스승이자 지침이었던, 가장 고결한 영혼을 가졌던 인간이여. 오늘에 와서야 타락할 대로 타락해 버린 그대의 영혼을 정화하고자 하오. 나와, 나의 일족, 그리고 가장 강력한 동맹 이안 페이지와 함께 말이오. 부디 당신에게 한 톨이나마 이성이 남아있다면, 저항치 말고 받아주길 청하겠소.]
리시스 라덴쥬의 정중한 어투에.
“타락? 지금 타락이라 했나?”
프란은 오히려 살기를 내뿜었다.
“친히 정화를 시켜주시겠다? 하! 이거 영광이로군. 위대하신 도마뱀의 지도자께옵서 미쳐 버린 인간 따위를 다 구원해 주시겠다니!”
이안과 대화할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아마 저 살기와 광기로 가득한 모습이 본모습이리라.
“늙은 도마뱀아. 뚫린 주둥이라고 함부로 나불거리는구나.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런지 악취마저 가득해.”
코까지 틀어막은 프란.
그의 광기가 빠르게 짙어졌다.
“덩칫값도 못 하고 산속에 틀어박힌 도마뱀 놈들한테 힘을 줬더니만 감히, 감히 내 뒤통수를 쳐?”
그 광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특유의 황금빛 기운이 흑색으로 물들었다. 마나 자체가 강력한 마기로 하여금 변질되기 시작한 거다.
“이안!”
이안은 자신에게 뻗어오는 프란의 광기로부터 급히 정신을 보호했다. 마주했을 뿐인데도 형용할 수 없는 혼돈의 끝자락이 느껴질 정도였다. 작금의 프란 페이지란 그야말로 광기의 폭풍, 혼돈의 소용돌이 그 자체인 것 같았다.
“네가 끝까지 저 도마뱀 놈들의 편에 서겠다면, 나도 더 이상 말리진 않겠다. 하나! 그 선택의 참혹한 대가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
완연한 광기로 물들기 직전에 던져진 물음, 혹은 설득. 그럼에도 이안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오히려 푸른빛의 기운, 즉 마법사로서 가장 순수한 마나의 기운으로 하여금 마기를 몰아내며 또박또박 읊조렸다.
“내 세상은, 당신이란 존재가 사라져야 비로소 평화로워져. 그러니까 프란. 아니…… 아버지.”
이안이 처음으로 ‘아버지’란 호칭을 썼다. 비록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조차 소름 끼치도록 불쾌했으나, 그 씁쓸한 현실을 마지막까지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이만 끝내자.”
선고하듯 내뱉어진 이안의 말과 함께, 마나 본연의 푸르른 기운이 사방으로 폭발했다. 타락한 마기와 순수한 마나의 정면대결이 시작부터 치열하게 펼쳐졌다.
“크크…….”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일까.
혹은 충분히 예상했던 대답일까.
프란이 음울한 광소를 흘렸다.
동시에 이안을 바라봤다.
아니, 노려봤다.
“아버지라고?”
방금까지만 해도 프란의 눈에는 칠흑의 광기와 황금의 총기가 뒤엉켜있었다.
하나 이제부터, 어쩔 수 없다는 그 읊조림 이후부터 확연하게 달라졌다. 눈동자는 물론 흰자위마저 어둠 속으로 잠식되어 버렸으니까.
“지난 열흘, 네놈이 무엇을 하고 다녔는지 모를 줄 알았느냐? 정말 나를 속였다고 생각했느냐? 크큭! 착각하고 있구나. 너는 내가 만들어낸 도구일 뿐이야. 나를 봉인 속에서 끄집어낼 도구 말이다!”
프란의 음성이 점차 기괴하고도 음울하게 변색되기 시작했다.
“애당초 너라는 도구의 가치는 딱 여기까지였다. 네 어미도 마찬가지였지. 영원토록 도구를 잉태할 씨받이에 불과했고, 마침내 그 쓸모를 다했다. 오래도 걸렸군.”
마치 ‘악마’라는 존재가 강림한다면 저런 음성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목소리였다.
(자, 쓸모를 다한 도구여. 이제 그 오랜 잠에서 깨어나 본연의 모습으로 각성하라! 내가 바깥세상에 남겨둔 완벽한 ‘사념체’로서, 오직 내 본신만이 깨울 수 있는 ‘최후의 사념’으로서!)